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사학의 ‘주인 놀이’ 개혁은 퇴보하나

등록 2007-05-31 00:00 수정 2020-05-02 04:24

“상지대 정이사진 선임에 김문기 전 이사장 의견 들으라”는 대법원, 그 의미는

▣ 원주=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대법원의 ‘상지대 판결’은 되돌릴 수 없다. 대한민국 헌법이 정한 최고 법원의 판결은 호오(好惡)의 대상일 순 있어도, 선택의 대상은 될 수 없다. 대법원은 지난 5월17일 전원합의체(주심 김황식 대법관)를 열어 비리로 퇴진했던 김문기(75) 전 상지대 재단 이사장(전 한나라당 의원)이 “정부가 임명한 임시이사들이 정식이사를 선임한 것은 무효”라며 낸 소송에서 김씨의 손을 들어줬다. 그 판결로 2003년 12월 정이사로 뽑힌 변형윤 이사장, 박원순 아름다운재단 이사, 최장집 고려대 교수 등 상지대 이사 9명은 자격을 상실했다.

대법원장을 포함한 대법관 13명의 의견은 8 대 5로 갈렸다. 통상 다수 의견을 따르게 되는 이용훈 대법원장의 한 표를 빼고 나면 12명 대법관들의 의견은 7 대 5로 상당히 팽팽하게 맞선 셈이다. ‘다수 의견 →소수 의견 →소수 의견에 대한 다수 쪽 대법관들의 반박 →그에 대한 소수 쪽 대법관의 재반박’으로 이어지는 A4용지 45장 분량의 대법원 판결문은 우리 사회에서 사립학교의 위상과 지향점이 무엇인가를 두고 수십 년 동안 이어진 보수와 진보 양 진영의 공방을 축약해놓은 듯한 느낌을 준다. 대법관 다수는 “사립학교 설립의 자유와 운영의 독자성을 보장하는 것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본질적 요체”이기 때문에, (기존 이사진들에게 잘못이 있다 해도) “학교 경영을 정상화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학교법인을 운영할 권한과 임무가 손쉽게 제3자에게 넘어가”면 안 된다고 판단했다. 소수는 “다수 의견은 학교 법인의 자주성에 지나치게 경도된 견해로서 임시이사 제도를 비롯한 학교법인의 공공성 강화를 위한 각종 제도 자체를 부인하는 것으로 귀착될 염려가 있다”고 맞섰다. 자율성과 공공성의 대결에서 공공성이 고배를 마신 셈이다.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 전국대학노동조합, 민주화를 위한 전국 교수협의회,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등은 잇따라 성명을 내 “이번 판결은 사학 비리를 저지른 당사자에게 면죄부를 준 것”이라며 판결을 강력히 비판했다.

진보 진영에서는 왜 그렇게 흥분한 것일까. 이는 학원 민주화운동에서 상지대가 자리하는 독특한 위치 때문이다. 상지대 전 이사장 김문기씨는 1974년 고 원흥묵 선생이 설립한 원주대학을 인수해 그 이름을 상지대학으로 바꾸면서 ‘부패사학의 화신’으로 거듭났다. 그가 저지른 ‘비리 종합선물세트’에는 △부정 편입학 △친·인척 가짜 박사 교수 임용 △봉급 포기각서 강요 △공금 횡령 △학원을 이용한 땅 투기 등 통상적인 범죄 행위뿐 아니라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엽기적인’ 행각도 있다. 그는 1986년 강사 채용에 1천만원을 요구한 비리가 밝혀져 궁지에 몰리자 그해 10월14일 밤 본관 앞에 “김일성 수령님” “가자, 북의 낙원으로!” 등등의 내용을 담은 유인물을 뿌려 학생들에게 붉은 낙인을 찍으려 했다. 이 ‘상지대 용공조작 사건’은 당시 학생과 직원이던 김황일씨의 양심 선언을 통해 전모가 드러났고, 1999년 12월23일 강원경찰청은 불온 유인물이 학교 쪽 교직원들에 의해 제작 살포됐음을 확인하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물론 김문기씨는 자신의 개입 여부를 부인하고 있다. 그는 결국 1993년 4월 문민정부 들어 몰아친 사정 바람에 몰려 구속된 뒤 부정입학 부분이 유죄로 인정돼 대법원에서 1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상지대 옛 재단이 도서관 장서를 헌책방에서 무게로 달아 사들였다는 ‘전설’은 차라리 애교에 가깝다.

