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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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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좋은 말 ‘방위비 분담금’

등록 2007-05-11 00:00 수정 2020-05-03 04:24

허울 좋게 내세워 미 2사단 재배치 비용 대신 내주고 있는 ‘눈먼 돈’아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살다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이런 경우다. 밥을 얻어먹은 사람은 “잘 먹었다”고 말하는데도, 밥을 산 사람은 “내가 산 게 아니다”고 손사래를 친다. 더구나 밥값을 내기 전에 자기 지갑에서 버젓이 돈을 꺼내 얻어먹은 사람 호주머니에 넣어주고는 “네 주머니에 있는 돈으로 밥값을 냈으니, 내가 산 게 아니라 네가 사먹은 것”이라고 우기기까지 한다면 자못 심각한 수준이다.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일부를 주한 미 2사단 재배치 비용으로 사용하는 문제에 대한 정부의 태도가 꼭 이 ‘밥 산 사람’을 닮아 있다.

‘남의 지갑’에 찔러줬으면 ‘남의 돈’?

정부는 주한미군 기지 이전 비용과 관련해 그동안 철저히 ‘원인 제공자 부담 원칙’을 강조해왔다. 수도 서울 한복판에 있는 용산기지 이전은 우리의 요구에 따른 것인 만큼, ‘원인 제공자’인 한국 정부가 부담한다는 설명이었다. 마찬가지로 수도권 북부에 주둔하고 있는 주한 미 2사단의 후방 이전은 미국 쪽 요구에 따른 것인 만큼, ‘원인 제공자’인 미국 정부가 부담하게 될 것이란 얘기였다. 용산기지를 제외한 주한미군 기지 이전과 관련해 한-미 양국이 맺은 연합토지관리계획(LPP) 협정도 “(주한 미 2사단) 대체시설에 대한 자금 지원은 미국 쪽이 부담하도록 한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어느샌가 주한 미 2사단 이전 비용의 상당 부분을 한국 쪽이 부담하는 것으로 상황이 바뀌었다. 우리 정부가 주한미군 주둔비의 일부를 ‘고통 분담’ 차원에서 대주는 자금인 ‘방위비 분담금’이란 허울을 통해서다. 이런 사실은 미국 쪽에선 이미 LPP 협정 체결 당시부터 공공연히 거론돼온 문제였다. 우리의 감사원 격인 미 의회 회계감사국(GAO)은 지난 2003년 7월 내놓은 보고서에서 “LPP를 통해 한국이 제공하는 방위비 분담금의 50%까지 (기지 이전 비용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우리 정부는 방위비 분담금의 주한 미 2사단 이전 비용 전용 문제에 대해 그동안 부인으로 일관해왔다. 무소속 최재천 의원은 최근 과 한 인터뷰에서 “지난 2004년 8월 두 차례에 걸쳐 외교통상부 쪽에 ‘방위비 분담금을 2사단 이전 비용으로 전용하기로 이면 합의한 게 아니냐’고 따졌지만, 당시 반기문 외교부 장관과 김숙 북미국장은 ‘말도 안 된다’며 부인했다”고 밝힌 바 있다.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가 지난 2월 방위비 분담금 협정 비준동의안에 대한 심사보고서에서 “정부가 종래의 입장을 번복해 방위비 분담금이 기지 이전 비용으로 집행되고 있음을 시인했다”며 “방위비 분담금 협정과 LPP 협정이 별개임에도 분담금으로 기지 이전 비용을 충당하는 것은 불합리하며, 국민 정서상 납득하기 어렵다”고 비판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에 대한 ‘설명’으로 정부가 내놓은 논리는 뜻밖에도 간단하다. 국방부는 지난 3월 시민단체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이하 평통사)의 질의에 대한 답변서에서 “방위비 분담금으로 지원된 자금은 미국 쪽 계좌에 입금되는 순간 미국 쪽 예산이 되는 것”이라며 “이를 한국 정부가 직접 부담하는 기지 이전 비용으로 볼 수는 없으며, ‘원인 제공자 부담 원칙’에도 어긋나는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남의 지갑’에 찔러준 순간 그 돈은 이미 ‘남의 돈’이며, 따라서 그 돈으로 ‘밥값’을 치른다면 (우리가) 밥을 사준 건 아니라는 주장인 게다.

