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터리 핑계로 ‘진료권리’ 통제한다니 의사협회·시민단체가 공동투쟁할 수밖에
▣ 박경철 대한의사협회 대변인 donodonsu@naver.com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t@hani.co.kr
보통 사람들은 당뇨병에 걸리면 내과를 가고, 관절염이 생기면 정형외과, 애를 낳으려면 산부인과를 찾는 게 상식이다. 특정 병원에서 진료를 받다가 예상보다 잘 낫지 않는다고 생각되거나 혹은 심각한 진단을 받게 되면, 다른 의사를 만나서 재차 확인해보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2007년 7월1일부터 이런 권리가 제한되는 국민들이 있다. 대명천지에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저간의 사정을 알아보자.
최초의 의사협회·시민단체 합동 기자회견
원래 먹고살기에도 팍팍한 시절에는 자기 몸 돌볼 겨를이 없었다. 우리나라도 불과 얼마 전까지 그랬다. ‘닦고 조이고 기름치자’는 구호는 그래서 눈물겹다. 기계를 닦고 조이고 기름을 쳤을망정, 정작 자기 몸은 녹이 슬고 볼트와 너트가 빠져나가도 속수무책이었다. 하루하루의 생존이 문제였다. 하지만 산업화가 끝나고 어지간히 먹고살 만해지면서 ‘웰빙’(Well-Being), 즉 ‘잘 살자’는 마음이 생긴다. 그냥 사는 게 아니라 잘 살아야 한다는 걸 자각하게 된다. 이제는 자기 몸을 돌보고 싶어진다. 하지만 한 달에 30만원의 정부 보조금이 전부인 독거노인이나 장애인, 그리고 최저생계비조차 벌지 못하는 극빈층에게는 꿈과 같은 소리다.
이들에게 유일하게 ‘자연 그대로의 생존’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의료를 접할 기회는 고맙게도 정부가 제공한다. 이것이 바로 사회안전망이다. 그러다 보니 이들 계층에 대한 재정 소요가 점차 늘어난다. 이 문제에 수수방관하는 것은 정부의 직무유기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정부가 의료급여 재정 절감에 나서는 것은 상을 줄 일이지, 탓할 일은 아니다. 그런데 고약한 일이 생겼다. 시민단체가 새로 시작한 의료급여 제도가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다며 시행금지 가처분 신청을 내고 헌법 소원을 낸 것이다. 이해할 수 있다. 시민단체야 원래 서민에 대한 혜택 축소라면 이유를 불문하고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니까. 그걸 안 하면 시민단체도 아니니까. 그런데 의사협회도 이 제도에 반대를 하고 나섰다.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럼 그렇지.’ 정부 보조금을 받건 환자 돈을 받건, 이번에 새 의료급여법대로 하면 어쨌든 진료 횟수가 줄어들고 그러면 수입이 줄어들 테니 의사들이 반대하는 것도 당연하다 하겠다. 이른바 ‘밥그릇 싸움’ 선수들이니까.
그런데 대한민국 역사에 한 번도 없었던 희안한 일이 벌어졌다. 의사협회와 시민단체가 손을 잡고 ‘개정 의료급여법 반대를 위한 연대’를 결성하고 공동투쟁을 선언한 것이다. 의사협회와 시민단체는 사사건건 대립했다. 시민단체는 당연히 의료보험 수가 인상에 반대하고, 의사단체는 수가 인상을 주장한다. 그것을 떠나서 이 두 단체는 기본적으로 DNA가 다르다. 시민사회 활동가와 의사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둘이 손을 잡고 합동 기자회견을 열더니 대정부 공개토론을 제안하고, 노무현 대통령에게 철회를 요구하고, 이 문제에 대해 대선 후보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의료쇼핑족·모럴 해저드 핑계는 엉터리
이쯤 되면 관전자의 처지에서는 호기심이 생긴다. 아무리 법 시행을 저지해야 한다는 각론은 같다 하더라도 총론이 다른 두 단체가 공개석상에 나란히 서서 격앙된 목소리로 ‘건강권 사수’를 주장하는 것은 뭔가 그림이 안 맞다. 둘의 주장도 토씨 하나 다르지 않고 똑같다. 불과 얼마 전에 로비 문제로 물의를 빚었던 의사협회의 로비가 시민단체에도 먹혀든 것일까?
