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darkblue"> 1969년 서울에 중학교 무시험 추첨 시작, 평준화도 평준화 해체도 ‘과외 잡기 위해’ </font>
▣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우리나라 교육제도의 변천사는 너무 복잡해 그 흐름을 따라잡기가 힘들지만, ‘평준화’라는 철학적 태도에 대한 도전과 응전의 역사라는 말로 줄일 수 있다. 해방 뒤 원시적 자율 방임 상태에 놓여 있던 교육에 국가가 개입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 것은 1967년 11월7일이었다. 그때까지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 입학할 때마다 홍역 같은 입시 지옥을 돌파해야 했다.
강북 인구 분산, 해결책은 학교 이전
그날 오후, 서울 시내 130개 공·사립 국민학교 교장들은 대한교련(지금의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에 모여 2시간 반 동안 마라톤 토론회를 벌인 끝에 “앞으로 (중학 입시를) 무시험 추전제로 실시하도록 문교부에 건의하기”로 결정했다. 서울에서 중학교 무시험 추첨이 실시된 것은 그로부터 2년이 지난 1969년 2월5일의 일이다.
평준화가 고등학교에까지 확대된 것은 중학교 무시험제가 실시된 지 5년이 지난 1974년이었다. 그해 2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들 지만씨가 서울 배명중학교를 졸업한다는 사실을 입에 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고교 평준화가 이뤄지기 전까지는 각 고등학교마다 입시가 치러졌고, 그 결과 ‘일류’와 ‘명문’이라는 것들이 생겨났다. 서울의 남자 명문고는 경기·서울·경복·용산·경동 등 5대 공립과 중앙·양정·배재·휘문·보성 등 5대 사립을 합친 10곳이었고, 여자 명문은 경기·창덕 등의 공립과 이화·숙명·진명·정신 등의 사립 여고였다. 1974년 1월26일치 를 보면, 1면 톱으로 “서울·부산 인문고 학군 확정’이라는 기사를 전하고 있다. 문교부는 서울을 경기·서울·경복 등 일류 학교들이 몰려 있는 도심(광화문 비각 반경 4km)의 공동학군과 그 외 지역의 일반 5개 학군으로 나눴다. 공동학군에는 서울 시내 중학생이라면 누구나 원서를 넣을 수 있고, 입학자는 추첨을 통해 ‘뺑뺑이’로 배정됐다. 어려운 시험을 쳐 입학한 선배들은 뺑뺑이로 입학한 ‘58년 개띠’들을 후배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해 3월 지만씨는 사립 최고 명문고로 꼽히던 중앙고에 입학한다.
그러는 사이 서울은 확장되고 있었다. 1970년대 중반이면, 아직 전쟁의 기억이 생생하던 시절이다. 그 시절 서울은 곧 강북이었고, 강남은 영동지구 구획정리사업이 이어지던 허허벌판이었다. 박 대통령은 늘어만 가는 서울 인구를 부담스러워했다. 그를 근심하게 만들었던 것은 전쟁이 터지면 이 많은 인구를 데리고 어떻게 강을 건널까 하는 문제였다. 그 때문인지 고교 평준화가 이뤄진 이듬해 대통령의 서울시 연두순시 지시사항 1호는 ‘강북 인구의 강남 분산’이 된다.
강북 인구를 강남으로 옮기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서울 도심의 명문고들을 강남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서울시는 1972년 10월 종로구 화동(지금의 정독도서관 터)에 있던 경기고를 강남구 삼성동 91번지 3만2253평으로 옮기기로 결심한다. 경기고 동문들의 강력한 반대가 이어졌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의 총애를 받던 ‘혁명 주체’의 핵심인 구자춘 전 서울시장에게는 무서울 게 없었다. 그는 여론의 반대를 무릅쓰고, 1976년 이를 실행에 옮겼다. 2004년 2월 나온 서울대 지리교육학과 최은영씨의 박사학위 논문 ‘서울의 거주지 분리 심화와 교육환경의 차별화’를 보면, 70년대 이후 도심에서 이전한 학교 20곳 가운데 15곳이 강남·서초·송파·강동 등 이른바 강남권으로 이전한 것으로 나타난다.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는 셋째 권에서 “고교 평준화는 돈이 없어 과외 공부를 시킬 수 없는 많은 학부모들의 환영을 받았다”고 적었다.
