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된 165곳 야학 중 정부 지원은 50곳 뿐, 공간 없어 ‘길거리 수업’ 나서기도
▣ 글 김경욱 기자dash@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서울 구로구 구로동에 위치한 섬돌야학. 조순보(44)씨는 5평 남짓한 이곳 강의실에서 꿈을 키워가고 있다. 그는 정규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3학년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마저 13살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몸이 불편한 오빠와 어린 동생을 돌봐야 했다. ‘초등 중퇴’이라는 꼬리표가 평생을 따라다녔다.
조씨는 2006년 7월 검정고시를 보기 위해 사립학원문을 두드렸지만 발길을 돌려야 했다. 월 50만원에서 100만원을 넘나드는 학원비를 감당하기 힘들어서다. 직장 선배가 야학을 알려줬다. 섬돌야학에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매일 아침 6시30분에 일터로 나가 꼬박 12시간을 일하고 퇴근하면 바로 야학으로 달려간다. 조씨는 서비스업 종사자다. 고단한 몸도, 버스로 1시간 넘게 걸리는 거리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배울 수 있다는 것이 마냥 행복하고 감사할 뿐이다. 그는 2007년 5월 중입 검정고시 합격에 이어, 3개월 만에 고입 검정고시에도 합격했다. 지금은 대입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있다.
10대~50대 공부하지만 지원은 ‘청소년만’
섬돌야학에는 요즘 ‘특별한 학생’이 생겼다. 조씨의 아들 ㄱ(12)군이다. 그는 엄마 손을 잡고 와서 강의를 듣는다. 늦게까지 공부하는 엄마를 기다리다 무심코 들은 중등 영어 강의에 재미를 붙이게 됐다. 일종의 ‘선행학습’인 셈이다. 판사를 꿈꾸는 ㄱ군은 학원이 아닌 이곳에서 대학생 누나와 형들에게 중학교 과정을 즐겁게 배우고 있다.
15평 크기인 섬돌야학은 좁은 거실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5평 규모의 방 두 개를 강의실로 쓴다. 중등반과 고등반으로 나뉘어 있는데, 교사 15명과 학생 13명이 함께 쓰기에는 비좁다. 교사들은 대부분 대학을 막 졸업한 졸업생과 재학생 자원봉사자들이다. 월급은 없다. 오히려 한 달에 1만원씩 회비를 낸다. 학생들은 10대에서 50대까지 다양하지만 규칙적으로 참석하는 이들은 40대 주부들이다. 대체로 일터에서 일을 마친 뒤 고단한 몸을 이끌고 와서 늦은 시간까지 공부한다.
섬돌야학은 정부에서 주는 청소년 지원기금과 서울시 지원금으로 운영된다. 2007년 한 해 정부에서 500만원, 서울시에서 260만원을 받았다. 매달 들어가는 월세 47만원과 전기세, 수도세 등 각종 공과금을 내기에도 빠듯하다. 이곳에서 수학과 과학을 가르치는 박정규(24·중앙대 재학)씨는 “지원금 외에 부족한 부분은 교사들의 회비와 이곳을 거쳐간 선배 교사들의 후원금으로 채워오고 있다”고 말했다. 박씨는 “현재 우리 야학에 청소년 수가 많지 않아서 2008년부터는 청소년 지원기금을 받을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지원을 받지 못하면 당장 문을 닫아야 하는 형편”이라고 한숨을 쉬었다.
야학은 시대에 따라 변해왔다. 일제강점기 아래에서는 민족계몽의 현장이었고, 개발도상기에는 가난한 ‘공돌이’ ‘공순이’의 배움의 장이었다. 독재의 시대에는 노동자와 빈민들의 의식화 장이기도 했다. 100년의 역사를 지닌 오늘의 야학은 재정적 어려움과 사회의 무관심 속에도 그 명맥을 어렵게 유지하고 있다. 1세기 동안 배움의 터전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구제한 것은 국가가 아닌 야학이었다. 그들에게 ‘학습권’은 먼 나라 이야기다.