판결문에 축약된 보수 대 진보의 공방

김씨가 쫓겨난 상지대를 정상화한 것은 한완상·강만길·김성훈 등 명망가들로 이어져 내려온 총장과 임시이사들이었다. 그들은 1993년 6월부터 상지대를 경영했다. 2003년 12월 상지대 임시이사회는 마침내 상지대를 정상화할 것을 결의하고, 변형윤 서울대 명예교수를 이사장으로 하는 9명을 정이사로 선임한다. 그사이 상지대는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해 김문기씨가 물러나기 직전인 1992년 현재 114명이던 교수 인원이 2005년 현재 224명으로, 학생 수는 1550명에서 2236명으로, 장학금 수혜율은 7.2%에서 25.9%로 각각 늘었다. 부패 사학이 중부권의 명문 사학으로 변한 것이다.

이번 판결의 파급력은 어느 정도일까. 대법원 판결의 핵심은 “학교법인의 임시이사가 정이사를 선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임시이사가 파견된 대학들을 정상화하는 기준이 되는 것은 2005년 12월 개정된 사립학교법 25조 3항이다. 새 정이사를 뽑는 권한은 교육인적자원부에 있고, 교육부는 그 과정에서 (학교 법인에) 상당한 재산을 출연하거나 학교 발전에 기여한 자 그리고 대학평의원회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 즉, 교육부는 김문기 전 이사장 쪽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의견을 들으라’는 말이 꼭 ‘김씨 쪽 인사를 이사진에 포함하라’는 뜻은 아니지만, 김황식·박일환 대법관은 “이를 배제할 이유가 없다”고 밝혔다. 대법원 판결이 “김씨에게 학교를 돌려줘야 한다”고 못박았다고 하긴 힘들겠지만, 그가 학교로 복귀할 길을 터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옛 재단의 소송’에 기름 부은 꼴

조석곤 상지대 교수협의회 대표는 “김씨 등은 학교에 상당한 재산을 출연하거나 학교 발전에 기여하지 않았다”며 “김씨 쪽 인사가 학교로 돌아오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교육부가 김씨 손을 들어줄 경우 상지대 쪽이, 반대의 경우라면 김씨 쪽이 소송을 제기할 게 불보듯 뻔하다. “상지대학교 학생 여러분. 이제 길거리로 나가지 않아도 됩니다.” 5월23일 취재진이 찾은 상지대 정문 앞에는 ‘상지학원·상지대학교 설립자 김문기 복귀위원회’가 붙여둔 펼침막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상지대는 기약 없는 교내 분쟁으로 바람 잘 날 없을 것이다.

“사학은 주인 있는 재산” 자율성에 타격

다른 학교 쪽으로 미칠 파급 효과는 어떨까. 상지대처럼 임시이사가 정이사를 뽑은 학교는 상지대를 포함해 서원대·단국대·극동대·한국외대·한성대·고신대·경인여대 등 8곳이다. 정병걸 교육부 사립대학지원과장은 “이들 대학은 상지대와 달리 정이사를 뽑는 과정에서 옛 재단 쪽 의견을 수렴했다”고 말했다. 판결로 직접적인 영향을 받진 않겠지만, 현재 이사진 구성에 불만을 느낀 옛 재단 쪽 관계자들의 소송이 제기될 가능성은 훨씬 커졌다. 한국외대 관계자는 “당장 어떤 움직임이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신경이 쓰이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아직 임시이사 체제로 운영되고 있는 학교들은 경기대·광운대·세종대·덕성여대·대구대·영남대·조선대 등 전국 4년제 대학 12곳과 전문대 9곳이다. 이 가운데 영남대의 전 이사장은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다. 한정이 전국교수노조 정책국장은 “안 그래도 임시이사 체제인 학교들은 옛 재단 쪽의 끊임 없는 소송 제기로 위축돼 있는데, 그 흐름에 기름을 부은 꼴”이라며 “대법원이 부정비리 당사자에게 면죄부를 주는데 누가 사학 비리에 항거하겠냐”고 말했다. 최재성 열린우리당 의원이 2005년 10월 발표한 보고서 ‘임시이사 대학 실태와 개선 방안’을 보면, 임시이사가 파견된 전체 사학법인 가운데 옛 법인이 재판을 걸어온 경우는 전체의 절반 정도인 49.2%인 것으로 조사됐다. 그 흐름은 더 가속화될 것이다.