“훈령 공포, 사후 알리바이 만든 셈”

이런 주장의 법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한 치밀한 준비 작업도 진행돼왔다. 국방부는 지난 2003년 6월 ‘연합방위증강사업 방침 및 절차 규정’이란 제목의 국방부 훈령 제736호를 공포했다. 평통사가 국방부를 상대로 정보공개 청구를 해 확보한 자료를 보면, 국방부는 훈령 제3조 1항에서 ‘연합방위증강사업’을 “한-미 연합방위 전력의 증강을 위해 한-미 간에 공동 추진이 요망되는 사업으로서 제5조의 규정에 따라 선정해 공동 투자하는 사업”으로 규정했다. 이어 제5조 10항에서 “LPP 관련 부대 준비 태세 및 전시 임무 지원, 병영 필수시설 사업(작전 및 행정시설, 막사, 취사시설 등)”을 ‘연합전력 증강에 기여할 수 있는 사업’의 하나로 명시했다.

유영재 평통사 사무처장은 이를 두고 “방위비 분담금으로 2사단 이전 비용을 대주기 위해, LPP 협정 체결 이후 ‘사후 알리바이’를 만든 셈”이라고 꼬집었다. 유 처장은 “국방부 훈령은 이전 비용 부담 당사국을 명시한 LPP 협정을 위반한 것”이라며 “LPP 협정은 국회의 비준동의 절차를 밟은 국제조약으로 국내법적 효력을 갖는데, 국방부가 하위법인 훈령으로 이를 거스른 것은 국회에 대한 기만”이라고 비판했다.

수상쩍은 흔적은 또 있다. 월간 는 최근 발간한 5월호에서 “주한미군이 방위비 분담금 중 7천억원 이상을 미국계 금융권에 예치해 1천억원 이상의 이자수익을 얻고 있으며, 이것이 미 국방부로 입금되고 있다”고 폭로했다. 는 이 과정에서 주한미군 쪽이 이자 수입에 대한 세금 100억원가량을 탈세했다는 의혹까지 제기했다. 그런데도 줄기차게 ‘방위비 분담금이 부족하다’고 볼멘소리를 해온 주한미군의 속내는 대체 뭘까? 한국국방연구원이 지난해 펴낸 ‘06 국방예산 분석·평가 및 07 전망’이란 제목의 보고서를 보면 그 실마리가 엿보인다.

방위비 분담금은 크게 △인건비(현금지원) △군사시설(현금지원) △연합방위력증강사업(CDIP·현물지원) △군수물자(현물지원) 등 네 가지로 나눠진다. 이 가운데 눈여겨봐야 할 것이 군사시설에 대한 현금지원분이다. 지난 1999년 1040억원으로 전체 방위비 분담금의 23.6%에 그쳤던 군사시설 지원금은 LPP 협정을 체결한 2002년 1741억원으로 늘더니, 이후 매년 증액을 거듭해 2006년엔 2646억원까지 늘었다. 전체 방위비 분담금에서 군사시설 지원금이 차지하는 비중도 1999년 23.6%였던 것이, 2002년(28.4%)을 기점으로 상승세를 타기 시작해 2006년엔 38.9%까지 뛰었다. 결국 주한미군은 증액된 이들 자금의 상당 규모를 2사단 이전 비용으로 쓰기 위해 은행에 예치해두고, 세금 한 푼 내지 않고 이자놀이까지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도 외교부는 지난해 방위비 분담금 협상에서 분담금이 부족하다는 미국 쪽 요구를 수용해 451억원이나 증액해주는 데 합의했다.

미국의 요구, 파악도 통제도 못해

“지난 십여 년 동안 64억달러가량의 방위비 분담금을 제공하고도 정부는 그게 적정한 규모인지, 제대로 집행되고 있는지, 미국 쪽 요구 수준이 타당한지 등을 정확히 파악하지도 통제하지도 못하고 있다. 주한미군 감축에도 방위비 분담금을 증액해주고, 미국 쪽이 스스로 부담해야 하는 기지 이전 비용조차 방위비 분담금에서 해결하려는 것을 용인하고 있는 게다.” 박정은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 팀장은 “주한미군에게 방위비 분담금은 ‘눈먼 돈’이며, 그렇게 만든 책임은 한국 정부에 있다”며 “방위비 분담금의 2사단 이전 비용 전용을 통해 정부는 국민의 눈마저 멀게 만들려는 모양”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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