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비전과 함께 잠비아로 날아가 만난 내 딸, 마포프웨 카붐부
▣ 마자부카(잠비아)=최혜정 기자 한겨레 편집부 idun@hani.co.kr
흙먼지 자욱한 들판은 가도 가도 끝이 없었다. 마냥 달리던 차가 방향을 틀어 어느 집으로 스윽 들어갔다. 나무 밑에서 한 아이가 몸을 배배 꼬며 얼굴 노란 외국인들을 신기한 듯 바라보고 있었다. “아동번호 1215번이네요.” 오성혜 월드비전 후원사업팀 주임이 서류를 뒤적였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아, 너로구나. 내가 후원하는 마포프웨 카붐부. 축구를 좋아한다는 6살짜리 여자아이. 사진으로만 만나던 그 아이는 1년 전 처음 받았던 사진에서의 모습보다 훨씬 자라 있었다. ‘부모님은 다 계시고, 형제는 없고. 아… 또 뭐가 있더라. 대체 뭘 물어보지?’ 머릿속을 뒤지는 사이, 아이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에라 모르겠다, 와락 안아버렸다.
불량 후원자를 흔든 한통의 이메일
애초 여름 휴가지로 잠비아를 선택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시야와 ‘계좌’ 사정이 중국, 일본 아니면 동남아를 넘어서지 못하는 터라 올여름 역시 동남아 두어 곳을 두고 저울질하고 있었다. 지난 5월 어느 날 월드비전에서 이메일이 한 통 날아왔다. “잠비아 마고예 사업장으로 후원자님을 초청합니다.” 어라, 지난해 봄부터 후원해온 카붐부가 사는 동네였다. 사실 말이 좋아 ‘후원’이지, 신용카드에서 다달이 2만원씩 자동이체해놓고, 지난해 생일날 축구공 하나 달랑 보내준 게 고작이었다. 후원 계기 역시 충동적이었다. 우연히 김혜자씨의 를 읽고 새벽 3시에 눈물 찔끔 흘리며 월드비전 홈페이지에 연락처와 카드번호를 입력했을 뿐이다. 빠듯한 휴가 일정에 그 먼 곳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 고민했지만, 아이가 그려 보내온 뿔 달린 동물이 소인지 염소인지도 궁금했고 기아, 가난, 에이즈가 우선 떠오르는 아프리카 대륙에 대한 관심도 발동했다. 무엇보다 비록 ‘불량 후원자’이긴 하지만, 머룻빛 눈망울을 가진 ‘내 딸’을 지금 아니면 볼 수 없을 것 같은 절박함이 컸다. 큰맘 먹고 200만원을 입금했다.
지난 7월28일 오후 “해외 원정미팅 가는 거 아니냐”는 의혹에 찬 눈길들을 뒤로하고, 후원자 19명, 월드비전 직원 2명과 함께 아프리카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번 방문에 20여 명이나 모인 것도 놀라웠는데, 월드비전에서 해외 아동후원사업에 참여하는 이들이 올해에만 16만 명에 이른단다. 아니, 언제 그렇게 ‘사해동포주의자’가 많아진 거지….
24시간 동안 비행기 2번을 갈아타고, 잠비아의 수도 루사카에 도착했다. 버스를 타고 남쪽으로 다시 두어 시간 달려 마자부카 지역에 들어섰다. 우리의 행선지 마고예는 이곳의 한 지명이다. 우리로 치면 ‘마자부카시 마고예읍’쯤 되겠다. 며칠간 씻지 못할 걸 각오하고 갔는데, 숙소가 있는 시내는 ‘소박하지만 있을 건 다 있는’ 번화가였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수입한 물건만 파는 대형 유통점도 있었고, 은행은 한 집 건너 하나씩 있었다. 현지 가이드 빅터는 이곳엔 설탕농장과 제당공장이 있어서 경제력이 꽤 높은 편이라고 설명했다. 따뜻한 물이 나오는 숙소가 반갑긴 했지만, 왠지 ‘배신감’도 느껴졌다.
인형도, 옷도, 머리핀도 사올걸…
다음날, 후원아동이 사는 동네에 따라 3조로 나뉘어 방문에 나섰다. 전날 느꼈던 당혹감 따위는 마고예로 들어가는 비포장길로 들어서자마자 한방에 날아갔다. 지프 안에서 사정없이 머리를 박고, 자욱한 흙먼지에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틀어막다 보니 ‘숨 좀 제대로 쉬었으면’ 하는 바람만 간절했다. 우리 조 7명의 행선지인 마고예‘읍’의 문질레‘리’는 말이 한 부락이지, 집 하나를 본 뒤에 다음 집을 보기까지 20~30분은 족히 달려야 하는 곳이다.