이게 다일까. 최종 결론을 내기까지 대법관들이 동원한 논리로까지 눈을 돌려보면, 이번 판결이 갖는 파급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대법관의 다수 의견은 “사립학교 운영의 독자성을 보장하는 것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본질적 요체”이고 “임시이사는 위기관리자”이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정이사를 뽑으면 “학교법인을 운영할 권한과 임무가 손쉽게 제3자에게 넘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제3자’가 있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공익적 성격을 갖는 학교법인의 ‘주인’이 있음을 염두에 둔 말이다.

진보 진영이 앞으로의 공세 이겨낼까

이는 양승태 대법관의 보충의견에서 좀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는 “학교법인에는 적지 않은 기본 재산이 있게 마련”이라며 “임시이사가 정식이사를 선임함으로써 사학의 운영주체가 변경되는 것은 재산의 귀속 주체에 실질적인 변경이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즉, 사학법인은 주인이 있는 ‘재산’이기 때문에 그 주인이 설사 잘못을 저질렀다고 해도 이사회의 구성과 조직을 주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바꾸는 것은 사학의 자율성에 심각한 타격을 줘 헌법이 보장하는 교육의 자주성이 위태롭게 된다는 논리다. 이런 인식은 사학 비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 사회가 20년 전부터 도입해온 임시이사제도와 2005년 12월 개정 사학법으로 도입된 개방형이사제도에 대한 정면 부정으로 이어진다. 보수 진영에서 되풀이해 말하는 ‘개방형 이사 선임 →학내 분규 조장 →재단 형사고발 →교육부의 임시이사 파견 →재단 축출’의 도식에 대법관들이 공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대법원의 시각은 6월로 예정된 사립학교법 재개정과, 대법관들과 비슷한 성향의 법률가들로 구성된 헌법재판소 위헌 결정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대법원 폭풍이 휩쓸고 간 상지대는 낮게 웅크려 있었다. 학생들은 판결이 있던 5월17일 밤에는 촛불을 켜고 모였고, 5월23일에는 동악관 1106호 강의실에서 토론회도 열었다. 김선광 부총학생회장은 “김문기씨가 우리 학교에서 어떤 일을 해왔는지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법원의 판결은 김씨의 축출 이후 15년 동안 진행돼온 사학 민주화 흐름이 거센 도전을 받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머잖아 사학법 재개정과 헌법재판소 결정이 뒤따를 것이다. 사분오열돼 지리멸렬해진 진보 진영이 그 공세를 받아낼 수 있을까. “사학의 주인이 누구인가”에 대한 대법원의 해석은 이후 한국 사학의 정체성과 나아갈 바를 규정하는 판례를 남겼다는 점에서, 우리 일상에 드러나는 것보다 더 근본적이고 치명적인 해악을 끼쳤다는 비판을 면하기 힘들어 보인다.



“정의로운 판결이었다”

김문기 전 상지대 이사장 인터뷰

예상한 대로 말을 아꼈다. “바쁘실 텐데 전화를 다 주시고….” 김문기 전 상지대 이사장은 과의 통화를 불편해했다. 은 646호(2월6일치)와 661호(5월21일치)에서 ‘상지대 사태’를 다뤘지만, 그의 입맛엔 맞지 않은 듯했다.
어렵사리 대화를 이어가며 5월17일 나온 대법원 판결의 의미를 되묻자, “자주성과 사학의 모든 헌법상 권한을 재확인해주는 판결이다. 이 나라의 대법원장이 재판장이 돼서 결정한 일인데 무슨 말을 더 할 필요가 있겠냐”고 그는 말했다. 판결이 나온 뒤 여러 차례 한 말이기도 하지만 그는 “법과 양심이 살아 있는 사회다. 정의로운 판결이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정의로운 판결’이 나오기 전까지 근신했다.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교에도 행차를 삼갔다. 지난해 11월 상지대 정문 준공식에 갔지만, 교수·학생·교직원들의 저지로 행사에 참석할 수 없었다. 누구도 그를 ‘(옛) 주인’으로 대접하지 않았다. 이제 그는 “오직 초심으로 돌아가서 상지대가 우수하게 번영·발전할 수 있도록 후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주인’처럼 당연하게 말했다.
그의 앞으로 행보가 궁금했다. 대법원은 상지대가 정이사 체제로 가는 과정에 김 전 이사장의 의견을 듣도록 판시했다. 그는 “(교육부나 학교가) 어떻게 하는지 두고 볼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기대가 어디까지 충족될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교육부가 그의 의견을 무시할 순 없다. 하지만 그의 의견의 몫은 “(정이사의 선임은) 상당한 재산을 출연하거나 학교 발전에 기여한 자 및 학교운영위원회 또는 대학평의원회의 의견을 들어 관할청이 선임한다”(사학법 제25조3)는 조항으로 제약돼 있다. 기여도란 쉽게 계량화할 수 없다. 되레 학교 발전을 저해한 측면이 클 수도 있다. 그의 재산 출연도 미미하다. 이름을 밝히길 꺼린 상지대의 한 교직원은 “김문기씨가 변호사를 통해 법원에 제출한 자료를 보면, 그의 재산 1억5천만원 정도가 학교에 남아 있다”고 말했다.




