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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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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사랑이든 능란하든, 찐하게

등록 2008-01-11 00:00 수정 2020-05-03 04:25

취미를 그만두면 먹고살 거리가 사라져버릴 지경에 이른 어느 취미광의 연애수첩

▣ 이명석 저술가

대학 운동장에서 합격자 명단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가족 앞에서 선언했다. “나 기타부터 배울래.” 정확히 하자. 부모님께 바로 말할 자신이 없어, 누나에게 우군이 되어달라고 먼저 넌지시 말한 거다. 누나는 반(半) 초의 기다림도 없었다. “띵까띵까 같은 소리 하네. 운전이나 배워라.” 철저한 실용주의 노선의 집안에서는 학업과 취업에 보탬이 안 되는 모든 행동은 사치일 뿐이었다.

솔직히 뻔뻔한 염장질로 들리겠지

금욕의 대학과 군대 시절이 끝나고, 나는 돈을 벌기 시작했다. 그리고 적지 않은 복수의 마음으로 온갖 취미들을 편력해왔다. 숱하게 스쳐간 것들을 모두 떠올리기는 벅차다. 지금 본격적으로 즐기고 있는 진행형의 취미만으로도 열 손가락을 채울 만하다. 나는 오늘도 하늘색 빈티지 스쿠터를 타고, 동네 화원에서 새로운 구근을 산 뒤에, 단골 카페에서 방금 로스팅된 커피 원두를 품평하고, 플라멩코 기타 학원에서 두어 시간 수련을 마친 뒤, 택배로 온 개구리 인형을 진열해둘 선반을 페인트칠하고, 스윙댄스 동호회의 정모 시간에 맞추어 달려간다. 남들은 취미라 할 만한 사진과 그림은 생업 수단이 되었고, 만화·영화·TV 보기는 질릴 정도다.

친구들은 “너는 어떻게 그런 걸 다 즐기고 사냐?”고 묻는다. 부러움 뒤쪽에 비아냥이 섞여 있는 걸 안다. “돈도 시간도 남아도나 보구나.” 솔직히 나도 벅차다. 그런데 이제 뭔가 쉽게 그만두기도 어렵게 되었다. 취미를 그만두게 되면, 내가 글을 써서 먹고살 ‘거리’가 사라져버릴 지경이 되었다. 돈이 생겨 좀 놀려고 했더니, 노는 이야기로 돈을 벌게 되는 묘한 순환 구조가 만들어진 것이다.

솔직히 뻔뻔한 염장질로 들리겠지. 하지만 이렇게 만들기까지 내가 흘린 피땀도 만만찮다. 직업이 ‘결혼’이라면 취미는 ‘연애’다. 풋사랑이든 바람둥이의 능란한 연애질이든, 적당히 평온한 관계 같은 건 기대하지 않아야 한다. 취미는 찐해야 한다.

초반 3개월에 제대로 파고들지 못하면, 그 취미에 대한 열정은 사라져버리는 것 같다. 바로 그때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하고, 찾을 수 있는 모든 자료를 모으고, 이 취미로 갈 수 있는 길에 대한 지도를 얻어야 한다. 처음 내가 만화와 사랑에 빠졌을 때는 일본과 유럽을 넘나드는 원거리 연애 때문에 더욱 뜨거워졌던 것 같다. 항공기 반입 규정을 초과하는 책들로 허덕대면서도 즐거워했다. 페티시즘도 있어야 한다. 좋아하는 화가의 초등학교 때 낙서까지 찾아 컴퓨터에 저장해두어야 하고, 새로 돋은 선인장의 솜 가시 하나도 기록해두어야 한다.

혼자서는 힘들다. 나와 딱 맞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커뮤니티를 찾는 게 중요하다. 나는 지지난해 봄에 플라멩코 기타를, 지난해 봄에 스윙댄스를 시작했다. 강사와의 일대일 레슨이 주가 되는 기타는 지금 좀 시들해져버렸다. 기대했던 합주 팀도 안 이루어지고, 좋아하는 곡의 악보를 함께 채보하며 떠들 친구도 없다. 반대로 스윙댄스는 한창 열을 올리고 있다. 나만큼이나 열의로 가득 찬 친구들이 유튜브에서 찾아낸 새로운 패턴을 서로 가르쳐주고, 건수만 생기면 파티를 열고 춤 출 궁리를 해대고 있다.

커뮤니티, 자랑질이 가속 페달

자랑질 역시 우리 취미의 가속 페달이 된다. 뭔가 시작하면 약간 과장해서라도 친구들에게 먼저 떠들어라. 그러면 그 말을 부끄럽지 않게 만들기 위해 더 열심히 하게 된다. 블로그나 미니홈피도 좋다. 새로 만든 도자기, 지난번에 했던 공연, 내년에 도전할 등반 코스…. 방구석에서 은밀히 즐기는 연애도 좋지만, 남 보란 듯이 손잡고 대낮을 활보하는 즐거움에 비하겠나?

또 어떤 친구가 말하겠지. “그래 봤자 취미일 뿐이야.” 그래, 뜨거움이 식으면 연애도 허망해 보이겠지. 그러나 추억할 옛사랑 하나 없이, 늘어만 가는 평균연령을 어떻게 견디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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