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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이 공중전화를 찾는 이유는

등록 2007-07-27 00:00 수정 2020-05-03 04:25

수집한 정보를 줄선 후보 캠프에 유출… 참여정부가 강조하는 ‘정치 중립’은 미완의 과제

▣ 류이근 기자ryuyigeun@hani.co.kr

“중앙정보부, 안기부, 국정원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계속 말썽이다. 내가 대통령이 되면 국정원의 국내 사찰 업무를 중지시키고, 해외 정보만을 수집, 분석해 국익을 위해 일하는 ‘해외정보처’로 바꾸겠다.”(노무현, 2002년 11월, 후보 시절 부산 거리 유세에서)

부패척결 TF팀도 적법성 논란

국정원을 해외정보처로 개편하는 게 바람직한 길인지 접어두고서,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 국정원은 해외정보처로 간판을 바꿔달지 않았다. 이름은 그대로 있고, 말썽은 계속되고 있다. ‘국내 사찰 업무’는 사라지지 않았다. 대통령 직속 기구인 국정원의 직원이 야당 대통령 후보 친인척의 부동산 거래 내역을 국가 전산망을 통해 들춰봤다. 국정원은 8차례나 보도자료를 내 “‘부패척결 태스크포스(TF)팀’ 소속 5급 직원의 정상적인 부동산 비리 수집 업무였다” “다른 목적으로 열람자료를 활용하거나 외부에 유출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하지만 국정원 ‘부패척결 TF팀’ 운영도 적법성의 문제를 안고 있거니와, ‘정치 사찰’이란 여론의 딱지를 떼기 어렵게 됐다.

“국정원의 부처 출입제는 과연 무엇이 필요한 일이고 그동안 어떤 활동을 해왔는지 실태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노무현, 2003년 3월,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형식상 부처 출입제는 없어졌다. 출처를 밝히기 곤란한 국정원 내부 자료를 통해 국정원이 이미 2005년 “정치 사찰은 물론 부처와 언론사 등 대상 기관의 상시 출입을 금지하는 등 과거의 적폐를 뿌리뽑기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내용은 그대로다. 언론사 ‘출입제’가 없어졌지만, 언론사를 ‘담당’하는 국정원 직원은 여전히 존재한다. 부처에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에 당선된 이래로 국정원의 정치 관련 정보 보고는 단 한 건도 받지 않았다.”(노무현, 2003년 3월, 검사와의 대화에서)

대통령이 정확히 약속을 지켰는지 알 길이 없으나, 정치 관련 정보 보고는 계속 생산되고 있다. 국내 정치 관련 정보의 생산을 ‘탈정치’적이라거나 ‘정치 중립’이라고 주장할 순 있다. 하지만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면서 국정원에서 생산된 것으로 추정되는 정치 관련 정보들이 때론 문서로 때론 입을 통해 정치권으로 흘러들어가 유통되고 있다. 국정원은 아니라고 하지만, 한나라당은 박근혜 전 대표와 관련 있는 이른바 ‘최태민 보고서’를 국정원이 흘렸다며 전·현직 국정원장 등을 검찰에 수사 의뢰했다.

이쯤해서 대통령도 보고받길 원치 않는다는 국내 정치 관련 정보가 왜, 어떻게 생산돼, 때론 역으로 정치권으로 흘러들어가 유통되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한번 던져볼 필요가 있다. 먼저, ‘왜’를 따져보자. 국회 정보위원을 지낸 ‘범여권’의 한 의원은 “문제는 정보 공급자(국정원)가 아니라 수요자(청와대)”라며 “청와대가 국가 안보의 개념을 반부패 등으로 지나치게 확장시켜준 마당에, 국내 정보에서 순수 정치 정보를 어떻게 분리시킬 수 있겠냐”고 말했다. 국회 정보위원인 한나라당의 권영세 최고위원도 “국정원의 정보를 쓰는 청와대가 부정부패를 뿌리뽑겠다며 국정원을 활용하는 것은 정치 사찰의 문을 열어놓는 꼴”이라고 말했다. 반부패를 명분으로 국정원이 국내 정치 정보 수집을 할 수 있는 길을 열어뒀다는 얘기다.

