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 전차에서 시작된 대중교통사… 미군정부터 버스가 떠오르다 지하철에 자리 내줘
▣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어쩌면 그것은 괜한 분노였는지도 모르겠다. 그 남자가 느닷없이 소리를 지른 것은 열차가 천천히 지하철 1호선 오류동역을 빠져나오던 무렵이었다. “폭파해버릴 거야! 이 차를 폭파해버리겠다!”
처음엔 그도 자신의 입에서 터져나온 외침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사실 그에게 무슨 큰일이 벌어진 것은 아니었다. 5월의 도시 광주에서 ‘그 일’을 겪고 난 남자는 5년이 지난 어느 여름 지상으로 빠져나온 첫 번째 역인 ‘남영’에서부터 숨이 막혀왔던 것뿐이다. 찌는 듯한 불볕더위 속에서 콩나물 시루로 변한 전철 안의 공기는 폭발하기 일보 직전으로 달아올라 있었다. “이마의 땀을 닦아야 하는데….” 팔을 들어올리려는 남자의 시도는 번번이 실패했고, 영등포역쯤에 이르러서부터는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극한적인 상황에까지 몰리게 된다. 소설가 양귀자는 1987년 11월 펴낸 연작소설 에서 그 시절 부천에서 서울까지 지하철로 출퇴근하던 소시민들의 고통을 “이 차를 폭파시켜버리겠다!”는 비명 한 문장으로 형상화해내고 만다.
당고개에서 오이도로 향하는 지하철 4호선 열차 안. “아저씨, 밀지 좀 마세요.” 곁에 서 있던 20대 여성이 절박한 음성으로 비명을 질렀다. 2007년 10월19일 오전 8시20분, 당고개를 출발해 노원에서부터 힘겨워지던 열차는 창동과 수유를 넘어서며 발디딜 틈조차 없는 ‘지옥철’로 변하고 말았다. “다 힘든데 아가씨 혼자 왜 그래요.” 잠시 동안의 실랑이가 끝난 뒤 열차 안은 다시 위태로운 정적 속으로 빠져든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열차는 다음 정거장으로 흐르고, 사람이 내리고, 다시 그만큼의 사람이 올라타고 전쟁은 계속된다.
전차 요금 5전, 평균속도 시속 7km
부천에서 서울로 출퇴근하던 그 남자의 비명에서 다시 2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대한민국 사람들이 치러내야 하는 출근길 ‘전쟁’의 풍경은 달라지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 출퇴근이라는 개념이 처음 생겨나기 시작한 것은 근대적 대중 교통수단인 ‘전차’가 서민들의 삶의 일부로 자리잡기 시작한 1920년대 접어들면서부터였다.
전차가 처음 등장한 것은 저문 왕조가 마지막 불꽃을 태우던 광무 3년(1899) 음력 4월 초파일(5월17일)이었다. 전차는 등장한 지 채 20년이 못 돼 경성·부산·평양 등 주요 도시 서민들의 출퇴근을 책임지는 제1의 교통수단으로 자리잡는다. 당시 전차 요금은 5전이었고, 대중이 이용하는 교통수단이었던 만큼 크고 작은 교통사고도 끊이지 않았다. 1929년 4월22일에는 진명고녀 3·4학년생 120명을 태운 전차가 전복해 88명이 다치는 참사가 터져 식민지 반도 상류층이 들썩이게 된다. 그때 식민지 조선에서 지금의 ‘여고’에 해당하는 고녀는 경성·진명·숙명·이화 4곳밖에 없었기 때문에 당시의 여고생들이란 대부분 특수층의 딸들이었다. 전차를 운영하던 경성전기의 사장이 곳곳에 사죄를 하러 다닌 뒤에야 사태는 겨우 진정됐다.
그 시절 경성에도 버스가 있긴 했지만, 전차의 보조 교통수단 수준에 머무르고 만다. 일제 때 전차를 이용했던 사람들의 모습은 구보 박태원의 이나 박완서의 같은 글 곳곳에 생생하게 녹아 있다. 해방을 맞던 1945년 무렵 서울에서 운행되는 전차는 모두 257량이었고, 노선의 총 길이는 3만9906m였다.
