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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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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스킬자수

등록 2008-01-11 00:00 수정 2020-05-03 04:25

단 3개월의 ‘이기적인’ 취미생활… 닭 잡던 우악스런 손으로 한땀 한땀 놓다

▣ 글·일러스트레이션 김성희 만화가

금남시장은 서울에서도 웬만치 규모가 되는 재래시장 중 하나다. 영화 에서 막 출소한 설경구가 급히 두부를 사먹는 장면을 보며, 아, 했는데, 그곳이 바로 금남시장이다. 어머니는 1980년대에서 90년대 초반까지 그곳에서 닭장사를 했다. 시장에서도 억척으로 유명하고 악다구니한 무안댁이 우리 엄마였다. 상호가 ‘무안닭집’이었기에 어머니는 ‘무안댁’으로 통했다.

“나 원래 수 잘 놓거든”

재래시장은 많은 것을 날것으로 팔았다. 어머니의 가게에는 닭장과 생닭들로 번잡스러웠다. 손님이 닭을 달라고 하면 어머니는 닭장에서 한 마리를 꺼냈다. 어머니의 손에 잡힌 닭은 순식간에 목이 부러졌다. 장사가 잘될 때는 하루에도 100마리 넘게 닭이 어머니의 손에 부러졌다. 목을 꺾었는데 죽지 않고 꼼지락거리는 닭도 있었다. 그런 닭을 보다 보니 나는 친구들이 노란 병아리가 갖고 싶다고 하는 것이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억척스럽게 번 돈으로 가게에 붙어 있던 단칸방에서 나와 살림집을 마련할 수 있었다. 살림집을 차리면서 가게세를 뺐고 어머니의 가게는 금남시장의 노점으로 바뀌었다. “우악스럽다”며 유난히 어머니의 일을 좋아하지 않던 오빠와의 충돌 뒤에 어머니는 노점도 그만두었다. 그 뒤 어머니는 매일 집안일만 하게 되었다.

중2 때였다. 당시 스킬자수가 전국적으로 대유행이었다. 학교 앞 문방구에서는 다양한 크기의 스킬자수를 팔았고, 쉬는 시간이면 모두 다 스킬자수를 꺼내놓고는 째깍거렸다. 집에 돌아왔더니 돌아앉은 어머니가 골똘히 방 안에서 무언가를 하고 계셨다. 어머니의 손에 들린 것은 ‘내 친구나 하는 놀이’였다. 어머니가 늘 말씀하시던 “나 원래 수 잘 놓거든”과도 좀 멀어 보였다. 놀라서 쳐다보니 엄마는 “나도 하고 싶은 거 할 거다”고 말씀하셨다. 스킬자수만큼이나 이 말도 충격이었다.

호랑이 띠인 본인처럼 스킬 털을 끼고 있는 그림은 포효하는 호랑이였다. 나의 키보다 좀 작을 정도로 크기도 컸다. 이 정도의 크기라면 우리 같은 놀이가 아니라고 느껴졌다. 그 크기라면 엄마가 하는 일이 맞다고 생각됐다. 그 호랑이 그림의 스킬자수는 얼마 안 있어 현관 앞에 걸렸다. 호랑이가 액을 막아준다는 것이었다.

호랑이를 완성한 뒤 어머니는 ‘진짜’ 수를 놓겠다고 팔을 걷어붙이셨다. 어머니가 계획하고 있는 ‘수’는 거대한 ‘공사’였다. 8풍 병장의 수를 놓겠다는 것이다. 스킬자수를 마치자마자 착수하셨다. 거칠고 울퉁불퉁한 엄마의 손에서 명주실로 학이며 구름이 곱게 생겨났다. 3폭을 마쳤을 때 할머니가 차 사고가 났고 하반신 마비가 되었다. 어머니는 수틀을 치웠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자 친척 갓난아기가 어머니에게 맡겨졌다. 어머니는 국제통화기금(IMF) 위기 뒤 생활이 힘들어지자 동네의 갓난아기도 봐주었다. 그리고 오빠가 결혼한 뒤에는 손자를 길러야 했다. 아이가 복작거리는 집안에 어머니가 그 “잘한다”는 수를 놓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혼자만 좋은’ 취미는 안 될까

지금은 어머니도 ‘취미’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요즘의 ‘취미생활’은 텃밭 가꾸기다. “집에만 있다 텃밭 갈 때가 가장 마음이 편하다. 공기도 좋아서 숨도 쉬어진다”고 여전히 목소리만 우악스런 엄마가 말한다. 그 텃밭 가꾸기도 자식들에게 바리바리 싸줘야 하니까 일이 크다. 힘든 일을 왜 그렇게 하냐고 타박하면 그런다. “내 유일한 취미가 텃밭 가꾸기 아니냐.” 내가 아는 취미는 ‘나를 향한 즐거움’이지만 엄마가 아는 취미는 ‘가족을 향한 즐거움’이다. 그럴 때 현관에 걸린 호랑이 스킬자수가 눈에 밟힌다.

최근에 어머니에게 물어보았다. “그때 왜 하필 수를 한다고 그랬어.” “처녀 적에 베갯잇이나 이불 수를 잘 놓았거든.” “아… 그런데 스킬자수였어? 나 속으로 엄청 웃었잖아.” “그때가 사십 초입인데 눈이 침침하더라고.” 호랑이 스킬자수와 8풍 병장 중 3폭, 어머니가 취미생활을 하신 기간은 3개월 정도 되려나. 엄마 노정순씨! 이제는 좀 이기적인 ‘혼자만 좋은’ 취미도 가지면 안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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