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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숙’은 지방 교육의 숙명인가

등록 2007-12-21 00:00 수정 2020-05-03 04:25

순창군의 선택받은 상위 20%를 위한 ‘공립 기숙학원’ 인재숙의 실태

▣ 순창=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의 번화한 중심가에서 걸어서 20분쯤 떨어진 곳에 4층짜리 건물 두 동이 서 있다. 주변은 허허벌판이다. 건물 앞 4차선 도로에도 차들이 드문드문 지나갔다. 12월11일 오후 6시, 교복을 입고 책가방을 멘 아이들이 하나둘 이 건물로 들어간다. 학교 수업이 끝난 아이들이 집 대신 가는 이곳은 ‘옥천(순창의 옛말)의 인재들이 공부하는 글방’이라는 뜻의 ‘옥천 인재숙’이다. 중3 때부터 인재숙에서 생활했다는 설나래(18)양은 “저녁 먹고 옷 갈아입고 7시10분부터 시작하는 수업을 듣는다”라고 말했다.

△ 200명의 ‘인재숙 아이들’은 학교 수업이 끝나면 집 대신 인재숙으로 향한다. ‘공교육을 무력화한다’는 주장과 ‘인구 유출이 심각한 농촌사회의 마지막 대안’이라는 엇갈리는 주장은 ‘인재 양성’ ‘도농 격차’에 대한 복합적 질문을 한국 사회에 던진다.(사진/순창군청 제공)

6시30분 기상 알람, 체조하고 학교로

인재숙 수업은 국어·영어·수학(고2·고3은 논술이 추가된다) 세 과목으로 서울·광주 등 도시에서 온 유명 학원 강사들이 수업을 한다. 수업 내용은 한 학년 위의 것이다. 중학교 3학년인 윤용현(16)군은 고등학교 수학 참고서인 을 배우고, 고등학교 2학년 최복습(17)군은 1년간 고3 과정을 모두 끝내고 지금은 미분·적분 심화 수업을 듣는다. 중3·고1 학생들은 9시45분까지, 고2·고3 학생들은 10시40분까지 수업을 듣고 11시40분까지 자율학습을 한다. 원하는 학생들은 새벽 1시까지 자습할 수 있다. 새벽 1시에야 숙소로 돌아간 아이들은 하루 정리를 하고 1시30분~2시쯤 잠이 든다. 다음날 아침 6시30분, 아이들은 모두 ‘기상 알람’에 맞춰 일어나 체조를 하고 학교 갈 준비를 한다.

학교 수업을 마친 아이들을 대상으로 학원 강사들이 ‘선행학습’을 시키는 이곳은 겉보기엔 ‘학원’이다. 재학생들이 다니는 보통학원과 다른 점은 잠까지 재우는 기숙학원이라는 점이다. 다른 건 이것만이 아니다. 인재숙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개인’이 운영하는 일반 학원이 아니라 지방자치단체인 순창군청이 운영하는 ‘공립 학원’이다. 이런 공립 학원이 있는 곳은 전국에서 순창군이 유일하다. 대상은 순창군에 사는 1천여 명의 중3~고3 학생들로, 인재숙이 치르는 자체 시험을 통과한 200명(학년별 50명)이 정원이다. 순창군의 ‘선택받은 상위 20%’가 모여서 공부하는 ‘방과후 기숙사’인 셈이다.

현행법상 시·도를 제외한 지방자치단체는 교육기관을 직접 운영할 수 없다. 이에 순창군은 자본금 3억원을 출연해 순창군옥천장학회(이사장 강인형 순창군수)를 설립했다. 그리고 2004년부터 이 장학회에 위탁해 인재숙을 운영해왔다. 강인형 군수는 “제대로 된 학원 하나 없는 농촌의 열악한 교육환경을 개선해 자녀 교육 때문에 인근의 정읍, 전주, 광주 등으로 나가는 젊은 부부들의 유출을 막고 순창군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세웠다”고 말했다. 강 군수는 “현행법이 현실을 못 따라가면 바꿔야 하지 않는가”라며 “법적 논란을 고려해 위탁 운영을 하고 있으므로 문제될 게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인재숙’은 법적 지위에 대한 논란 외에도 전교조, 참교육학부모회 등 전북 지역 교육단체들로부터 “지방자치단체가 앞장서 공교육을 무력화하고 아이들을 지나친 입시교육으로 몰아넣는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김지성 전교조 전북지부 정책실장은 “인재숙은 현행법상으로는 그 법적 형태를 규정할 수 없는 탈법적 학원 형태로 아무런 관리·감독도 받지 않으면서 운영되고 있다”며 “교육기관이 멀쩡하게 있는데 지방자치단체가 직접 사교육을 부추기는 이런 교육을 할 이유가 없다”고 지적했다.