“들킬까봐 공중전화로 제보”

국정원의 국내 정보 수집을 금지하지 않는 이상 정치 분야만을 차단시킬 수 없다거나, 다른 목적으로 활용되는 것을 주의하면 정치 정보 생산 자체가 그리 나쁜 일만은 아니라는 주장도 적지 않다. 하지만 역으로 ‘정치 중립’과 ‘탈정치화’를 외치며 정치 사찰을 더는 하지 않겠다는 국정원이 왜 국내 정치 정보를 수집해야 하는지 이해하기도 쉽지 않다. 정치의 중심인 여의도 정치권을 중심으로 얘기해보자. 여의도는 국정원의 가장 중요한 국내 정치 정보 생산 현장이자, 정치권과 밀착돼 있는 국정원 일부의 어두운 단면을 보여주는 무대다.

“(국정원의 누가 이명박 친인척의 부동산 정보를 열람했는지) 제보를 하니까 우리 캠프가 안다. 내밀한 것들이 정권 말기가 되고, 국정원 내부에서 줄서기도 하고 그러니 자꾸 드러날 수밖에 없다. 앞으로 통제하기 힘들 거다. 우리 캠프 쪽이나 내가 아는 국정원 직원들은 요즘엔 들킬까봐 우리한테 공중전화로 제보한다. 고맙긴 하지만, 그것(내부 정보 활동의 외부 누설)도 잘못된 거 아니냐. 정치권에 얼마나 줄서 있는지 모르겠지만, 국정원이 흔들리고 있는 건 사실이다.” 이명박 캠프의 한 핵심 의원의 말이다.

그의 말 속에서 국정원 직원 일부가 ‘정치 바람’을 타고 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같은 당이지만 이명박과 박근혜 캠프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권영세 최고위원은 “국정원이 나름대로 한나라당 성향이라 하더라도, 자기들끼리 편가름해서 이명박한테 줄선 사람, 박근혜한테 줄선 사람들로 나뉘었다”고 말했다. 누구인지 몇 명이나 그런지 쉽게 파악할 수 없지만, 일부 국정원 직원들이 특정 대선 후보 쪽으로 줄섰다는 직·간접적인 증언은 캠프 안팎의 사람들한테서 쉽게 들을 수 있다.

국회를 상시 출입하는 국정원 ‘대외협력단’(‘정당팀’이나 ‘국회팀’으로 불리기도 함)은 밑바닥의 정치 정보를 생산하는 직원들이 모여 있다. 정당 및 국회의원, 국회 사무처, 정책 담당 등 15명 안팎의 인원이 활동한다. 정당을 출입하는 직원들은 열린우리당, 한나라당, 민주노동당 등 당으로 나뉘고, 다시 지역 등을 기준으로 국회의원을 전담한다. 이들은 각 당 원내대표 경선 동향을 비롯해 당 안팎의 상황과 의원 동향뿐만 아니라 대선을 앞두고선 캠프 동정도 부지런히 수집하고 있다. 권영세 최고위원은 “문제는 야당 대선 후보 캠프의 사정을 보고하는 게 국정원의 업무 범위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라며 “이런 게 바로 정치 관여의 시작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정보를 수집 및 유통하는 과정에서의 잡음도 있다. 국회 정보위 의원실에 있었던 한나라당의 한 보좌관은 “이 캠프에 와선 저쪽 캠프 쪽의 단점을 얘기하고, 저쪽 캠프에 가선 이쪽 캠프의 단점을 얘기하고 다닌다”며 “설령 국내 정치 정보를 수집할 수 있다 해도 이런 식으로 왜곡, 유통시켜선 안 된다”고 말했다. 사실 국정원 직원들의 국회 출입은 논란이 된 적이 거의 없다. 그 이유를 국회의장실의 한 관계자는 “정보량이 곧 의원의 능력으로 평가받는 풍토에서, 의원과 정보를 제공하는 국정원 직원은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라고 말했다. 여기서 한발 나아가 수집된 국내 정치 정보가 일상적으로 어떻게 가공돼 어디까지 보고되고 어떻게 활용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이쪽저쪽 캠프 오가며 왜곡·유통

과거 국정원이 사사로이 정권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는 비판에서 많이 자유로워졌지만, 국정원이 입에 거품을 물고 강조하는 확고한 정치 중립은 아직 미완의 과제다. 참여정부 들어 국정원이 자체 평가에서 “대통령의 정치 정보 보고 금지 지시에 따라 정치 사찰성 정보 생산은 완전히 중단됐으며, 이를 통해 확고한 정치적 중립 기반을 구축했다”고 자평했지만, 자평에 그쳤다. 국내 정치 정보의 생산과 정치권과의 끈적끈적한 관계를 털지 않는 이상, 정치 중립성에 대한 시비는 어느 때고 다시 터져나올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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