전국야학협의회가 파악하고 있는 야학은 현재 전국적으로 모두 165곳. 이들 중 정부의 지원을 받는 곳은 50곳뿐이다. 김동영 전국야학협의회 회장은 “미등록 야학과 비정규 교육장까지 합하면 전국에 500~600개의 야학이 있는 것으로 추산한다”고 말했다.
12월31일 ‘마지막 수업’한 장애인 야학
야학에 대한 정부 차원의 지원이 시작된 것은 1991년부터다. 집행 부서가 바뀌다가 2006년부터 국가청소년위원회(이하 청소년위원회)가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청소년위원회는 지원을 맡은 이듬해인 2007년 청소년이 80% 이상인 곳에 한해 지원하기로 대상을 대폭 줄였다. 청소년을 위한 지원기금이 목적 외로 사용될 우려가 있다는 이유였다. 대신 성인이 많은 야학들은 교육인적자원부의 ‘문해교육’ 지원을 받으라고 했다. 하지만 문해교육 지원은 각종 민간 복지관과 지방자치단체가 운영하는 교육 프로그램을 주요 대상으로 한다. 야학이 낄 틈이 없다. 2007년 서울의 25개 야학 중 문해교육 지원을 받는 곳은 신당야학과 성동야학 등 7곳에 불과하다.
문해교육 사업의 지원을 받는다고 형편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서울시 중구 황학동에 위치한 신당야학은 500여만원에 달하는 지원금으로 건물 임대료를 일정 부분 해결해 한숨을 돌릴 수 있었지만, 운영비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학생 30명과 교사 8명은 자체적으로 매년 두 차례(7월17일 개교기념일과 12월25일 문학의 밤 행사) 후원회를 열지만, 수익금은 그리 많지 않다. 주요 후원자들은 이곳을 거쳐간 교사들이다. 임승택 신당야학 교감은 “운영비 마련을 위한 행사를 하려 해도 마땅한 공간을 얻을 수 없어 어렵다”며 “다각적인 지원이 절실하지만, 먼저 공간 문제만이라도 정부 차원에서 해결해준다면 좋겠다”고 말했다.
장애인 야학의 상황은 더 열악하다. 서울 광진구 구의동 정립회관에 14년 동안 둥지를 틀어온 노들장애인야간학교(노들야학)는 2007년 12월31일이 ‘마지막 수업일’이다. 그동안 사용하던 공간을 비워달라는 정립회관(관장 백승완)의 통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립회관은 장애인 이용시설로 1993년 8월부터 노들야학에 무상으로 공간을 제공해왔지만 2007년 6월부터 공간을 비워달라고 요구해왔다. “노들야학 때문에 추가로 발생하는 냉난방비와 인건비 등을 부담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였다.
장애인들에게 야학은 공부하는 곳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거동이 불편한 그들이 사람들을 만나 함께 교육받으며 사회화 과정을 쌓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곳이기 때문이다. 뇌병변 지체장애인인 배덕민(41) 노들야학 학생회장은 이곳에서 만난 최미은(45)씨와 결혼을 앞두고 있다. 최씨 역시 뇌병변 지체장애인이다. 이들은 최근 양가 상견례도 마쳤다. 배씨는 “기도원과 꽃동네 등의 수용시설에서 6년 동안 힘들게 갇혀 살았다”면서 “야학에 와서 공부하며 고입 검정고시도 합격하고 사랑하는 사람도 만나게 됐다”고 말했다. 뇌병변 지체장애인들은 일반인과 달리 의사소통이 힘들다. 배씨는 한마디 한마디 온몸의 근육을 동원해 힘겹게 토해냈다. 그는 노들야학이 정립회관에서 나와야 한다는 사실에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공부할 공간이 없어진다는 것은 삶의 터전이 없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계속 공부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말했다.
노들야학은 서울시 교육청으로부터 1년에 5천만원을 지원받는다. 이동이 여의치 않은 장애인들을 위한 차량을 운영하는 것을 감안한 금액이다. 각종 사회단체와 개인에게 매달 200만원가량의 후원금을 받고 있지만 상근 교사 5명의 월급을 주기도 턱없이 부족하다. 교사 정민구(28)씨는 “한 달 월급으로 65만원을 받는다”면서 “월급도 월급이지만 공간이 확보되지 않아 옆반 강의 내용이 그대로 들려 수업에 지장이 많다”고 말했다. 노들야학의 학생과 교사 50여 명은 2007년 12월26일 서울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에서 ‘장애인 교육권 보장’을 외치며 길거리 수업을 열었다.
