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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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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궁금하면 신도림역에 와보라

등록 2007-11-23 00:00 수정 2020-05-03 04:25

하루 평균 40만여 명이 거쳐가는 출근길의 핵, 숨 쉴틈 없는 직장인·공익근무요원·상인들의 하루

▣ 글 박수진 기자jin21@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t@hani.co.kr

“러시아워 때의 신도림역에 가보면, 누구나 삶이 무엇인지 뼈저리게 알 수 있다.” 회사에서 구조조정을 당한 뒤 야구에서 새로운 길을 찾은 주인공은 문득 러시아워 때의 신도림역을 떠올린다. 인천과 서울을 잇는 경인선과 지하철 2호선이 만나는 신도림역에서는 사람들이 밀고 밀리는 완력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신도림역의 삶의 조건들은 소설가 박민규가 을 쓴 2002년에도 그랬고, 그보다 5년 전인 1997년에도 그랬을 테고, 소설로부터 다시 5년이 지난 2007년에도 그렇다.

지난 10월23일 아침 7시40분. 신도림역은 2~3분 동안 ‘일시정지’ 상태에 들어갔다. 인천과 수원·천안, 의정부와 청량리 방면에서 몰려든 사람들이 2호선으로 갈아타기 위해 계단으로 밀려들어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된 탓이다. “밀지 마세요. 앞에서 안 가고 있잖아요.” 회사원 이지연(26)씨가 소리쳤다. 이어폰 속에서는 정신없이 음악이 흐르고, 그 때문에 이씨의 목소리는 더 도드라진다. “시흥에서 1호선 타고 오다가 2호선으로 갈아타요. 아침마다 5~10분은 기본으로 기다려요.”

“아저씨, 그리로 내려가면 안 돼요!”

사람들이 몰려드는 곳은 문래역 쪽으로 가는 열차 9번 객차 네 번째 출입구 앞 계단이다. 이곳은 1호선에서 2호선으로, 또 2호선에서 1호선으로 걸어서 2분, 뛰면 1분이면 갈아탈 수 있는 최단거리 통로다. 환승을 위해 올라가고 내려갈 수 있는 곳은 다섯 군데지만 사람들은 자칫하면 지각하는 출근시간에 ‘최단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이곳으로 몰려든다.

물론 그래봐야 소용없는 일이다. 계단에 갇힌, 아니 사람들에 갇힌 200여 명의 직장인들이 꽉 들어차 오도가도 못하는 계단 위에서 몇 분을 흘려보낸다. 이씨는 몇 분 후 승강장에 내려와서도 사람들과 다닥다닥 붙어서 있어야 했다. 그는 두 차례 열차를 떠나보낸 뒤에야 9-4라고 쓰인 출구 앞에서 열차 안으로 밀려들 수 있었다.

신도림역은 수원과 인천에서 몰려드는 수십만의 인파를 서울 도심과 강남으로 이어주는 출근길의 핵이다. 90년대 초 강남 너머 평촌·분당·산본 등의 신도시들이 개발되기 전까지 서울 집값을 감당하지 못하는 도시 서민들이 밀려난 곳은 인천과 수원 주변의 크고 작은 주택 단지들이었다. 출근 시간대인 오전 6~9시 신도림역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10만 명이 넘는다. 그중 갈아타는 사람이 8만5천여 명이다(2007년 5월 기준, 서울메트로 조사). 도심으로 진입하는 사람들은 영등포와 신촌을 거쳐 을지로로 빠지고, 강남으로 진입하는 사람들은 신림과 사당을 거쳐 잠실까지 나아간다.

“아저씨, 그리로 내려가시면 안 돼요!” 아침 8시25분. 공익근무요원 나아무개(28)씨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갈색 잠바를 입은 30대 초반의 남자가 에스컬레이터를 역주행해 후다닥 뛰어 내려간다. 나씨의 일은 직장인들이 몰려드는 아침 7시부터 2시간 동안 에스컬레이터를 멈출 수 있는 빨간색 비상정지 버튼을 사수하는 일이다. “1호선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사람이 2호선에서 올라오는 사람보다 많아요. 내려가는 사람들이 숫자로 미니까, 아래에서 못 올라오죠. 그러면 아래는 아래대로, 위는 위대로 꽉 차서 콩나물시루가 돼요.”