이날 만난 나의 카붐부. 낯가림도 없이 안기고 손을 꼭 잡아주던 아이가 마냥 고마웠지만, 한동안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카붐부 엄마에게 “공부 열심히 시키라”는 ‘꼰대’같은 말만 중얼거리고 발길을 돌렸다. 스케치북과 크레용, 색연필 같은 문구류만 잔뜩 안겨준 것도 미안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후원자들처럼 인형도 사고, 옷도 사고, 신으면 불 들어오는 슬리퍼도 사고, 머리핀도 사올걸….
후원아동들은 손님을 맞느라 비교적 깔끔한 모습이었지만, 이웃에서 놀러온 아이들은 콧물과 땟국으로 얼룩진 얼굴에 먼지 범벅이었다. 카붐부도 평소엔 저렇겠지. 귀와 입술 주변에 진물이 흘러, 파리떼가 아이들 얼굴을 떠나지 않았다. 응급의학과 의사인 박근주(32) 후원자는 “중이염이 많은데, 잘 낫지도 않고 재발도 잘되는 게 문제”라며 “우리나라에선 한 알에 10원인데, 그냥 보내주면 되는데…” 하며 말꼬리를 흐렸다. 숙소에 돌아오니 먼지 탓에 목이 칼칼했다. 건조한 날씨로 피부가 발갛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둘쨋날, 므넹가 지역 초등학교의 교실 증축에 쓸 벽돌 만드는 작업에 ‘투입’됐다. 체로 걸러낸 가는 모래를 시멘트와 4 대 1로 섞은 뒤, 틀에 넣고 벽돌 모양을 찍어내는 일이다. 주민들이 옆에 서서 행여 사고나 치지 않을까 걱정하는 눈빛으로, 우리의 ‘그야말로 삽질’을 구경했다. 과연 그 벽돌들이 제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심히 걱정스러웠지만, 어쨌든 반나절 동안 벽돌 40여 개가 늘어났다. 오후엔 후원 아동과의 레크리에이션 시간이 준비돼 있었다. 우리가 교실 한 칸을 빌려 뛰노는 사이, 교실을 ‘빼앗긴’ 학생들은 창문 밖에서 마냥 지켜봐야 했다. 레크리에이션 선물로 준비한 사탕과 캐러멜, 청량음료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모습이 지금도 미안할 뿐이다.
마고예 지역에는 1만9천 명의 학령기 아동이 있지만, 40% 정도만 입학한 상태다. 학교는 중등과정까지밖에 없어, 고등과정인 10학년으로 진학하려면 다른 지역으로 ‘유학’을 떠나야 한다. 하지만 기숙사비가 비싸, 돌봐줄 친척이 없다면 학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워낙 가난한 지역이라 선생님들도 오기를 꺼린다. 결국 주민들이 교사로 나섰다. 1950년에 지어진 칼라마초등학교는 1학년부터 7학년까지 280명이 있지만, 교실 세 칸에 교사는 4명뿐. 천장에선 돌 부스러기가 떨어지고 벽은 당장이라도 갈라질 것처럼 위험해 보였다. 학생들은 작은 책걸상 하나에 3명이 엉덩이를 바짝 붙이고 앉아, 교과서 1권을 같이 봐야 한다.
입학을 했더라도 높은 출석률을 기대하긴 어렵다. 어린 학생들이 매일 8~10km를 걸어 등교하기가 쉽지 않은데다, 도시락을 싸줄 형편이 못 돼 아예 학교를 안 보내는 부모도 많기 때문이다. 특히 부모가 농사를 짓는다면, 집안일은 아이들이 책임진다. 물 길어오는 일은 대부분 아이들의 몫이다. 멀게는 수십km를 걸어 우물에서 물을 길어간다. 우리가 본 식수원은 구멍을 판 뒤 그 위를 통나무로 얼기설기 막아놓은 ‘구덩이’였다. 나무를 발판 삼아 아래를 내려다보니, 햇빛에 빛나는 물 위에 나뭇잎과 먼지가 떠다녔다. 9개 마을의 주민 400여 명이 사용하는 우물이다. 한 주민은 “아이들이 빠질 수도 있어 항상 사고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주민은 “건기에는 더 깊게 파야 하는데, 돌이 많아서 파기가 어렵다”며 “60m 정도 파면 좋은 물이 나온다는데, 우리끼리 그 정도로 팔 여력이 없다”고 했다.
루시아노 헤르미니아 루피노, 딸 추가!