‘영단적 교육혁신’에서 ‘해체만이 살길’로
학교는 평준화됐지만, 부모들의 경제력 차이까지 평준화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강남은 어느새 우리나라 상류층들의 배타적 주거공간으로 변해갔다. 상전벽해한 강남에서 경제력을 갖춘 부모의 지원을 받는 아이들이 경기·서울·휘문 등 전통의 명문과 상문·현대·청담·단대부속·반포·서초 등 신설학교 쪽으로 대거 입학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8학군으로 불리던 이 학교들이 서울 주요 대학의 신입생을 싹쓸이하다시피 했다. 고교 입시는 없어졌지만, 평준화의 틀은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한다.
‘대망’의 1980년대는 광주의 피 위에서 시작됐다. 광주를 학살한 전두환 정권은 하루빨리 민심을 휘어잡아야 했고, 그를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뭔지 알고 있었다. 1980년 7월29일 오전 9시, 서울 삼청동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회의실에서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중장)은 나중에 ‘7·30 교육개혁안’이라는 이름이 붙은 ‘교육 정상화 및 과열 과외 해소 방안’을 보고받는다. 대책안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과외 금지, 본고사 폐지, 내신 도입이었다.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은 과열 과외를 “전 국가적인 문제이자 사회의 암적 존재”라고 지적했다. 신문들은 “교육 정상화의 길”(동아일보), “한국 교육의 혁명적 전기”(서울신문), “전 국민적 호응을!”(조선일보), “획기적인 교육개혁”(중앙일보), “영단적인 교육혁신”(한국일보) 등의 기사를 뽑아내며 새 정책에 열광했다.
‘내신 중시’와 ‘고교 평준화’는 동전의 양면이다. 강남 학교들을 견제하고 실질적인 평준화를 이루기 위해 도입된 것이 ‘고등학교 내신성적제’다. 강남권 명문고 수석 졸업자와 지방의 평범한 고교 수석 졸업자가 비슷한 실력을 갖고 있다고 믿는 게 내신과 고교 평준화의 정신이다. 대입에서 내신의 비율을 높이는 것은 평준화에 가까이 다가가는 길이고, 낮추는 것은 사실상의 서열화를 인정하는 것이다. 내신성적제를 처음 도입했을 때 서울 주요 대학의 대입 반영비율은 10~20%밖에 되지 않았지만, 1994년부터 40%로 높아졌다.
내신 비율이 높아지자 불만을 갖게 된 것은 서울의 주요 대학들이었다. 그들은 내신의 실질 반영률을 2~3%로 낮추거나 고교등급제를 도입해 평준화 정책을 무력화시킨다. 2004년 고려대를 필두로 한 서울 주요 대학들이 남몰래 고교등급제를 실시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충격을 줬다. 이후 참여정부의 ‘3불 정책’(본고사, 고교등급제, 기여입학제 금지)은 하나의 정책 모델로 굳어져갔고, 보수 언론들은 “평준화 해체만이 살길”이라는 기사를 쏟아내기에 이른다.
서울시장 시절 ‘자립형 사립고’ 제안
2003년 11월3일 이명박 서울시장은 서울시 출입기자들과 저녁을 먹으면서 “교육자가 손을 뗐으면 (이미 한국은) 세계 최고의 입시제도를 가졌을 것”이라고 말했고, “윤덕홍 교육부총리는 시골 출신으로 진정한 서울의 교육을 모른다”고 말했다. 그는 서울시장으로 재직하던 시절부터 서울시 뉴타운에 자립형 사립고를 만들겠다고 제안해, 교육 평준화에 반대한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 대한민국에서 평준화가 교육 정책의 근간으로 자리잡은 것은 올해로 39년째다.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 후보는 40년 동안 이어진 한 나라의 교육 제도를 근본적으로 뒤바꾸는 공약을 내건 셈인데, 그 이유로 “사교육비를 잡기 위한 것”을 꼽았다. 사교육을 잡기 위해 시작된 평준화는 사교육을 잡지 못했고, 평준화가 잡지 못한 사교육을 잡기 위해 평준화를 깨겠다는 공약을 보는 일은 진정한 역사의 아이러니다.
*손정목, 3권(2003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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