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darkblue">출판·드라마에서 ‘비운의 임금’ 신드롬… 시대 상황에서 비슷한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일까</font>
<font color="#00847C">바야흐로 정조의 시대다. 200여 년 전 갑작스레 죽음을 맞은 조선의 왕은 서점에서, TV 화면에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사람들은 그의 시련에 얼굴을 찡그리고, 그의 적들에 분노하며, 그에게 닥쳤던 갑작스런 죽음에 가슴 아파한다. 사람들은 왜 정조에 환호하는가. 정조의 흔적이 남아 있는 서울 창덕궁 후원의 모습을 둘러보고, 그의 일생을 다룬 드라마의 촬영 현장을 찾아가봤다. 편집자</font>
▣ 글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창덕궁 낙선재를 오른쪽으로 스치고 지나 북쪽으로 길을 잡는다. 콘크리트로 포장된 얕은 언덕을 따라 오르니, 저만치 너른 연못과 그 주변을 감싸는 고졸한 전각들이 눈 안 깊숙이 밀려든다. 연못의 이름은 ‘부용정’(芙蓉亭)이고, 그 북쪽에 자리한 잘생긴 2층짜리 전각의 이름은 ‘주합루’(宙合樓)다. 엄밀히 말해 주합루는 그 전각 2층을 불렀던 말이고, 건물이 제 기능을 발휘하고 있을 때 1층의 이름은 ‘규장각’(奎章閣)이었다.
아동도서까지 “정조 암살을 막아라”
규장각이 ‘규장각’이었던 것은 그것이 정조의 규장각이었기 때문이다. 1999년 를 써낸 홍순민 명지대 교수는 “정조는 왕의 글이나 왕실의 족보, 물품을 보관하던 작은 서고였던 규장각을 국내외 도서를 다수 소장한 왕립 도서관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젊은 인재들이 그곳에서 글을 읽고 정리하며 앞으로 왕과 함께 만들어나갈 미래를 준비했다. 그 인재들이 자라남에 따라 규장각은 도서관에서 연구소로, 연구소에서 왕의 비서실과 정책개발실과 감사실과 출판소로 기능이 점차 확장됐다. 규장각은 정조의 규장각이었고, 그랬기 때문애 정조의 죽음과 함께 사실상 사멸했고, 세인들의 기억에서 잊혀졌다.
왕의 화려한 귀환일까? 2007년 가을, 대한민국 대중이 가장 사랑하게 된 문화 아이콘은 207년 전 숨진 조선 22대 국왕 ‘정조’(1752~1800)다. 시중에 나온 정조 관련 문화 콘텐츠는 너무 많아 일일이 이름을 꼽기가 어려울 정도다. 문화방송에서는 9월17일부터 정조를 주인공으로 삼은 드라마 을 방영 중이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정조의 말년을 그린 한국방송의 8부작 미니시리즈 은 지난 7월 호평을 받으며 방송을 끝냈다. 케이블방송 CGV에서는 ‘정조 암살 미스터리’ 을 11월17일부터 방송할 예정이다. 책으로는 서울 주요 서점들의 베스트셀러 상위 목록에 이름을 올린 작가 이상각의 와 소설가 김탁환의 정조 시대 3부작 완결판 이 눈에 띈다. 아동도서 시장에서 큰 인기를 얻은 ‘노빈손 시리즈’는 한국사 쪽으로 눈을 돌렸는데, 그 첫 번째 주인공은 다름 아닌 정조다. 책 이름 는 정조에 대한 대중의 심리를 소박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최근 불어닥친 ‘정조 신드롬’의 화룡점정이라 부를 만하다.
비운의 군주 정조를 가장 먼저 호출해낸 것은 소설가 이인화였다. 그는 1993년 쓴 에서 노론과의 세력 다툼에 밀려 죽음을 맞게 되는 ‘정조 상(像)’을 창조해냈다. 그의 소설은 베스트셀러가 됐고 영화로도 만들어졌지만, 대중은 정조에 대해 지금과 같은 열광적인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지난 15년 동안 한국 사회에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그 시간 동안 한국 사회가 겪은 변화를 평가하는 가장 적합한 단어는 아마도 ‘아쉬움’일 것이다. 1993년 이후 한국 사회는 외환위기를 겪었고, 정권 교체를 이뤘으며, 정권 교체를 이룬 그 진보·개혁 세력이 10년 동안이나 한국 사회를 이끌어왔다. 그렇지만 빈부격차는 여전하고, 비정규직은 차별받고 있으며, 젊은이들은 ‘20 대 80의 사회’에서 ‘88만원 세대’로 살 것을 강요받고 있다.
정조, 노무현이 꾸는 꿈?
정조와 그 아버지 사도세자에 관해 여러 글을 남긴 역사학자 이덕일은 “정조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도 그와 유사한 아쉬움이 있다”고 말했다. “정조는 비운의 임금이다. 사람들의 심리 속에 정조가 10년만 더 살았다면 우리 역사가 바뀌지 않았을까 하는 회한이 있다.” 정조가 좀더 왕위에 머물렀다면 그가 키워낸 정약용, 이승훈, 이가환 등 깬 사고를 가진 남인들이 정승이나 판서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고, 그들이 정조의 개혁을 끝까지 밀고 나갈 수 있었을 것이란 얘기다. 역사에 대한 지나친 단순화이긴 해도,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다면’보다는 좀더 피부에 와닿는 얘기다.