깨끗하지 못한 물 때문에 설사병과 수인성 질병, 피부병이 흔하지만, 7만여 명이 사는 마고예 지역에 병원은 없다. 다만 마을에 보건소가 하나씩 딸려 있다. 우리가 찾은 이테베 부락의 보건소는 휑한 들판에 외로이 서 있었다. 1974년에 지어졌다는 이 보건소는 반경 25km에 사는 주민 4천여 명의 건강을 책임진다. 안에 들어가니 ‘입원실’에 간이침대 2개와 작은 사무용 책상, 손으로 일일이 쓴 주민 진료 수첩 등이 보였다. 의사는 없고 간호사 한 명이 지킨다. 이곳에서 10년째 일하고 있다는 간호사 마가렛 치코파는 “기침이나 콧물, 감기, 상처를 주로 치료하는데, 검사 시설이 없어서 아파도 왜 아픈지 알 수 없다”고 했다. 분만실이 없고 물이 공급되지 않는 점도 보건소로서는 치명적이다. 마자부타 시내에 있는 병원으로 가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므윔바 하마질라 주민위원회 의장은 “소달구지를 타고 큰길까지 14km 정도를 가서, 다시 지나가는 차를 잡아타고 마자부카까지 20km를 가야 한다”며 “병원에 도착하기도 전에 길에서 죽는 일이 많다”고 말했다. 다른 아프리카 지역과 마찬가지로, 이곳 역시 에이즈가 심각한 문제지만, 검사 장비가 없어 실제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HIV) 보균율을 알기도 어렵다.
내가 매달 내는 2만원은 이런 마고예 지역의 교육·보건·식수원 개발사업에 보태지고, 결연아동에게는 학비과 교복, 학용품으로 지원된다고 했다. 지금은 강물을 길어 먹는 카붐부네도 언젠가는 깨끗한 물을 먹을 수 있을까.
24시간이 꼬박 걸리는 거리만큼, 한국과 잠비아 사이엔 영원히 좁혀질 수 없을 것 같은 차이가 존재했다. 평균 수명 37.4살에 1인당 국내총생산(GDP) 943달러, 하루 2달러 이하로 살아가는 인구가 94.1%. 내가 이곳에서 태어났다면, 지금쯤 에이즈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가 5년쯤 뒤에 죽을지도.
한국에 돌아와서 한 명 더 후원 신청을 했다. 땅따먹기 놀이를 좋아한다는, 모잠비크의 초등학교 2학년 여자아이 ‘루시아노 헤르미니아 루피노’. 비록 김혜자도 한비야도 아니고, 앤젤리나 졸리는 더더욱 아니지만, 잠비아에서 보고 듣고 만난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애처로움은 앞으로 내 인생의 한 방향타로 자리할 예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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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직후, 우리나라는 국제 구호단체들의 중요한 원조 대상국이었다. 월드비전(worldvision.or.kr)은 1950년 9월 미국의 선교사가 한국의 전쟁고아를 돕기 위해 세운 뒤 세계적인 구호단체로 성장했다. 한국이 원조의 ‘대상’에서 원조의 ‘주체’로 변신하기 시작한 건 1990년대 중반부터다. 부족 간의 내전으로 50만 명 이상이 숨진 르완다 사태와 기아·내전으로 30만 명이 넘게 희생된 소말리아 사태 등이 잇따라 발생하면서, 한국의 해외구호 사업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받았으니 되돌려줄 때’라는 사회적·역사적 책임의식도 깔려 있었다.
현재 해외원조단체협의회(해원협)에 등록된 국내의 해외구호 단체는 56개다. 해원협에 등록되지 않은 단체까지 더하면 100개가 훌쩍 넘는다. 해외구호 사업을 후원하는 회원 수를 종합적으로 집계한 수치는 없지만, 2000년 이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는 게 해원협 쪽의 설명이다. 오수용 해원협 사무총장은 “특히 젊은 층을 중심으로 2000년대 이후 회원이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며 “이들은 인류 전반의 빈곤 문제를 세계 시민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 네팔·몽골·방글라데시 등 아시아 쪽에 집중돼 있던 사업도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 대륙으로 옮겨가는 추세다. 오 사무총장은 “다른 해외 구호기구와 비교했을 때, 각 단체의 전문성이 떨어지는 것이 한계”라며 “의료든 교육이든 특성화된 사업 추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해외구호 사업에 힘이 되고 싶은데, 어떤 단체가 있는지 어떻게 후원해야 하는지 막막하다면, 해원협 홈페이지(ngokcoc.or.kr)가 도움이 될 듯하다. ‘회원단체소개’ 항목을 클릭하면, 이곳에 등록된 원조단체들의 홈페이지와 간단한 소개글이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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