불미스러운 일로 지난번 집행부가 물러나고 새 집행부를 꾸린 의사협회 회장은 취임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통렬한 반성의 바탕 위에서 국민의 편에 서는 의사협회가 되겠다.” 두고 볼 일이다. 수사와 언변은 화려할수록 믿을 게 못된다는 것은 그간의 경험이 말해준다. 그런데 이 말이 보도된 신문의 잉크도 채 마르기 전에 의사협회가 ‘투쟁’을 선언했다. 바로 새 의료급여 제도에 대한 반대다. 의사협회의 주장은 이렇다.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의료급여 재정 악화의 주원인으로 지목한, 각 병원을 돌아다니며 하루에도 수십 번씩 진료하는 이른바 ‘의료쇼핑족’ 환자, 한 달에 파스를 수백 장씩 타간 환자들의 ‘모럴 해저드’(Moral Hazard)는 말짱 엉터리라는 것이다. ‘세상에 이런 환자들이 모럴 해저드가 아니라니, 의사협회 너희가 그러면 그렇지.’ 언론을 통해 이런 주장을 접한 국민들의 보편적 정서이다. 하지만 의사협회가 들고 나온 자료를 보니, 유 전 장관이 재임 시절에 들었던 사례는 극히 드문 사례였던 것이다. 일부는 ‘정신질환’이 있는 환자의 진료 자료였고, 일부는 그야말로 온몸의 관절이 만신창이가 돼 관절 마디마다 파스라도 한 장 붙이지 못하면 잠도 못 자는 환자의 진료 자료였다. 유 전 장관도 이 사실을 자인하고 사과했다.
의료급여 문제의 책임을 묻자면, 우선 고급 승용차를 몰고 다니는 사람에게까지 의료급여 자격을 남발한 지방정부와 선심성 정책으로 대상자를 늘린 중앙정부의 책임이 가장 크고, 두 번째는 입만 떼면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를 외치는 나라의 국민이 과거 1만달러 시대보다 좀더 진료 욕구가 커진 탓이라고 할 수 있다. 정부의 보호를 받는 수급자가 늘어나면 재정이 악화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대상자 지정을 마구잡이로 늘린 정부가 선심성 행정에 대한 대책은 일언반구 없이 일부 극소수의 남수진자(의료쇼핑족) 때문에 재정이 악화됐다고 말하는 것은 그야말로 ‘오럴 해저드’(Oral Hazard)다.
생명의 영역에도 3등 국민 만드려는가
이런 정부의 인식은 결국 기상천외한 정책을 만들고 말았다. 즉, 일부 남수진자들의 진료를 제한하기 위해, 전체 의료급여 수급권자들의 진료권리를 통제하기로 한 것이다. 뼈대는 두 가지다. 우선 의료급여 1종 수급권자들은 과거처럼 무상진료를 받고 싶으면 한 달에 6천원의 사이버 머니(건강생활유지비)를 줄 테니 그 돈의 한도 안에서 다니라는 것이다. 동네 병원에 가면 1천원, 큰 병원은 2천원, 약국에 가면 500원씩 깎인다. 한 번 갈 때마다 최소 1500원이 드니 만약 네 번 이상 병원에 가려면 그때부터는 진료비를 모두 내야 한다. 병원에 더 자주 가야 하는 만성질환자는 한 병원을 정해놓고 그곳만 다녀야 한다. 지정 병원이 아닌 병원에 가려면 진료비를 모두 본인이 부담해야 한다. 이 두 요건은 섞일 수밖에 없는데, 사실상 의료급여 1종 수급권자들은 정해놓은 한 병원만 다녀야 본인 부담을 하지 않는다는 얘기나 마찬가지다. 1종 수급권자들은 지난해 기준 65만5천 명이다.
이 대목에서 오죽하면 정부가 그럴까 싶어서 고개를 끄떡였다면 나머지 설명을 좀더 들어주시길. 만약 이 제도가 이대로 시행되면 이렇게 된다. 고혈압 때문에 내과 병원을 선택병원으로 지정한 환자가 계단에서 굴러 다리가 부러져도, 이 환자는 내과를 가야 한다. 관절염이 심해 정형외과를 선택병원으로 정한 환자가 위암에 걸려 속이 쓰려도 정형외과에서 내시경을 받아야 한다(필자가 아는 한 내시경을 하는 정형외과는 전국에 한 군데도 없다). 안 그러면 다른 큰 병원에 가거나 정형외과 옆에 있는 내과에 가서 건강보험 대상자가 2만원 내고(본인부담금 30%) 받는 걸 본인은 전액인 6만원을 내고 받아야 한다. 사정이 이러하니 등짐을 지다가 디스크가 걸려 하루 걸러 한 번은 물리치료를 받지 않으면 밥벌이를 못하는 이들은 명함도 못 내민다.
