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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한 정치적 리더십이 필요하다”

등록 2007-10-19 00:00 수정 2020-05-03 04:25

국제앰네스티 마틴 맥퍼슨 국장과 김형태 변호사 대담… “사형 폐지되면 동북아 인권운동에서 한국이 진일보”

▣ 정리 박수진 기자jin21@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고문 및 사형제도 폐지, 양심수 석방 등 인권운동에 앞장서온 인권운동 단체 국제앰네스티의 마틴 맥퍼슨 국제법률기구 국장이 지난 10월10일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사흘간의 짧은 일정 동안 송민순 외교통상부 장관, 정성진 법무부 장관, 문재인 청와대 비서실장 등을 만나 한국 정부의 ‘사형제도 폐지 찬성’ 한 표를 얻기 위해 발로 뛰었다. 현재 유엔총회에 최우선 안건으로 상정돼 있는 ‘사형제도 폐지를 위한 글로벌 모라토리엄(유예) 결의안’ 찬반 투표일이 11월9일로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은 10월11일, 맥퍼슨 국장과 2004년부터 천주교 사형제도폐지 운영위원장을 맡아 국내 사형 폐지 운동을 이끌고 있는 김형태 변호사와의 대담을 마련했다. 김 변호사는 최근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인혁당 사건’ 피해자 가족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국가가 유족들에게 637억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얻어내기도 했다.

사형제가 각 국가에서 제도적으로 폐지되려면 ‘정치적 리더십’이 중요하다고 강조한 맥퍼슨 국장은 이명박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가 사형제에 대해 찬성하는 견해를 가졌음을 전하자 “대한민국이 인권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한 중요한 단계인 ‘사형 폐지’에 대해서 한국의 유력한 차기 대통령 후보가 반대 의견을 가지고 있다니 굉장히 안타깝다”라고 말했다.

유엔 ‘사형제 폐지 모라토리엄’ 상정

김형태(이하 김): 지난 9월18일 유엔총회에서 ‘사형제도 폐지를 위한 글로벌 모라토리엄 결의안’(이하 결의안)이 최우선 안건으로 상정됐다. 이 결의안이 통과되면 국제적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기구가 사형제 폐지를 원칙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사형을 계속 집행하는 나라들에는 꽤 큰 정치적 압박이 될 것으로 보인다. 결의안의 구체적인 내용과 일정이 궁금하다.

마틴 맥퍼슨(이하 맥퍼슨): 그렇다. 유럽연합을 비롯해 브라질, 멕시코, 칠레, 남아프리카공화국, 세네갈, 가봉 등 약 100여 개국이 결의안에 찬성 의견을 밝힐 것으로 보인다. 투표에서 찬성 의견을 밝힌 국가들은 사형제 폐지에 관한 도덕적인 의무가 생기는 셈이므로, 함부로 사형 집행을 하기 힘들어질 것이다. 결의안 내용 자체는 짧고 간결하다. 첫째, 전세계적으로 사형이 유예(모라토리엄)의 단계에서 폐지의 단계로 이어지길 촉구한다. 둘째, 전세계적으로 규정돼 있는 사형 집행의 기준(사법적 절차, 미성년자 사형 금지 등)을 명확하게 따라야 한다. 셋째,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사형제 폐지 모라토리엄’ 실행 결과와 진전 상황을 유엔총회에 매년 지속적으로 보고해야 한다. 결의안에 반대하는 국가들은 대체로 세 번째 조항 때문이다. 예를 들면 중국처럼 국가의 세세한 사항들이 국제 사회에 공개되길 꺼리는 나라는 자국의 사형 집행 현황을 유엔에 보고해야 한다는 상황이 부담스러울 것이다. 이 결의안은 지금은 내부적으로 비공식 회의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다. 공식적으로 초안이 발표되는 건 10월22일로 이날부터 각 국가들이 서로 토의를 하고 11월9일에 이것을 유엔 견해로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는 투표를 한다.

김: 이번 결의안 통과에서 한국이 갖는 위상은 뭔가?

