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에버랜드 고발에 앞장선 곽노현 교수 “증거는 인멸해도 기억은 못 지워”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1심 판결 때도 그랬지만, 2심 판결에 즈음해서도 제일 먼저 떠올리게 되는 얼굴은 그였다. 1심 판결이 나온 2005년 10월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답은 거절이었다. 맡고 있는 직책 탓에 적절치 않다는 이유를 들었다. 당시 그는 국가인권위원회 사무총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2심 판결을 하루 앞둔 5월28일 저녁에 연결된 전화 통화에서 다시 인터뷰 요청을 했다. 이번엔 선선한 수락이었다. 다만, 공소장과 1·2심 판결문을 훑어봐야 하기 때문에 시간을 달라고 했다. 처음엔 판결 다음날 오전으로 약속을 잡았다가 강의 일정에 얽혀 하루를 더 미뤄 인터뷰가 이뤄졌다.
정족수 미달됐던 이사회부터 ‘원천 무효’
지난 2000년 6월 삼성그룹 불법·변칙 승계 의혹의 핵심인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CB) 헐값 발행 사건’을 검찰에 고발해 공론화한 전국의 법학 교수 43명 대열의 맨 앞에 서 있었던 기억이 되살아나서였을까. 인터뷰 장소인 한겨레신문사 4층 회의실로 들어서는 곽노현(53) 방송통신대 교수(법학)는 좀 고무된 듯 보였다.
공소시효 만료를 딱 하루 앞둔 2003년 12월1일 검찰의 기소가 이뤄지는 것을 비롯한 몇 번의 ‘기적’ 같은 일들을 겪은 뒤 1심 유죄 판결에 이어 2심에서도 에버랜드 전·현직 사장인 허태학·박노빈씨는 유죄 판결을 받았다. 두 사람이 1심보다 높은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과 벌금 30억원을 각각 선고받은 사실은 이미 보도된 대로다.
소감이 남달랐을 것 같다는 질문에 운을 뗀 곽 교수는 “1·2심 판결 모두 환영할 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가 2심 판결에서 특히 주목하는 대목은 전환사채 발행을 결의한 1996년 10월30일의 에버랜드 이사회가 정족수 미달로 무효라고 확인한 점이다. 1·2심 판결문이 모두 당시 에버랜드 이사회에 17명의 이사 가운데 8명만 참석했음을 확인하고 있지만, “2심 재판부는 특히 이 점을 붙들고 늘어진다. 절대 무효인 이사회 결의에 입각해 이뤄진 모든 후속 조처(이건희 →이재용으로 이어지는 승계)도 무효라는 속내를 곳곳에서 드런낸다. ‘후계자’ 이재용은 원천 무효 위에 쌓아올린 ‘모래성’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다.”
곽 교수는 그러면서도 “이 사건은 ‘전초전’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법학 교수들이 고발을 할 때는 ‘몸통’을 이건희 회장으로 봤는데, 재판정에 선 이들은 ‘깃털’인 두 전문경영인뿐인 현실을 일깨우는 발언이다. “‘주범’이 빠진 채로 진행된다는 점에서 (유죄 판결에도) ‘큰 정의’는 없는 게 아닌가 싶다. 이대로 끝나면 위선이고 코미디일 뿐이다.”
‘도마뱀 꼬리 자르기’냐 ‘불쏘시개’냐
2심 판결 뒤 삼성그룹 안팎의 최대 관심사는 검찰의 칼끝이 이건희 회장으로 향할지에 쏠려 있다. 에버랜드 전·현직 사장에 대한 유죄 판결을 두고는 ‘도마뱀 꼬리 자르기’라는 관측과, 이 회장으로 옮아갈 ‘불쏘시개’라는 전망이 맞서 있다. 곽 교수의 견해는 어떨까?
“검찰 수사와 1·2심 판결은 허태학·박노빈 두 사람의 배임행위를 확인한 선에서 그쳤다. 두 사람이 무슨 동기로 배임을 했는지, 두 사람의 배임이 그룹 차원의 후계구도 구축의 일환이었는지, 배후에 이건희 회장의 개입과 그룹 차원의 공모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추가 수사와 추가 기소가 불가피하다.” 그룹 차원의 조율과 협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룹 회장, 에버랜드의 모든 이사들, 에버랜드 법인 주주의 사장들에 대한 소환 조사는 너무나 당연한 절차라는 것이다.