그래서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자들은 노무현의 개혁을 정조의 개혁과 연관짓기도 하고, 정조에 지나친 감정이입을 하기도 한다. 에서 정조를 연기한 탤런트 안내상씨는 “으로 노무현 대통령을 많이 좋아하게 됐으며, 내 연기를 통해 사람들이 그 아픈 부분을 이해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정조가 꿈꾼 것은 어떤 세상이었을까. 부용정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연못과 그 주변에는 정조가 가슴 깊이 묻어뒀던 통치철학이 담겨 있다. 정조는 1776년 3월10일 경희궁 숭정문에서 즉위했다. 즉위한 지 석 달 만에 정조가 내린 명은 “창덕궁 후원에 규장각과 부속 건물들을 지으라”는 것이었다. 왕위에 오른 지 석 달 만에 내린 명인 만큼 세손 시절부터 준비하고 고심해왔던 일임이 틀림없다.
부용정은 반듯한 장대석으로 네모지게 조성했고, 가운데는 동그란 섬을 만들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전통적인 우주관을 표현한 것이다. 부용정을 돌아 주합루로 올라가는 계단을 가로막는 문의 이름은 ‘어수문’(魚水門)이다. 여기서 물은 왕, 물고기는 신하를 뜻한다. 물고기가 물 밖에서 살 수 없듯, 신하는 왕의 뜻 안에서 살라는 정조의 철학이 담겨 있다. 그는 왕이 중심이 돼 위민정치를 펼치는 조선의 계몽군주가 되려 했다. 어수문에서 바라본 주합루는 왕의 권위를 상징하듯 높고 가팔라 함부로 올려다볼 수도 없다. 신하들은 왕이 지나는 어수문을 사용할 수 없어 그 양옆으로 난 쪽문을 통해 허리를 굽실거리며 드나들어야 했다.
정조의 이상은 당시 세계를 지배하던 노론의 세계와 양립할 수 없었다. 정조의 치세는 암살 기도로 시작된다. 보위에 오른 지 1년이 조금 지난 1777년 7월28일, 정조는 평소처럼 침소가 마련된 경희궁 존현각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마침 내시는 호위 군사들을 점검하러 나가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궁에 자객이 침입했다. 은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갑자기 들리는 발자국 소리가 보장문(寶章門) 동북쪽에서 회랑 위를 따라 은은하게 울려왔고, 어좌(御座)의 중류쯤에 와서는 기와 조각을 던지고 모래를 던지어 쟁그랑거리는 소리를 어떻게 형용할 수 없었다”고 적었다. 그를 암살하려고 한 사람들은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홍계희 집안이었다. 자객들이 정조를 습격했던 경희궁 존현각은 이미 헐리고 사라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건물 앞에는 정조가 상서롭다고 칭찬한 대추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지나치게 독선적이지는 않았을까
후원 쪽으로 조금 더 나아간다. 부용정을 지나 5분쯤 걸으면 한반도를 거꾸로 뒤집어놓은 듯한 반도정이 모습을 드러낸다. 반도정의 제일 북쪽 끝에는 ‘존덕정’(尊德停)이라 이름 붙은 잘생긴 정자가 있다. 그 안에 스스로를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 부른 정조의 글이 남아 있다. 만천명월주인옹은 ‘수많은 강을 비추는 달과 같은 임금’이란 뜻이다. 뭇 개울들이 달빛을 받아 빛나고 있지만 달은 오직 하나이고, 그 달은 바로 정조 자신이고 신하와 백성들은 개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르겠지만, 정조의 태도는 당시 기준으로도 지나치게 독선적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세상을 지배했던 노론의 눈에 그런 정조의 모습이 부담스럽게 느껴졌을 수도 있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일까. 기자 이한우는 2007년 10월 펴낸 에서 “정조는 나름의 비전과 강력한 의지를 일찍부터 갖고 있었지먼 준비가 치밀하지 못했고, 자신을 뒷받침할 현실세력 또한 강력하지 못했다”고 썼다. 이한우의 정조 비판은 그대로 의 노무현 대통령 비판의 패러디인 것처럼 읽히기도 한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18세기에 주목한다. 정조의 18세기는 조선뿐만 아니라 전 세계사적인 격동기였다. 정조가 즉위하던 해인 1776년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했고, 영국에서는 애덤 스미스가 을 썼다. 그 무렵 조선을 떠받치던 ‘주자학’이라는 유일 신앙 체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당대 엘리트들인 남인과 북학파들은 청에서 들어오는 새로운 문물에 매료됐고, 그 새로운 사상의 힘을 빌려 세상을 개조하려 했다. 정조의 신하들은 총명하고 반듯했던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었다. 한 소장은 “한 시대가 지나고 다른 세대로 진입하는 18세기 문화 격동기와 지금의 모습이 많이 닮았다”고 말했다.
정조의 개혁은 어떻게 됐는가. 그의 사후에 그가 벌였던 개혁 조처들은 할머니 정순왕후에 의해 철저히 무력화됐다. 규장각은 이름만 남았고, 화성은 방치됐으며, 장용영은 해체됐고, 천주교와 서학에 대한 엄청난 핍박이 몰아쳤다. 소설가 김훈은 둘째 권에서 “(남은 사람들은) 이단과 대역을 다스리는 형상에 으깨져 죽었거나 망나니의 칼에 베어졌고, 그 사체는 거리에 버려졌다”고 썼다. 정약용 같은 일부 신하들은 살아남아 먼 귀양길을 전전하며 많은 저술을 남겼다.
이름만 남은 규장각, 해체된 장용영
정조가 태어난 곳은 창경궁의 경춘전, 숨진 곳은 창경궁의 영춘헌이다. 두 전각 모두 순조 때 불타 지금은 본모습이 아닌 재건된 모습으로 남아 있다. 정조가 죽던 날 햇빛이 어른거리고 삼각산이 울었으며 양주와 장단 등의 고을에서 한창 잘 자라던 벼가 하얗게 말라 죽었다고 한다. 정조가 독살당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가 10년 더 살았다면 우리나라의 모습이 어떻게 달라졌을지도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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