야학인의 꿈 “죽을 때까지 배우고 싶다”
3교시 음악시간. 크고 작은 목소리들이 어우러졌다. “성적도 불량 복장도 불량 그나마 얼굴마저 불량, 우리는 어쩔 수 없는 불량품, 함께 소리쳐보자 여윈 가슴 보듬고, 우리 사는 이 땅 어디에 꿈이 있을까…” 이들은 한겨울의 추운 날씨에도 전동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 를 부르고 또 불렀다. 박경석(47) 노들야학 교장은 “정부가 공간을 지원해주지 않으면 2008년 1월2일부터는 천막에서 수업을 진행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야학은 ‘정규 사회’에서 밀려난 마이너리티들에게 희망의 밑불이다. 왕따를 당해 자살을 생각하던 여중생은 야학에서 상처를 치유하고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폭행 사건으로 학교를 그만뒀던 고등학생은 어머니와 함께 야학에서 검정고시를 준비한다. “부모 학력란에 ‘무학’이라고 적을 때 자식들이 나를 부끄럽게 생각할까봐 늘 걱정이었습니다.” 대구 질라라비야학의 박명애(54) 대표 역시 야학에 다니면서 그 걱정을 떨칠 수 있었다. 야학 ‘학생’으로 들어와 이제는 그 야학을 이끌고 있는 박씨는 ‘제도권 학생들’과는 다른 꿈을 꾼다. “죽을 때까지 배우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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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야학이 뿌리내린 지는 100년이 넘었다. 최초의 야학은 1906년 함경남도 함흥군 신중면에 설립된 보성야학이다. 그 뒤 마산 노동야학, 경성부 관영야학, 중동야학 등이 등장하면서 2년여 만에 전국적으로 5천여 개(서울 100여 개)의 야학이 생겨났다. 일본의 국권 침탈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전국적으로 야학은 그야말로 ‘들불처럼’ 퍼져나갔다. 문맹 퇴치를 명분으로 내걸었지만 독립의식과 민족의식 고취가 당시 야학을 이끈 ‘계몽가들’의 속내였다.
일제는 1930년이 되면서 본격적인 야학 탄압에 들어갔다. 민중야학은 소멸되고 관제야학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1939년에 2만6천여 개의 친일 야학이 전국적으로 세워졌다.
해방 뒤 야학은 정부와 민간 차원에서 동시에 조직됐다. 1950년대 이승만 정권은 각 대학에 농촌계몽 운동반을 조직했다. 본격적인 야학 활동은 1960년대 들어서 이뤄졌다. ‘검시야학’(검야)이라고 불린 당시 야학은 검정고시 준비반 성격이었다. 1960년대 개발 드라이브를 타며 도시 빈민과 노동자들이 주경야독 생활을 했다.
야학은 1970년대 들어서면서 중대한 변화를 맞는다. 1960년대 야학이 제도권 교육을 보완했다면 1970년대 야학은 ‘생활야학’(생야), ‘노동야학’(노야)의 이름으로 ‘지금, 여기’ 삶의 문제에 다가갔다. ‘생야’는 농민과 도시 빈민들의 소외 문제에, ‘노야’는 도시 노동자들의 계급의식 고양에 초점을 맞췄다.
1980년대로 넘어오면서 야학은 학생운동의 중요한 현장으로 자리잡는다. ‘학내 정치 참여냐’ ‘학외 민중 속으로냐’ 노선을 두고 벌였던 ‘야비-전망’ 논쟁에서도 드러나듯, 야학은 대학생들의 현실 참여의 장으로 여겨졌다. 1990년대에 들어서 민주화가 진전되고 노동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야학은 외연을 넓혔다. 2000년대 들어서는 농민, 도시 빈민, 노동자들이 떠난 자리를 노인, 주부, 장애인, 이주노동자들이 빼곡히 메우고 있다.
도움말: 양병찬 공주대 교수(교육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