인재숙을 둘러싼 논란은 인구 3만여 명의 조용한 농촌 순창을 시끄럽게 하고 있다. 인재숙은 강인형 군수의 말처럼 인구 유출을 막기 위해 지역사회에 꼭 필요한 기관일까. 아니면 전교조의 주장대로 공교육을 무너뜨리는 주범일까.

잠 모자라 수업시간에 조니 ‘잠재숙’

12월11일 저녁 8시30분 순창제일고등학교의 한 교실. 집이 학교와 멀어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20여 명의 아이들이 두 교실에서 자습을 하고 있었다. 인재숙에 대해 묻자 아이들의 불만이 쏟아져나왔다. 김수현(17)양은 대뜸 “우리 엄마·아빠도 세금을 내는데 왜 우리는 인재숙에 못 들어가는지 모르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양은 “공부를 못하지만 잘하고 싶어하는 애들에게 공부를 시켜서 잘하게 만드는 게 중요한 것 아니냐”고 덧붙였다. 옆자리의 박아무개(17)양은 “벌써 두 번째 인재숙 시험을 쳤는데 떨어졌다”며 “저는 반에서 5등 정도 하는데, 열심히 한다고 다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라서 속상하다”고 말했다.

군에서 모든 ‘사교육비’를 대주는 인재숙 교육은 상당한 특혜지만, 결국 시험에 합격한 소수만 그 특혜를 누릴 수 있어 형평성 논란은 끊이지 않는다. 인재숙의 선발 기준이 생활 형편, 학생의 희망 등과는 무관하게 100% ‘성적’이라는 것도 이런 논란을 부채질한다. 김지성 정책실장은 “정작 ‘보충 교육’이 필요하거나 받고 싶어도 받을 수 없는 학생들은 끼지도 못하니, 또 다른 교육 양극화를 낳는 게 아니냐”고 말했다.

일선 교사들은 이 ‘학원’이 공교육의 틀을 흔든다고 입을 모은다. 순창 지역 교사들은 인재숙을 ‘잠재숙’이라고 부른다. 양상춘 순창고 교사는 “인재숙에 다니는 아이들은 늘 잠이 모자라 수업시간에 졸곤 한다”며 “보통 수업은 상위권 성적의 아이들이 대답을 재깍재깍 하면서 분위기를 끌어가는데, 그 학생들이 주로 잠을 자니 수업 분위기가 맥빠진다는 얘기가 많다”고 말했다. 인재숙의 한 학생(16)은 “엄마가 들어가라고 해서 시험을 봤다”라며 “잠이 부족해서 학교 수업시간에 많이 존다”고 말했다. 이 학생은 “과학은 학교에서만 수업하고, 다른 과목들도 인재숙이랑 진도가 많이 다른데, 학교에서는 자꾸 자게 되니 기말고사 성적이 떨어질 것 같다”고 말했다.

인재숙 아이들은 수행평가 등을 위한 학교 조모임 활동 등에도 잘 참여하지 못한다. 김아무개(17·순창제일고)양은 “토론 과제나 조별 숙제가 있으면 인재숙 아이들이 포함된 조는 걔들이 다 해온다”라고 말했다. 김양은 “인재숙 아이들은 수업이 끝나면 곧장 인재숙에 가야 해서 조별 활동에 참가하지 못해 미안하니까 자기들이 알아서 해온다”고 말했다.

아이를 순창에서 전남 영광의 한 대안학교로 전학시킨 학부모 한호숙(43)씨는 “아이가 개성적인 삶을 원했다”라며 “이곳은 ‘인재숙 다니는 아이’와 ‘인재숙 안 다니는 아이’로 구분지어지는 경향도 강하고, 인재숙을 다니지 않는 것이 잘못도 아니고 바보인 것도 아닌데 아이가 위화감을 느끼기도 했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일찍이 ‘20 대 80’의 양극화를 겪는다는 얘기다.

