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 현실정치세력 ‘386’ 핵심참모들의 ‘가치연대’… 해법은 제각각이지만 큰 틀에선 공통점 많아
▣ 글 류이근 기자ryuyigeun@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t@hani.co.kr
“일본처럼 될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잠시 예외가 있었을 뿐, 수십 년 동안 ‘자민당 체제’로 굳어진 일본 정치가 한국에서도 되풀이될지 모른다는 위기감의 표현이다. 이렇게 하다간 대선 패배는 물론, 이후 총선, 또 그 이후 한국 정치에서 ‘한국판 자민당’인 한나라당의 1당 독주가 장기화할 수 있다는 ‘진보개혁 세력’의 우려다. 우려가 얼마나 현실성이 있는지 따져봐야 하겠지만, 대선을 앞둔 여의도에서 심심치 않게 들리는 말이다.
최소한의 ‘진지’를 마련해야 한다
정동영, 문국현, 권영길, 금민. 네 사람은 각각 대통합민주신당, (가칭)창조한국당, 민주노동당, 한국사회당의 대통령 선거 후보다. 한국사회당은 의석 하나 없는 그야말로 소수 정당이고, ‘범여권’의 후보단일화를 외치는 민주당의 이인제 후보가 빠져 있긴 하다. 하지만 크게 진보개혁 세력 내 좌우 진영을 대표한다는 현실정치 세력들이다. 오해가 있을 수도 있지만 단순화하면 ‘반이명박’ 세력들이다.
네 진영이 만났다. 진보개혁 세력 간 연대를 모색하기 위해서다. 후보들이 직접 나선 건 아니다. 각 진영의 ‘386’ 핵심 참모들이 나섰다. 캠프나 당의 공식적인 대리인으로 나선 건 아니다. 아직은 개별적 차원에 머물러 있다. 이들을 움직인 동력은 자칫 진보세력이 괴멸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다. 최소한의 ‘진지’라도 마련해야 한다는 다급함이 정치적 경쟁자였던 이들을 한자리로 모았다.
지난 10월17일 저녁 6시, 대통합민주신당의 대선 후보를 선출한 지 이틀 뒤. 정동영 후보의 정책을 자문하는 임채원 서울대 행정대학원 한국행정연구소 연구원은 여의도의 한 사무실을 찾았다. 문국현 후보의 고원 공보팀장과 오건호 민주노동당 정책전문위원, 안효상 한국사회당 부대표가 기다리고 있었다. 한 주 전에 상견례를 한 때문인지 어색함은 없었다. 서울대 83~86학번인 이들은 한 다리 건너 다들 아는 사이다. 두 번째 모임이어서 그런지 타이틀도 준비했다. ‘진보개혁 세력의 위기와 과제, 경쟁과 연대를 통한 혁신.’ 성공을 기약할 수 없지만 이들은 새로운 정치적 실험을 하는 중이었다. 이들은 지지율 덧셈이란 산수에서 출발하는 인물 대 인물의 통합이란 정치공학적 ‘후보단일화’ 사고 틀에서 벗어나, 가치나 정책적 연대를 모색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으로선 이 주제가 곤혹스럽다.”
안 그래도 이 자리가 자칫 ‘범여권’을 중심으로 한 후보단일화 논의로 흐를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막판까지 참석 여부를 망설였던 오건호 전문위원이 먼저 말을 꺼냈다. 진보개혁 세력이란 말이 한 묶음으로 진보정당을 자처하는 자신의 정당과 대통합민주신당 등을 통칭하는 것에 대한 민주노동당의 불편한 심정을 대변했다. 하지만 대안세력으로서 민주노동당이 아직 사회적 신뢰를 받지 못한다는 점을 부정하진 않았다. 자연스럽게 참석자들 사이에서 특정 세력만의 위기가 아닌 진보개혁 세력 전체의 위기라는 점이 공유됐다.
단일화 전 정책과 내용을 찾자
임채원 연구원은 진보개혁 세력이 집권한 1997년 이후 외환위기의 발생으로 사회경제 질서의 대변동이 닥쳤는데도 대안 담론이 부재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고원 공보팀장은 진보적 가치가 대중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는 현실을 지적하며, 양극화의 심화에 맞서 현실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게 위기의 원인이라고 봤다. 안효상 부대표도 현실에 적합한 진보 모델을 제시 못했다면서 동의했다.