“더 심할 때도 있었다니, 계속 싸우겠다”

학내 뿐 아니라 시민사회단체와도 힘을 합치겠다는 조석곤 상지대 교수협의회 대표



조석곤 상지대 교수협의회 대표는 본관 5층에 마련된 교수협의회 사무실에서 분주한 모습이었다. 그는 1997년 상지대에서 교수 생활을 시작한 소장 경제학자다. 그는 “이번 대법원의 판결에 정말 실망했지만, 김문기씨의 학교 복귀를 막기 위해 학교 구성원들은 물론 다양한 시민사회단체와 힘을 합쳐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판결에 대한 소감은.
=수긍하기 힘들다. 이런 얘기다. 어떤 범죄자가 있다. 그가 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수많은 범죄를 저질러 학교에서 쫓겨났고, 남은 사람들이 피눈물 나는 고생을 해가며 학교를 일으켜 세웠다. 대법원 얘기는 그 범죄자가 이해당사자니까 그 사람과 협의를 하라는 것이다. 교육의 공공성을 지켜야 하는 학교 법인이 이를 수용하는 게 타당한가. 대법관들은 그렇게 하는 게 조리에 맞는다고 말하는데, 그런 대법관들의 논리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대법원 판결에 대한 학내 반응은.
=큰 동요는 없다. 판결이 유리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있었다. 이전에 김문기씨를 경험했던 노 교수들은 “더 심하고 힘들 때도 있다”고 말한다. 새 정이사진을 하루빨리 구성해달라고 교육부에 요청했다.
앞으로 김문기 전 이사장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나.
=현행 사립학교법 25조 3항을 보면 새 정이사를 뽑는 권한을 가진 것은 교육부다. 교육부는 이사 선임 과정에서 학교에 상당한 재산을 출연하거나 학교 발전에 기여한 사람 그리고 대학평의원회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 문제는 김문기씨가 상지대에 재산을 출연했거나, 학교 발전에 기여했느냐의 여부다. 재산 쪽을 보자면, 본인은 학교에 180억원의 돈을 기여했다고 하지만, 회계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증명할 수 없다. 재단 쪽 말로는 토지 2필지와 1억5천만원 정도가 김문기가 출연한 재산의 전부라고 한다. 학교 발전에 기여했느냐의 여부는 따지는 것 자체가 우습다.
새 정이사진을 뽑는 데 김문기씨의 의견을 듣지 않은 부분은 상지대가 너무했다는 지적도 있다.
=결국 그 부분이 문제였던 것 같다. 그 부분에서는 단호하다. 워낙 김문기씨가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벌인 일이 많으니까 그분만은 안 된다는 데 모든 학교 구성원들의 의견이 일치했다. 그리고 김문기씨는 우리 학교의 설립자도 아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이번 대법원 판결은 상지대 한 학교에 대한 판결이 아니고, 지금 우리 사회에서 사학은 무엇인가, 교육의 공공성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과 맞닿아 있다. 이번 판결이 6월 임시국회에서 진행될 예정인 개정 사립학교법의 개악 논의에 기름을 붓지 않을까 걱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학내 구성원들뿐 아니라, 다양한 시민사회 세력과의 연대도 중요하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