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검찰도 헷갈린다, 신정아 ‘스캔들’

등록 2007-10-05 00:00 수정 2020-05-03 04:25

‘섹시한 먹잇감’ 앞에 광분한 한국 사회, 누구의 죄를 물을 것인가

▣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신정아씨를 둘러싼 지난 석 달 동안의 한국 사회의 소동은 범인을 잡을 수 없는 한 편의 잘 짜인 추리 단막극을 보는 느낌이다. 신씨의 미국 예일대 박사학위 위조 의혹이 불거질 때만 해도, 사건은 출세욕에 눈먼 한 젊은이의 ‘거짓말’ 해프닝으로 끝나는 듯했다. 언론들은 신정아를 ‘제2의 황우석’이라 불렀고, 일부 언론에서는 학력 물신주의에 빠진 사회를 비판하는 기사들을 뽑아내기도 했다.

흥분하고 나선 ‘강안남자’의

신씨의 배경에 권력 실세인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이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거짓말 해프닝’은 ‘섹시한 스캔들’로 바뀌게 된다. 사람들은 김영삼 정권 시절 ‘산타바바라 바닷가에서 아침을 함께한’ 이양호 전 국방부 장관과 로비스트 ‘린다김’을 떠올렸고, 신씨의 등에는 ‘제2의 린다김’이라는 꼬리표가 따르기 시작했다.

‘섹시한 먹잇감’이 등장하면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주인공은 ‘강안남자’의 였다. 이 신문은 9월13일치 1면에 “신정아 누드 사진 발견… 원로 고위층에 ‘性로비’ 가능성 관심”이라는 기사와 함께 신씨의 벌거벗은 사진을 3면에 게재했다. 이 신문은 익명의 한 미술계 인사의 입을 빌려 “신씨가 영향력 행사가 가능한 각계 원로급, 고위급 인사들에게 성로비를 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물증”이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당연히 민주언론시민연합 등 언론 시민단체와 한국여성단체연합 등 여성단체들은 “ 폐간”을 요구했고, 신씨는 ‘제2의 오양’이라는 동정을 받았다. 매일 도하 신문 1면에는 신씨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실렸고, 그가 “‘새우깡’과 ‘짱구’를 먹고 싶어했다” “병원 밥을 깨끗이 비웠다” “오늘은 검찰에 나오면서 옅은 화장을 했다”는 등 가십성 기사도 줄을 이었다. 검찰 수사는 곧 마무리될 것으로 보였고, 신씨와 변 전 실장은 매서운 법의 심판을 받으면 될 터였다.

그러나 문제가 그리 쉽지 않아 보인다. 숨고르기에 들어선 것은 칼자루를 쥔 검찰이다. 지난 9월18일 구속영장 기각 뒤 “사법정의가 무너졌다. 영장을 재청구하겠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한 검찰은 영장 재청구 시기를 저울질하며 숨고르기에 들어갔다. 검찰 고위 간부는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과 신씨 관련 수사는 앞으로 쭉 늘어질 것 같다”고 말했다. 겉으로 내놓는 이유는 신씨와 관련한 새로운 혐의가 드러나 보강 수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속내는 간단치 않다. 검찰은 무엇보다 변 전 실장과 신씨가 받고 있는 혐의들에 대한 법리 적용이 쉽지 않다는 고민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쉽게 말해 신씨의 예일대 학력 위조를 제외하면, 변 전 실장과 신씨가 저지른 일들이 법의 잣대로 처벌할 수 있는 죄인지 아닌지 검사들조차 헷갈려 하고 있다는 뜻이다. 신씨의 학력 위조를 제외하고 지금까지 검찰이 밝혀낸 이번 사건 관계자들의 혐의는 세 갈래로 나뉜다.

가장 큰 줄기는 변 전 실장이 행정자치부의 반대 의견에도 신씨가 재직했던 동국대 이사장 영배 스님의 흥덕사가 자리한 울주군에 특별교부세 10억원을 지원한 것이다. 검찰은 이 경우 변 전 실장이 ‘직권남용’죄에 해당한다고 보고 있고, 이를 뒷받침할 만한 관계자들의 증언도 확보해 혐의 입증을 어느 정도 자신하는 분위기다. 그러나 특별교부세는 정부 고위직과 국회의원 등의 민원이 있을 때 나눠주는 경우가 많은 돈이다. 검찰은 변 전 실장의 흥덕사 지원이 이 관행에서 어긋날 만큼 부적절하고 사리에 맞지 않는다는 점을 입증해야 한다. 쉽지 않은 얘기다.