곽 교수는 그룹 차원의 공모를 보여주는 정황 증거는 숱하게 많다고 밝힌다. 그가 흥미롭게 보는 정황 가운데 하나는 에버랜드와 중앙일보의 대주주가 거의 동시에 뒤바뀐 1996년 10월의 ‘사건’이다. 이는 1심 판결문에 적시돼 있는 것이었음에도 그다지 주목받지 않은 채 간과돼왔던 사실이다. 그 내용은 이렇다.
당시 에버랜드의 대주주는 48% 지분을 가진 중앙일보. 반면 중앙일보의 대주주는 26.44%를 가진 이건희 회장이었다. 중앙일보는 1996년 10월26일 30억원 규모의 전환사채를 발행했다. 이건희 회장 등 기존 주주들이 일제히 인수를 포기하고 모두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에게 몰아줬다. 그 결과 홍 회장은 지분 0.58%의 군소 주주에서 졸지에 21.51%의 최대 주주가 됐다.
나흘 뒤인 10월30일, 이번에는 에버랜드가 전환사채를 발행했다. 중앙일보 등 기존 주주들이 일제히 인수를 포기하고 모두 이재용 남매에게 몰아줬다. 그 결과 이재용 남매는 무지분 상태에서 졸지에 64%를 가져 최대 주주가 됐다. “이게 그룹 차원의 기획과 공모 없이 우연히 일어날 수 있겠는가. 이거야말로 이건희 회장이 몸통이라는 결정적 증거다. 그룹 핵심 계열사 중 하나인 에버랜드의 지배주주를 중앙일보에서 이재용으로 바꾸고 싶고, 바꿀 수 있는 게 누군가? 허태학 사장인가, 이건희 회장인가? 중앙일보의 지배주주를 이건희 회장에서 홍석현 회장으로 바꿀 수 있는 게 누군가? 허태학 사장인가, 이건희 회장인가? 중앙일보를 넘겨주고 에버랜드를 넘겨받는 빅딜 공모의 당사자가 누군가? 이건희 회장과 홍석현 회장인가, 아니면 허태학 사장과 박노빈 전무인가? 허태학·박노빈 두 사람은 하수인일 뿐이다.”

곽 교수가 드는 또 하나의 유력한 정황 증거는 1996년 10월 당시 에버랜드의 전환사채 발행이 사전계획 없이 갑작스레 쫓기듯 추진됐다는 점이다. 검찰 수사와 법원 판결에 따르면 에버랜드는 월 단위, 분기 단위, 연 단위 자금조달 계획을 수립했는데 문제의 전환사채 발행은 어디에도 들어 있지 않다. 특히 ‘96. 9. 25.자 96년 10월 자금계획서’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10월 중순께 박노빈 전무의 100억원 긴급 자금조달 지시와 10월30일 이사회는 느닷없는 것이었다. 더욱이 당시 에버랜드의 신용등급이 최상급(A3)이었기 때문에 금융기관 차입이 아닌 전환사채 방식으로 긴급자금을 조달할 이유는 없었다는 것이 법원의 판단이다. 곽 교수는 에버랜드 내부 입장에서 볼 때 이렇듯 급작스럽고 불필요한 자금조달 계획 역시 회사 차원을 뛰어넘는 외부 ‘윗선’의 개입과 지시가 있었다는 유력한 정황증거라고 역설했다.
에버랜드는 왜 직접 주식을 발행하지 않고 전환사채를 발행한 것일까? 또한 그 시점이 96년 10월인 건 순전히 우연일까? 곽 교수의 설명은 이렇다. “상속증여세법에 ‘증여간주 조항’이란 게 있어서 거기에 해당하면 증여세를 내야 한다. 당시에도 주식 발행으로 부당이득을 취하면 증여로 간주됐지만 전환사채 발행에 의한 실질증여에 대해서는 간주 조항이 없었다. 그런데 96년 10월 초에 전환사채 방식의 실질 증여에도 세금을 매기는 내용의 상속증여세법 개정안이 입법 예고됐다. 증여세를 내지 않고 지배지분을 넘겨주려면 서둘러 막차를 타야 했다. 특히 당시 에버랜드 주식은 상속증여세법상 평가액이 23만원을 넘었기 때문에 적법하게 세금을 내고서는 지배지분 획득이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었다.”