맥퍼슨: 동북아시아의 한·중·일 세 나라 중 중국과 일본 두 나라는 세계적으로도 사형이 많이 집행되고 있다. 일본에서는 올해만 10명이 사형당했다. 이 때문에 국제앰네스티와 유엔이 긴급행동을 취하고 일본 정부에 곧장 이메일과 팩스를 보냈다. 나 역시 일본 외무성 고위 관리들을 많이 만났는데 다들 사형제 논의에 매우 불편해한다. 그리고 일본은 한국이 올해로 10년째 사형을 집행하지 않아 ‘사실상 사형 폐지 국가’가 되는 것에도 신경을 많이 쓰는 눈치였다. 정치적으로 경쟁 관계에 있는 두 나라인데, 인권 문제에서 간극이 크게 벌어지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일본은 결의안 투표에서는 변함없이 ‘반대’ 의견을 취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동북아시아에서 한국이 찬성 투표를 하고, 또 실질적 사형 폐지 국가가 된다면 동북아 인권운동의 구도에서 한국이 상당히 진일보하는 것이 된다.

김: 유엔에서 미국의 입김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미국은 사형제 존치 국가이고, 당연히 반대 투표를 할 텐데 결의안 상정에 미국이 걸림돌이 되지는 않았는지 궁금하다.

맥퍼슨: 아직까지 미국은 특별히 정치적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 않다. 사형제 폐지가 아닌 유예 수준이어서 그런 것으로 추측된다. 미국이 직접적으로 다른 나라에 영향을 미치는 행동은 하고 있지 않지만 필리핀 같은 군사동맹국,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무역동맹국에 영향을 줄 순 있겠다.

사형제 폐지 로드맵은 어디로 갔나

김: 내가 TV 토론회를 자주 나가는데, 사형제 찬성 쪽 패널로부터 “사형제 폐지하면 문명국이고 안 하면 미개국가라고 하는데, 그럼 일본과 미국도 미개국가냐”라는 요지의 주장을 많이 듣는다. 그럴 때 사실 난감하다. 미국을 어떻게 봐야 하나.

맥퍼슨: 사형제 존속 여부는 한 국가의 인권 보호에 대한 관심과 실태를 최전선에서 보여주는 잣대다. 미국은 스스로를 인권선진국으로 표현하는데 매년 수십 건의 사형이 집행되고 있고, 관타나모 수용소에서의 고문도 매우 잔혹하다. 이런 단면들은 미국을 인권 선진국으로 볼 수 없게 한다. 그러나 미국은 땅이 넓은 만큼 주마다 서로 다르다. 북부 지방은 폐지 운동이 활성화되어 있고, 대신 남부에 위치한 텍사스, 플로리다, 조지아 등 30개 주에서만 사형이 집행되고 있다.

김: 사형제도를 유지하는 나라들에서 사형제가 폐지되려면 어떻게 돼야 한다고 보는가?

맥퍼슨: 사형 폐지 운동 초기에는 변호사 집단을 중심으로 사형 폐지 운동을 활발하게 진행한다. 그리고 이어 시민사회 운동단체가 함께 생긴다. 그러나 이렇게 시민들을 중심으로 사형 폐지를 이슈화한다고 해도 근본적으로 사형제도는 굉장히 정서적으로 민감한 이슈인 만큼 흔들리지 않고 국민을 올바로 이끌어줄 수 있는 강력한 정치적 리더십이 필요한 것 같다.

김: 한국에서도 사형제와 관련한 여론조사를 하면, 대체로 사형제 폐지 반대가 65% 안팎이다. 그러나 이게 이슈에 따라 들쑥날쑥한다. 유영철 연쇄살인 사건이 보도되면 반대 여론이 70% 정도까지 높아지다가, 인기 있는 영화배우들이 사형수에 대해 인간적으로 접근한 같은 영화가 개봉되면 사형제 폐지에 반대하는 수치가 60% 아래로 내려가기도 한다. 정치인들도 이런 분위기를 의식해서 종종 입장을 명확히 하거나 혹은 입장을 슬쩍 표시하지 않기도 한다.