네 대의 에스컬레이터를 모두 올라오기 전용으로 해둔 이유다. 물론 방심은 금물. 나씨가 화장실이라도 갔다오면 사람들은 빨간 버튼을 눌러 에스컬레이터를 계단으로 만들어 뛰어 내려간다. 하종민(56) 부역장은 “사람들이 어디가 가장 빠른 환승 지점인지 알아서 그곳으로만 몰리고, 그래서 더 늦어진다”고 말했다.

지옥 같은 출근길 전쟁도 오전 10시께가 되면 한산해진다. 김찬규(53) 신도림역 부역장은 두 번째로 신도림역에서 근무하고 있다. 처음 신도림역에 발령을 받은 때가 12년 전인 1995년이다. “말도 못하죠. 그때가 더 붐볐어요.” 지금은 성북·청량리, 수원·인천 방면의 차들이 들어오는 승강장이 구분돼 있지만, 그때만 해도 한 승강장에서 사람들이 엉켰다. 1997년에 성북·청량리 방면 열차는 1번 승강장, 수원·인천 방면은 2번 승강장으로 분리하면서 용산행 급행까지 승강장이 네 개가 됐다. 그는 “이후로 사정이 좀 나아졌다”고 말했다.

구로구의 압구정동이 될 것인가

그나마 지상에 있는 1호선은 사정이 괜찮은 편이다. 2호선은 지하에 있다 보니 승강장을 늘릴 수 없다. 대신 생각해낸 방안이 열차 편성을 늘리는 것이다. 신도림역에서 간밤을 보낸 열차들이 나가는 곳인 ‘출고 전용 선로’에 출근 시간대인 7시30분부터 8시30분까지 1시간 동안 7대의 열차를 편성했다. 김찬규 부역장은 “신도림에서 출발하는 열차이기 때문에 앉아서 갈 수 있는 장점이 있어 손님들이 많이 이용한다”고 말했다. 신도림역 쪽에서는 그 때문에 열차의 혼잡도가 30%는 줄어든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시간이 흘렀고, 신도림역도 변했다. 신도림역을 둘러싼 연탄 공장, 타이어 공장, 자동차 공장은 이제는 모두 아파트 숲으로 변했다. 1990년대만 해도 흩날리던 새카만 탄가루의 주범인 신도림역 1번 출구 앞 대성연탄 공장은 지금은 수억원을 들인 화려한 모델 하우스로 바뀌었다. 모델 하우스는 2010년이 되면 51층짜리 주상복합 건물 두 동, 40층짜리 호텔과 컨벤션센터 등이 함께 뭉쳐진 복합주거공간이 된다. 경인가도를 따라가다 마주쳐야 했던 한국타이어 공장은 이미 푸르지오 오피스텔 동으로 바뀌었다. 단과 전문학원인 대일학원이 있던 그 옆자리도, 이제는 664가구가 입주할 수 있는 주상복합 아파트가 건설 중이다. 2번 출구 쪽은 마트들이 빼곡해 질 예정이다. 신도림역 2번 출구로 나서면, 바로 오른쪽에 있던 기아자동차 차고지는 내년 봄 막바지 보강공사를 끝내고 40층 높이의 테크노마트로 변신할 예정이다. 그 앞에서는 11월 이마트가 개점을 준비 중이다. 주변에서 부동산을 하는 김용남(37)씨는 “이곳이 구로구의 압구정동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여전한 것은 역 안팎을 오가는 사람들의 신산한 삶이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오면 역은 다시 한 번 전쟁통이 된다. 저녁 7시부터 8시30분까지 사람들은 아침에 겪었던 그 모진 일을 방향을 바꿔 다시 한 번 되풀이한다.