인재숙에 대한 이런 문제 제기에도 불구하고 순창 군민들의 인재숙에 대한 지지는 강력하다. 전남대 사회과학연구소가 순창군의 의뢰로 지난 9월14∼16일 20살 이상 지역 주민 1천 명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했더니, 응답자의 83.2%가 “인재숙이 순창군에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서울대 2명 합격… 군민 83.2%가 지지

이런 지지는 인재숙이 보여준 입시 성과 때문이기도 하다. 지난해 순창군은 17년 만에 처음으로 2명의 서울대 합격자를 배출했다. 둘 다 인재숙 출신으로 2004년 첫 원생을 받은 ‘인재숙 3년의 힘’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큰딸, 작은딸, 조카까지 모두 인재숙에 들여보냈다는 박창흥(48)씨는 “인재숙의 교육 방식은 시골에서는 접할 수 없던 획기적인 방식”이라며 “시골 아이들도 대도시 아이들처럼 열심히 공부할 수 있고, 또 좋은 대학 갈 수 있다는 점에서 순창의 아이들에게 인재숙은 ‘꿈’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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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숙을 둘러싼 논란은 점점 과열되는 분위기다. 12월4일 전북도의회 교육위 회의장 앞에서는 때아닌 삭발시위가 벌어졌다. 전북교육청이 발의한 조례개정안을 처리하지 말라고 순창군에서 몰려온 학부모들이 벌인 시위다. 전북교육청은 지난 10월 “재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기숙학원은 공교육 정상화를 막고, 성장기에 있는 청소년들의 단체 생활을 통한 폐해를 심화할 수 있다”며 ‘재학생 대상 기숙학원 금지’를 주요 내용으로 한 조례개정안을 발의했다. 아이들을 인재숙에 보내고 있거나, 인재숙에 찬성하는 순창군민들이 전주로 올라와 집회를 하며 개정안 폐기를 요구했다. 전북도의회는 이날 결국 조례개정안을 심의하지 않고 일정을 미뤘다.

이런 과열된 분위기가 인재숙을 발전적으로 운영하는 데 독이 된다는 의견도 있다. 인재숙에 아이를 보내고 있는 한 학부모는 “인재숙이 필요하다고 보지만, 형평성 문제나 주입식 교육 방식을 개선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한다”며 “하지만 그런 의견을 조금만 내비쳐도 찬성하는 사람들이 ‘그럼 인재숙을 없애자는 것이냐’며 ‘도끼눈’을 뜨기 때문에 인재숙에 대해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게 지금 순창의 분위기”라고 말했다. 이 학부모는 자신의 신상정보가 기사에 나오지 않게 해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지역사회의 강력한 지지와 인재숙의 성과 때문일까. 지금 전북의 지방자치단체들은 인재숙을 벤치마킹한 기숙학원을 만드는 데 열심이다. 전북 김제시는 내년 2학기 개원을 목표로 기숙학원을 준비 중이다. 박현 김제시 인재양성과 과장은 “12억원을 들여 ‘옥천 인재숙’과 같은 형태의 학원을 설립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전북 완주군도 비슷하다. 완주군은 올해 약 75억원의 예산을 지자체가 운영하는 ‘학원’ 에듀빌 건립에 배정했다. 도교육청이 조례개정안을 발의함에 따라 이 예산은 내년으로 이월되지만, “내년에는 어떻게든 추진한다는 게 완주군의 입장”이라고 인재양성과 담당자가 밝혔다.

“지자체의 ‘좋은 대학’ 올인은 비극”

전북 지자체의 이런 움직임에 대해 김천기 전북대 교수(교육학)는 “지방자치단체는 교육기관이 교육을 잘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게 본연의 역할”이라며 “‘좋은 대학’이라는 사적 욕심을 공공기관이 인정하고 부추김에 따라 전북 지역 전체가 ‘수도권 상위 대학’에 아이들을 보내느라 올인하는 비극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강인형 순창군수는 “순창군에서 빠져나가는 애들은 다들 공부 잘하는 애들과 그들의 학부모들이므로 자구책을 어떻게든 찾을 수밖에 없다”면서 “공부 잘하는 애들을 대상으로 정책을 펼쳐야 인재 육성도 지역 발전도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임상호 순창제일고 교사는 “서울대 보내기 경쟁에 지자체까지 앞장서는 게 과연 인재 육성이고 지역 발전인가”라며 “인재숙 운영 예산을 열악한 학교 시설과 교육 여건 개선에 쓰고, 농부부터 교수까지 다양하게 키워내는 게 진정한 ‘지역 인재’를 양성하는 길”이라고 말했다. 인재숙을 둘러싼 논란은 ‘인재 육성’과 ‘교육 양극화’ ‘도농 격차’에 대한 복합적인 질문을 우리 사회에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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