맥퍼슨: 사형제가 폐지되기 어려운 이유가 일반 국민이 잔인한 범죄에 대해서는 용서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대중은 범죄자를 향해서는 동정심을 거의 갖지 않기에 범죄자도 인권이 있다는 식으로 설득하기란 쉽지 않다. 내 모국인 영국 같은 경우도 강력범죄(일가족 살인, 강간 등)가 일어났을 때는 여론이 달궈져서 사형 폐지에 대한 반대 여론이 급등한다. 유럽에서는 덴마크가 사형제 찬성 여론이 25%에 그쳐 가장 낮다.

김: 많이 얘기되는 사례지만, 프랑스만 해도 사형제 폐지에 반대하는 여론이 66%를 넘었지만 프랑스 의회가 “올바른 입법을 하는 것이 국민의 뜻을 존중하는 것이며 그것이 민주주의의 원칙”이라며 사형제 폐지 입법을 통과시켰다. 한국의 경우 법무부 장관에 따라서도 다르다. 법무부 장관이 사형을 구형하는 위치에 있는 검사 출신이 많기 때문에 그동안 대체로 사형제도에 대해 보수적이었다. 근데, 천정배 장관 시절에 법무부가 기존의 사형제에 대한 견해를 버리고 면밀히 연구 검토해서 로드맵을 만들었다. 물론 이후 장관이 두 번 바뀌면서 흐지부지됐다.

맥퍼슨: 오늘 법무부를 방문했을 때도 그 로드맵과 연구 결과에 대해 집요하게 물었는데, 법무부는 계속 모른다고 하더라.

올해도 이대로 넘어가면…

김: 한국은 의회에서도 지금 난항 중이긴 하다. 15·16·17대 국회에서 계속 사형제 폐지 법안을 상정했다. 상임위원회인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이걸 본회의에 상정해야 하는데, 지난봄에 법사위 회의에서 위원들 의견이 8 대 7 정도로 비슷하게 나왔다. 보통 이러면 이 안건을 다루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두는 게 한국 국회의 관행이다. 이론상 통과돼야 하는데 참 치명적인 현실이기도 하다. 어쨌든 그래서 이번 17대 국회에서도 법안이 여전히 잠자고 있다. 또 다른 방법이 있는데 국회의장 직권상정이다. 그런데 국회의장들도 국회의원 시절에는 사형제 폐지 운동을 하다가, 막상 의장이 되면 딴소리한다. 사형제 폐지에 대한 여론이 전반적으로 긍정적이지 않다 보니 정치적으로 득이 될지, 실이 될지를 판단하다 머뭇댄다. 이런 걸 보면 한국에서도 정치적 리더십이 사형제 폐지에 가장 결정적인 요인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한 가지 고무적인 것은 10월10일 사형제 폐지국가 선포식 행사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올해도 사형제 폐지가 물 건너갔다고 하니 17대 국회에서 사형제 폐지 특별법안을 발의한 유인태 의원이 11월에는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얘기한 일이다. 만약 올해도 이대로 넘어가면 천주교인권위원회가 네 번째로 법안을 의회에 올릴 준비를 해야 한다.

맥퍼슨: 사형제 폐지 움직임은 개별 국가의 문제가 아니라 초국가적 문제다. 그리고 지금은 사형제도가 폐지돼가고 있는 추세이기도 하다. 향후 10년 안에는 사형제 폐지 국가가 점점 늘어나길 바라고, 아시아 국가들 가운데서는 10년간 사형 집행이 일어나지 않은 한국이 앞장서 좋은 본보기가 됐으면 한다. 그리고 한국 정부가 리더십을 보여주길 바란다.

김: 최근 한국에서는 ‘인혁당 사건’으로 무죄인데 사형 판결을 받아 17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된 피해자들에 대해 무죄판결을 하고 이들 가족에게 637억원을 국가가 배상하라는 판결이 나왔다. 이게 재밌는 것이 원래는 배상액이 10억원이었는데 이 10억원이 32년간 이자가 붙어서 한 사람당 26억원이 늘어났다. 이는 국가가 잘못 판결해 사형을 구형한 경우, 국가가 배상해야 할 액수가 이렇게 큼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현재 이분들이 배상금 중 100억원을 모아 ‘사형수 피해자 가족을 위한 재단’을 만들기로 했다. 이 얘기가 다른 나라에 알려진다면 잘못된 사형 집행이 국가에 미치는 경제적 부담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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