이들이 진단한 진보개혁 세력의 위기는 수치로도 확인된다. 국민 10명 중 7명이 “무능한 민주화 세력의 심판을 위해 정권이 교체돼야 한다”는 주장에 공감을 표시하고 있다(그래프 참조). 이는 민주화 세력 집권 10년에 대한 국민들의 평가에 터잡고 있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가 2006년 11월 실시한 조사를 보면, 민주화 세력이 집권한 지난 10년 동안 ‘나빠진 점이 더 많다’(49.3%)는 의견이 ‘좋아진 점이 더 많다’(39.7%)는 의견보다 높았다.
이날 모임의 참가자 네 명이 내놓는 진보적 실천과 방식은 조금씩 다르긴 했다. 아래로부터 체험할 수 있는 진보적 가치 실현(오건호), 국가와 공공영역 인프라를 통한 복지(임채원·고원), 세계화란 구조적 한계를 이겨낼 새로운 경제모델(안효상) 등이 제시됐다. 양극화로 집약되는 사회경제적 모순을 시장에 맡겨 풀려고 하거나, 이런 모순을 별로 주목하지 않는 이명박 후보나 한나라당과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금세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네 명은 큰 틀에선 이견보다 공통점이 더 많다. 가치 및 정책 연대를 시도할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후보단일화는 철저하게 권력 획득론이다. 이명박에게 대항해 이기려면 어떻게 편을 짜야 하는지의 문제다. 가치연대란 대선 국면에서 특정한 의제와 정책 중심으로 가치를 공유하는 세력들이 같이 움직이는 것이다. 물론 이를 통해 외연 확대를 꾀한다.”(오건호)
가치연대가 세력 간 연대와 연합을 부정하는 건 아니다. 먼저 연대와 연합의 ‘내용’을 찾자는 거다. 네 명의 참가자 모두 내용 없는 후보단일화를 반대했다. “반한나라 전선 연합은 아무런 감동이 없다. 철 지난 레코드다.”(안효상) “반한나라 후보단일화가 상품성이 있을지 모르지만, 자멸의 틀이 될 수 있다.”(오건호) “2002년 버전 갖고는 설득력이 없다. 어떤 내용을 갖고 단일화하겠다는 것인지 제시해야 한다.”(임채원)
가치연대는 의원내각제를 실시하는 유럽의 여러 나라에선 일반화된 모델이다. 정책과 가치를 매개로 여러 세력이 합종연횡으로 정부를 구성하기도 하고, 때론 깨기도 한다. 민주노동당은 일찌감치 정책 연대의 가능성을 열어놨다. 권영길 후보는 지난 9월 과의 인터뷰에서 비정규직 법안 등 몇 가지 가치연대의 조건을 제시한 바 있다. 정동영 후보는 10월18일 문화방송 에서 후보단일화의 조건 3가지 중 하나로 ‘노선’을 꼽았다. 이론상, 또 노력하기에 따라선 정동영-문국현-권영길의 연대도 가능할 수 있다.
다시 만날까, 성과를 낼 수 있을까
정책이든 가치든 연대를 하려면 상대의 것을 검증하는 작업이 전제돼야 한다. 권영길 후보가 가치연대를 얘기하면서 문국현 후보를 만나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민주노동당은 “비정규직의 눈물을 닦아주겠다”고 한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이 된 지금 비정규직을 대변하지 못한다고 판단하면서, 정책과 가치의 구호가 실천하려는 의지 없이 과잉된 것은 아닌지 경계하고 있다. 연대할 상대방에 대한 신뢰가 깊지 않은 점은 만남 자체를 어렵게 하는 큰 걸림돌이다. 그에 비하면 권력 배분의 문제는 멀리 있는 문제다.
첫술에 배부를 순 없다. 네 명의 참석자는 상대적으로 공통점을 찾기 쉬운 ‘일자리 연대’와 같은 의제에 주목했다. 하지만 다음을 기약하는 건 좀 막연했다. 임채원 연구원이 정책포럼이나 연석회의란 방식을 제안했다. 그는 “당장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후보단일화를 배제한 채 자신의 콘텐츠를 까놓고 정책 및 가치를 상호 검증하고 연대 가능성을 모색하자”고 말했다. 안효상 부대표가 “그럼 포럼은 언제, 어떻게 할 거냐”고 묻자, 오건호 전문위원이 “나중에 언제 식사나 한번 같이 하는 걸로 잡아놓자”는 선에서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들이 다시 만날까, 성과는 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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