불필요하고 급작스런 자금조달 시킨 자는?
이런 정황증거는 그야말로 정황일 뿐 물증이 없다면 처벌의 실마리로 삼기는 어려운 게 아닐까? 곽 교수도 이 대목에선 답답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에버랜드 사건의 개요에 접하는 즉시 조직적 배임범죄의 산물임을 확신했다. 사건 발생 5개월 만인 1997년 5월에는 민교협(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민주노총 공동 심포지엄을 열어 본격적인 공론화를 시작했다. 그때쯤에는 모든 언론에서 이재용 후계구도 구축 흐름도가 다 나온 상태였다. 이렇게 공지의 사실이었는데, 검찰은 인지 수사를 하지 않았다. 에버랜드에 대해 고발장을 내니 에버랜드건만 마지못해 수사하고, 본질적으로 똑같은 ‘삼성SDS 주식인수권부사채(BW)건’은 지금껏 수사하지 않고 있다.” 사건 발생 10년을 넘겼으니 관련 문서는 다 없어졌을 것 아니냐는 안타까움의 토로다.
“핵심 관련자들 소환하면 진실 밝혀질 것”
곽 교수는 그러면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그는 “증거는 인멸할 수 있어도 기억을 지우지는 못한다”고 했다. “보통 사건 같으면 10년이 지나면 기억에서 지워지고 긴가민가하지만, 이 사안은 발생 5개월 뒤부터 지속적으로 공론의 장에서 문제가 돼왔기 때문에 관련자들은 절대 잊을 수 없다. 이 사람들(이건희 회장 등)을 모두 소환해서 본격적으로 수사하면 쉽사리 빠져나가지 못한다. 삼척동자도 알 수 있을 만큼 맥락과 실질이 뻔하기 때문이다. 에버랜드 CB 발행과 삼성의 경영권 승계가 무관하다는 주장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이다. 중요한 건 핵심 관련자들을 반드시 불러서 조사해야 한다는 거다. 그러면 지금에라도 총체적 진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건희 회장에 대한 검찰의 기소 여부와 시기만큼이나 관심을 집중시키는 대목은 이재용씨를 중심으로 짜여지고 있는 삼성그룹의 권력 구도에 에버랜드 사건이 어떤 변화를 불러일으킬 것인가 하는 점이다. 검찰의 수사가 훨씬 더 진전돼 그룹 차원의 공모였음이 드러난다고 하더라도 실정법의 한계 때문에 이재용씨의 기반이 쉽사리 흔들리지는 않을 것이란 시각이 우세한 편이다. 사건이 벌어진 지 11년이나 지나 민법상 손해배상을 위한 공소시효(10년)를 넘겼기 때문이다.
곽 교수는 이런 ‘법 현실론’을 강하게 비판한다. 에버랜드 전환사채 인수 등을 통해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수조원으로 추정되는 재산을 갖게 된 이재용씨가 국가에 낸 세금이 16억원뿐이라면 그 재산은 일종의 ‘장물’이라는 것이다. 제값을 주고 산 것도 아니니, 정당한 세금을 낸 증여도 아니니 훔친 물건일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곽 교수는 “에버랜드 사안은 물론이고, 이재용씨가 삼성그룹의 지배주주로 되는 과정을 전체적으로 보면 이게 이재용을 위해 예비된 우연이나 행운의 연속일 수 없다는 것, 몇몇 전문경영인의 과잉 충성 작품일 수 없다는 것, 오직 그룹 총수의 뜻에 따라 기획과 조율을 담당한 컨트롤 타워가 있을 때에만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이 명백하다”고 말했다.
“진실이라는 게 유용하고 힘이 있어서 진실을 얻는 데는 비용이 든다. 특히 금력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진실을 호도하고 은폐하려 할 때 진실을 파헤치는 데는 사회적 비용이 더 많이 든다. 하지만 그 진실이 국내 최대 재벌의 권력 승계의 적법성 같은 중대한 공공성에 관한 것이라면 어떤 사회적 비용을 들여서라도 진실을 밝혀야 한다. 그래야 법이 살고 해법이 나온다. 총체적 진실과 건전한 법 감정이 가리키는 방향대로 가면 된다.” 곽 교수는 에버랜드 사건의 의미를 “법치주의에 입각한 경제 분야의 과거 청산 과제 중 하나로 경제 법치주의 확립의 분수령”으로 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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