해방된 조국 남반부의 새 주인은 미군정이었다. 평균 운행 속도가 시속 7km에 불과했던 낡은 전차는 미군 트럭을 개조한 성능 좋은 버스들을 당해내지 못했다. 서울의 도로를 점령한 것은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스리쿼터를 개조한 버스, 쇠판을 손으로 두들겨 만든 ‘시발(始發) 자동차’들이었다. 자동차를 이용할 수 있었던 소수의 여론 주도층에겐 ‘거북이’로 퇴락한 전차를 참아낼 인내심이 없었다. 서울에서 전차가 역사 속으로 자취를 감춘 것은 1968년 11월30일이었다.
토큰과 안내양의 추억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결심으로 시작된 경부고속도로 전 구간이 완전 개통된 것은 1970년 7월7일이었다. 그해 12월 말 전국 각 시도에 등록된 총 차량 대수는 12만5409대, 서울시에 등록된 차는 5만9천 대에 불과했다. 1970년대 서울에서 시민 수송의 80% 이상을 책임진 것은 버스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서울의 출퇴근길은 서울 강북 외곽과 강북 도심, 눈을 넓혀봤자 인천·부천·수원 등 수도권과 서울을 잇는 단순한 노선에 불과했다.
그 시절 버스를 상징했던 3개의 아이콘은 ‘토큰’과 ‘안내양’과 그 안내양이 쥐어짜내던 “오라이!”라는 힘겨운 외침이었다. 서울에서 토큰제가 처음 실시된 것은 1977년 10월16일부터다. 서울시가 달마다 내던 월간지 의 1998년 8월호를 보면, 버스 토큰은 77년 5월부터 89년 12월까지 모두 1억6595개가 생산된 것으로 확인된다. 처음 토큰제가 실시될 때 버스 요금은 일반 40원(황동색 토큰), 학생 30원(양백색 토큰)이었고, 현금 승차객에게는 10원의 할증료를 징수했다. 토큰제 시행 이후 이틀이 지난 77년 10월18일치 는 6면에서 “토큰제 실시로 업무가 바빠졌다”는 안내양의 푸념 섞인 한탄을 전하고 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만원 버스에 매달려 달리다 추락해 숨진 승객과 안내양의 사연은 너무 많아 일일이 옮길 수 없다.
대한민국 출근길의 모습을 뒤바꾼 것은 1974년 8월15일 첫 등장한 지하철이었다. 사람들은 막히고 지저분한 버스 대신 제 시간을 ‘칼같이’ 지켜주는 지하철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될 때 81.3%에 달하던 버스의 수송분담률은 1997년에 이르면 29.5%까지 떨어지고 만다. 그해 지하철의 수송분담률은 30.8%로 처음으로 버스를 앞질렀다.
그 시간 동안 서울과 수도권의 영역은 확장되고, 확장되고, 또 확장됐다. 아무리 도로를 넓히고, 지하철을 뚫어도 이미 인구를 빨아들이는 블랙홀로 변하고 만 서울의 교통 수요를 받아낼 순 없었다. 1990년대 이후 도하 신문의 사회면을 장식하는 단골 주제들은 ‘지옥철’로 변한 지하철과 ‘주차장’으로 변한 도로 위에서 울분을 터뜨리는 시민들의 목소리였다. 서울에는 사람들로 이미 꽉 차 다 들어갈 곳이 없는 차량에 사람을 꾸겨넣은 ‘푸시맨’이라는 새로운 직종이 생겼다. 소설가 박민규는 소설 에서 외환위기를 맞아 각박해진 출근길과 소시민들의 삶의 풍경을 주인공 ‘푸시맨’의 눈을 빌어 서늘하게 그리고 있다. 외환위기를 넘어서며 서울의 남쪽 경기도 성남 밑에까지 수많은 택지들이 아파트 숲으로 변했고, 이제는 평택과 천안에서 서울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세월은 가도 삶은 변치 않네
아마도 서울은 계속 확장될 것이고, 서울로 몰려드는 사람들의 수도 점점 늘어갈 것이다. 이 거대한 도시에는 이미 8개 노선의 지하철이 건설됐고, 2008년 말이 되면 그 수는 9개로 늘어난다. 일제시대 전차 회수권에서부터 2007년 스마트카드에 이르기까지 경제가 발전하고, 버스와 지하철이 쾌적해져도 사람들이 받아내야 하는 삶의 고단함은 좀처럼 바뀔 것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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