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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호구 싸움은 누가 말리나

등록 2007-07-06 00:00 수정 2020-05-03 04:25

태권도 판정 시비 해소하려 도입한 전자호구가 더 말썽, WTF의 ‘큰일 날’ 계약

▣ 최은주 기자 flowerpig@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전자호구를 도입해 판정 시비를 해소하겠다.”

2005년 7월 싱가포르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 태권도가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남기로 결정된 직후, 조정원 세계태권도연맹(WTF) 총재가 한 말이다. 전자호구란, 말 그대로 호구(몸을 보호하는 기구)에 전자센서 시스템을 장착한 것이다. 태권도 경기에서 상대방을 쳤을 때 센서가 이를 인식하고 점수를 측정하는 시스템이다. 전자호구 도입은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심판의 판정 시비를 잠재울 대안으로 꼽혀왔다.

‘올림픽 종목 퇴출 위기’에서 태권도를 구하기 위해 WTF가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주요 개혁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렇게 야심차게 추진된 전자호구제가 오히려 태권도의 미래를 암울하게 만들고 있다. 전자호구 업체 선정 과정에서 공정성 논란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의 발단은 WTF가 ‘라저스트’(Lajust)라는 전자호구 회사와 2006년 9월11일 독점적으로 공인 계약을 체결하면서 시작됐다. 이 단독 입수한 ‘WTF-라저스트사 계약서’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WTF는 협정 기간 동안 라저스트의 전자호구를 승인하고, 라저스트사를 ‘독점적인’ 전자호구 스폰서로 임명한다. △WTF는 WTF가 인가하고 주최하는 경기에 ‘오직’ 라저스트사의 전자호구만 사용하도록 조치를 취할 것이다. 올림픽 경기에서도 오직 라저스트사의 전자호구만 추천할 것이다. △라저스트사는 WTF에 승인료와 협찬료로 100만달러를 지불해야 한다. 라저스트사는 30만 개 이상의 제품을 판매했을 때 25만달러, 70만 개 이상의 제품을 판매했을 때는 50만달러를 WTF에 줘야 한다. 라저스트는 제품 1개당 3달러씩 WTF 기금으로 제공해야 한다. △계약 승인은 2007년 5월18일부터 5년간이다. WTF와 라저스트사의 상호 동의가 있으면 계약은 5년 동안 자동 연장된다.

계약 사실 감추고 다른 업체 시연회

이런 계약을 체결하고도 WTF는 계약의 자세한 내용을 언론은 물론, WTF 부총재와 관계자들에게도 공개한 적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오히려 이런 계약 사실을 감추고 지난 1월12일 ‘아디다스’(Adidas), ‘대도’(Daedo) 등 다른 전자호구 업체가 참가한 전자호구 시연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또 이 회사들의 제품을 한국체육과학연구원(KISS)에 보내 검사받도록 했다. 다른 업체들도 전자호구 업체로 선정될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한 것이다. 그러나 양진석 WTF 사무총장은 6월22일 과의 인터뷰에서 라저스트사와의 독점 계약 사실을 부인했다. “당시 라저스트 제품도 WTF 연맹의 기준에 미달됐기 때문에 완전한 제품을 기다리고 있어요. 전자호구 시연회를 하기 위해 (일단 라저스트사를) 공인한 것뿐입니다. 다른 회사도 (공인받을) 기회가 있습니다.”

이런 양 사무총장의 발언은 독점 계약서 내용과 배치되는 것이다. 은 이를 확인하기 위해 계약서에 사인을 한 조정원 총재에게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뚜렷한 이유 없이 거절당했다. WTF는 왜 라저스트사와 독점 계약을 체결한 사실을 부인하는 것일까.

지난 3월4일 춘천에서 열린 ‘전자호구 국제태권도대회’를 보면 WTF가 계약 사실을 숨기려 한 이유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이 대회에서 태권도 선수들은 라저스트사의 전자호구를 입고 경기를 치렀다. 하지만 평가는 좋지 않았다. 이날 라저스트사의 전자호구는 정확하지 않은 가격에도 점수가 인정되는 등 많은 결함을 드러냈다. WTF는 기술적인 문제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여론의 질타를 받게 됐다. 결국 WTF는 전자호구 도입 시기를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2009년 세계선수권대회로 미뤄야 했다. 기술적인 문제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WTF는 이런 전자호구를 공인 계약했다는 사실을 밝히기 어려웠을 것이다.

WTF가 공인 계약에 필요한 절차를 무시하고, 심사위원 선정도 주먹구구로 이뤄졌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WTF 규정을 보면 공인 계약을 체결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절차를 거쳐야 한다. 우선 ‘전자호구 특별위원회’가 태권도 경기 규칙에 전자호구를 적용할 수 있는지 검토한다. 전자호구의 완성도(타격 강도 측정의 정확성, 연속 타격 득점의 정확성, 타격 강도 조절 기능, 유효타격 기술과 무효타격 기술의 구분 기능)에 대한 위원들의 합의가 이뤄지면 KISS에 전자호구를 보낸다. KISS에서 호구의 기계적인 부분을 검증하고 ‘필드테스트’를 거친다. 마지막으로 ‘모의 경기’를 갖고 위원회의 인정을 받으면, 그때서야 비로소 WTF는 전자호구를 공인할 수 있다. WTF의 한 관계자는 “KISS가 전자호구를 제대로 검증했는지도 알 수 없고, WTF는 필드테스트를 거치지도 않은 채 바로 공인 계약서를 체결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이어 “WTF가 한 전자호구 업체에 유리하게끔 심사위원들을 선정했다”고 말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2005년 7월에 만들어진 전자호구 특별위원회는 7명의 심사위원으로 구성됐다. 2005년 7월20일 열린 전자호구 1차 시연회에서 심사위원 7명 중 4명은 아디다스의 전자호구가 제일 우수하다고 판단했고, 나머지 3명은 라저스트 전자호구가 더 낫다고 보았다. 이 관계자는 “그런데 WTF가 2006년 2월7일 갑자기 심사위원 두 명을 추가하면서, 결과가 뒤집히게 됐다”고 말했다.