정부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환자가 선택병원에서 의뢰서를 받으면 2차 병원(의원급이 아닌 병원급 의료기관) 한 군데를 추가로 지정해서 갈 수 있다.’ 하지만 다리가 부러진 환자가 아픈 다리를 끌고 내과에 가서 진료 의뢰서를 받은 다음 다시 2차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는다면 굳이 못할 일은 아니나, 사람이 할 일은 아니다. 이제 이 나라에서는 생명의 영역에서도 3등 국민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재정 절감도 거의 안되니 자충수일뿐
물론 백번 양보해서 의료급여 재정으로 나라가 망할 처지가 되어서, 굳이 그렇게라도 해야만 한다면 도리가 없을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이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재정절감액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정부는 ‘제도를 바꿔도 원래 90% 이상의 의료급여 환자들은 예전에도 한 달에 네 번 이상 병원을 가지 않았으니, 남수진자 외에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다’고 한다. 이것은 명백히 자충수다. 만약 정부 말이 맞다면, 남수진자들의 의료 행태를 조사하고, 청문 절차를 거쳐서 지정을 해제하든지, 자격관리를 강화하면 될 게 아닌가. 그것을 빌미로 전체 저소득층 환자들의 병원 이용을 제한하겠다니, 이거야말로 폭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사실 이 문제의 해법은 극히 단순하다. 정부가 일부 극소수 남수진자들을 제대로 관리하고, 지자체나 정부가 선심성 지정이나 부적격자의 지정을 취소하며, 감사원 지적대로 3년 동안 39억원의 예산을 낭비한 행정기관의 모럴 해저드를 바로잡고 그 돈으로 나머지 환자들에게 좀더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주면 된다. 이에 대한 정부의 책임 있는 답변과 해명을 거듭 요구한다.
<li> 추신:</li> 의사협회는 먼저 ‘거듭나겠다’는 약속을 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한 첫째 행동으로, 궁지에 몰린 수급권자들에게 과거처럼 무상으로 진료를 제공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정부는 무상으로 환자를 진료한다면 본인부담금은 물론 진료비 전액을 지급하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의료급여 환자의 90%는 진료 횟수가 줄어들지 않는다’는 정부 발표와 2만 개가 넘는 1차 진료기관 중 한 달에 300건 이상 급여자를 진료하는 병원이 고작 300개 이하라는 통계가, 새 제도가 의료기관의 경영에는 눈곱만큼의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의사협회는 협회 건물을 저당 잡히고 의사들이 병원을 팔고 천막으로 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수급권자의 무상진료를 계속할 것이다. 정부는 ‘의사들이 소외계층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대단한 발전이나, 부디 그 추세가 앞으로도 이어지기를 바란다는’ 냉소적인 성명을 발표하면서 불편한 심기를 표출했다. 정부가 이 제도를 밀어붙인 또 다른 명분인 ‘일부 의사들의 허위 부당 청구나 남수진 조장 행위’가 발생한다면 이런 회원들을 의사협회에서 먼저 제재하고 법적인 처벌을 강력하게 요구할 것임을 밝혀둔다.
여기까지가 의사협회 안에서 지금까지 진행된 일이다. 하지만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봐야 할 게 있다. 의사들의 말이 진정성을 가지려면 ‘통렬한 반성’이라는 전제를 재확인해야 한다. 그동안 의사들은 진료실에 틀어박혀 세상의 변화에 둔감했다. 사회는 민주화와 개방화를 이루면서 눈부실 정도로 빠르게 변화했다. 하지만 의사들의 행보는 굼떴으며, 그 과정에서 제대로 기여를 하지 못한 책임이 있다. 그래서일까. 국민들은 세상에 나서 가장 먼저 만나는 얼굴이자, 생의 가장 마지막을 지키는 존재인 의사들을 오히려 멀리한다. 환자와 의사는 가장 가깝고 친근해야 정상이다. 세상에서 가장 큰 고민을 함께 나누는 사이이기 때문이다. 의사들은 이번 일을 시발로 앞으로 사회에서 아프고 병든 사람들을 부축해주고 손을 잡아줄 숙제를 안게 됐다. 그래야 지금의 목소리가 정당성을 갖는다. 만약 그러지 못한다면 사람들은 의사들에게 또 한 번 속았다고 생각하면서 영원히 등을 돌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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