‘직권남용’ 혐의 적용 결론 못 내

더 큰 고민은 두 번째다. 변 전 실장은 그의 고교 동창들이 수장으로 있던 산업은행·대우건설 등에 압력을 가해 신씨가 재직하던 성곡미술관 쪽에 거액을 후원하게 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신씨는 이 돈 가운데 2억4천여만원을 횡령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은 변 전 실장을 상대로 ‘제3자 뇌물 제공’ 또는 ‘직권남용’ 혐의를 적용할 것을 검토하고 있지만 쉽게 결론을 못 내고 있다. 변 전 실장과 박세흠 전 대우건설 사장과 김창록 산업은행 총재는 부산고 동기다. 친구에게 미술관 후원을 부탁하는 것을 직권남용, 또는 제3자 뇌물 제공 혐의로 단죄할 수 있을까. 이 사건을 맡고 있는 서울 서부지검 수사팀은 추석 연휴 마지막 날이던 9월26일 새벽 3시까지 수사 검사 전원이 참석해 난상 토론을 벌였지만, 어느 쪽 혐의를 적용할지 합의된 의견을 도출하지 못했다. 검찰이 의견 일치를 봤다 해도 법원이 어떻게 판단할지는 또 다른 문제다.

마지막으로 사건에 등장하는 조연들의 처리 여부가 남아 있다. 영배 스님은 변 전 실장에게 부탁해 자신의 개인 사찰인 울산 흥덕사에 정부 예산 10억원을 편법 지원하도록 부탁했다. 그 대가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영배 스님은 신씨의 학위 위조 의혹이 불거지자 불교계 인사들이 모인 공개적인 자리에서 “신씨 학위는 진짜”라며 신씨를 비호하는 발언을 했다. 그리고 박문순 성곡미술관장이 있다. 신씨는 “빼돌린 기업 후원금을 박씨에게 상납하고 1300만원 상당의 목걸이와 집 보증금 2천만원을 받았다”고 검찰에서 진술했다. 박 관장은 또 신씨 명의로 있던 효자동 우리은행 지점 개인대여금고에 보관돼 있던 현금 10만달러와 1천만엔의 실제 주인이라는 의혹이 있다.

‘지배계층의 작동 원리’ 누드 노출?

매일같이 언론을 장식하는 갑론을박에도 불구하고, 학력 위조를 뺀 신씨와 변 전 실장의 혐의는 실체가 보이지 않는 신기루에 가까워 보인다. 만약 신씨의 학위가 진짜였다면, 이번 사건을 둘러싼 다양한 인물 군상들의 암투와 상호작용은 은폐된 채 남았거나 있을 수 있는 사회현상의 하나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미모의 여 교수는 권력의 실세에 기대 그가 원하는 사회적 지위를 얻고, 권력의 실세는 여성의 젊음을 누리기 위해 자신의 권력과 인맥을 동원한다.

동원되는 인맥은 평생 그가 보호를 받아왔고, 보호를 해왔을 고등학교 동창들이다. 친구의 부탁을 받은 건설사 사장과 국책은행 간부는 수억원의 돈을 손쉽게 동원한다. 권력 실세는 문제가 터지면 국민의 혈세를 퍼부어 사건을 무마한다. 그 돈은 10억원이어도 좋고, 그 이상이어도 좋다. 돈을 받는 성직자는 거짓에 눈감는다. 우리나라 굴지의 미술관장은 부하직원의 이름으로 비밀금고를 만들거나, 수천만원의 우수리를 떼어주고, 억대의 후원금을 상납받았다는 의혹을 받는다. ‘추하다’는 말로는 부족한 한국 지배계층의 작동 원리가 신정아라는 약한 고리를 통해 대중에게 노출된 셈인데, 그에 대해 도덕적 비난을 가할 순 있어도 죄를 물어 형사처벌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가 사는 곳은 형법과 형사소송법의 기본 원칙이 충실히 구현되는 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 아닌가.

관련기사

▶추악한 미술판을 뭘로 덮을 것인가

▶‘문화일보’의 인권침해를 고한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