그 틈새를 노리는 것은 상인들이다. 오후 6시가 지나면 역 안에는 낮에는 뜸하던 잡상인들이 공익요원, 역무원들과 술래잡기를 한다. 다루는 물건은 주로 콩·떡·빗자루·움직이는 동물인형 등이다. 푸른콩, 갈색콩 등 밥에 넣어 먹는 콩을 파는 이씨 할머니는 올해 일흔다섯이라고 했다. 그는 매일 청량리, 대림, 종로, 신도림 등을 돌아다닌다. “신도림역이 단속이 제일 심해. 그래도 6시 넘으면 좀 덜해서 이리로 와서 팔지.” 그래도 퇴근 시간 직장인들은 출근 때보다 여유로운 편이다. “멋쟁이들만 콩을 사는 거야. 웰빙이야, 웰빙. 밥에 넣어 먹으면 얼굴 때깔도 고와진단 말이야.” 할머니의 입담에 지나던 사람들이 잠시 발걸음을 멈춘다. 콩은 한 봉지에 1천원이다.

역무실에서 폐쇄회로화면(CCTV)을 보던 공익요원 송아무개(26)씨는 “아, 저 할머니!”라고 외치며 뛰쳐나갔다. 콩고물을 묻힌 인절미를 파는 할머니가 2호선 지하 승강장으로 내려가서 떡을 팔고 있었다. “할머니, 여기까지 내려와서 팔면 어떡해요? 다치신단 말이에요.” 송씨가 다그치자 할머니는 “3천원어치만 더 팔면 된다”며 주섬주섬 떡 대야를 챙겨 머리에 이었다.

“출근 시간에 제일 안 팔려”

역 2번 출구 바로 앞에서 새벽 4시부터 오후까지 떡·옥수수·고구마 등을 파는 유경숙(73) 할머니는 “출근 시간에 제일 안 팔린다”고 말했다. “정말 안 사. 사람들이 뒤도 옆도 안 보고 휙휙 가버려.” 대신 잘되는 시간은 오후 2~5시. 주요 고객은 근처 노인회관에 가려고 오는 노인들이다. 신도림역 1호선 승강장에서 신문·과자·음료수 등을 파는 가게 ‘스토리웨이’를 운영하는 김아무개(46)씨는 “전에 영등포역에 있었는데, 여기서 장사해보고 정말 놀랐다”고 말했다. “매상이 세 배는 올랐지 뭐야.” 요즘 신도림역 인기 상품은 테이크아웃 커피다. 김씨는 옆집 테이크아웃 커피 전문점을 가리키며 “저기가 지난 5월쯤에 들어왔는데 장사가 잘되더라고. 젊은 사람들이 많이 사먹어. 질투나”라며 살짝 눈을 흘긴다.

역을 청소하는 김씨 아저씨는 자신을 ‘부평초’라 불렀다. 그는 올해 예순넷이다. 그는 오후 1시부터 10시까지 역을 치운다. 그는 지하철 1호선 2번 승강장 담당이다. 8시간 동안 대략 30번 정도 역사를 오르내리며 쓰레기통을 비우고, 흘린 커피를 닦고, 담뱃재를 치우고, 바닥을 쓴다. 그는 “하나도 안 힘들다”고 말했다. “지금은 83만원 받거든. 한 100만원만 받으면 정말 하나도 안 힘들 것 같아.” 부리나케 쓰레기통을 들고 계단을 오른다.

출퇴근 시간 신도림역에는 10만 명의 사람들이 몰린다. 그러나 사람들은 서로 소통하지 못하며, 환승 시간에 맞춰 칼같이 뛰어다닐 뿐이다. 곽병호 신도림역장은 “가끔 러시아워 때 한가운데 서 있으면 내 머리가 다 어지럽다”고 말했다. 곽 역장은 “출근 때 5분만 먼저 나와서 환승 때 5분만 더 걷자”고 말했다. “그러면 어떨까요. 옆으로 난 길도 잘 보이고, 기다리는 시간도 줄어들고, 무엇보다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이 보이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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