5(라저스트) : 4(아디다스)로 통과

그 결과 2006년 3월25일 2차 시연회에서 9명의 심사위원 중 5명이 라저스트사에 손을 들어줘 5(라저스트) : 4(아디다스)로 라저스트 전자호구가 통과할 수 있었다. 사실 확인을 위해 은 현재 한국에 있는 4명의 심사위원을 접촉했다. 계약서를 직접 봤는지, 필드테스트를 했는지를 물어보았다. 4명 모두 계약서를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필드테스트에 대한 답변은 제각각이었다. 박수남 WTF 부총재 겸 전자호구 특별위원회 위원장은 “내가 WTF 부총재이지만 전자호구 계약서를 보지 못했고, 필드테스트도 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양진방 대한태권도협회 기획이사는 “필드테스트를 거쳤는지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황종학 KISS 연구원은 “지금 하고 있는 모든 것이 필드테스트의 과정이다”라고 밝히며 말을 아꼈다. 박현섭 국기원 교학처장은 “춘천 대회 때 라저스트사 전자호구의 필드테스트를 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WTF의 ‘전자호구 일지’를 보면, ‘전자호구 시연회’를 한 기록은 있어도 필드테스트를 한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 한 WTF 관계자는 “필드테스트란 진짜 경기와 같은 조건에서 전자호구를 테스트하는 것”이라며 “필드테스트란 말을 명시하지 않았지만 3월4일 춘천 전자호구대회가 필드테스트였다”고 말했다. 문제는 그 관계자의 말처럼 3월4일에 필드테스트를 했다 하더라도, 이미 6개월 전에 계약이 체결된 상태라는 것이다. WTF는 이 모든 과정이 담겨 있을 전자호구 특별위원회의 회의록과 평가안 공개를 거부했다. 양진석 사무총장은 “4개 회사를 놓고 경합을 했는데 라저스트가 38점, 아디다스가 36점, 나머지 회사들이 각각 30점을 받아서 라저스트사가 선정됐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는 “(회의록과 평가안 등) 내부 문서는 공개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한 번 차면 9점씩… 어떻게 공인하나”

뒤늦게 라저스트사의 독점 계약 사실을 알게 된 아디다스는 크게 반발하고 있다. 양진석 사무총장이 (6월11일치)에 “아디다스가 전자호구 공인을 받기 위해 전방위 로비를 펼치며 부당한 압력을 행사했다”고 말한 보도가 나오자, 격앙된 분위기다. 양 사무총장은 이 기사에 대해 “오보였다”고 해명했지만, 정정보도를 요청하지는 않았다.

프랭크 마이어 아디다스 이사는 과의 서면 인터뷰에서 “독점 계약을 할 거면서, 아디다스 제품을 KISS에 검증받을 권리는 왜 줬냐”고 반문하며, “아디다스 전자호구가 어떤 기준에서 실패했는지 알려달라고 WTF에 수차례 요구했지만 대답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조정원 총재가 라저스트사 사업에 개인적으로 관여했다는 얘기를 여러 사람에게서 들었다”고 주장했다.

아이다스는 조만간 이 상황과 관련해 IOC에 공식 문서를 보내고 자크 로게 위원장의 면담을 요청할 계획이다. 마이어 이사는 “우리는 이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장래의 ‘중요한 결정’을 미루도록 IOC를 설득할 것이다.” 그가 말하는 ‘중요한 결정’이란 태권도가 올림픽 종목으로 계속 채택될지 여부를 뜻한다. 현재에는 2012년 런던올림픽까지만 채택돼 있다.

아디다스가 발끈한 이유는 ‘절차상의 문제’ 때문만은 아니다. 전세계의 태권도 인구는 182개국 6천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 중 선수 수련 인구는 100만 명으로 본다. 전자호구는 개당 30만원꼴로, 만약 선수 수련 인구가 이를 하나씩 갖는다면 시장 규모는 대략 3천억원에 달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일반적으로 국제스포츠기구는 한 업체에만 독점적인 공인권을 주기보다는 여러 업체의 제품을 복수로 공인하는 게 관행이다. 김운용 전 IOC 부위원장 겸 전 WTF 총재는 “우리 때는 독점이라는 게 없었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 때에도 태권도 도복을 여러 업체가 만들 수 있도록 공인해줬다”고 말했다. 김 전 총재는 이어 “(내가 총재할) 당시에도 전자호구 회사의 압력이 많았어요. 한 전자호구 회사에서는 ‘공인만 먼저 해달라’고 조르는데, 한 번 찰 때마다 9점씩 올라가는 걸 어떻게 (공인) 해줘요. 잘못했다가는 큰일 나지”라고 말했다.

WTF의 ‘큰일 날’ 계약은 전자호구만이 아니다. WTF는 지난 6월17일 베이징 WTF 총회에서 ‘품새경기복(도복) 공인업체 선정’에 대한 안건이 통과되기 전인 5월26일 ‘샤크’라는 홍콩 기업과 공인 계약을 맺었다. WTF의 ‘내 맘대로, 묻지마 공인 계약’이 이어지는 한, 태권도의 미래는 암울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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