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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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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굴 위해 나타났나 경제 교과서

등록 2007-05-11 00:00 수정 2020-05-03 04:24

배포 임박한 전경련판 경제 교과서, 다시 불붙은 ‘교과서 논쟁’

▣ 류이근 기자ryuyigeun@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한겨레21(한21) :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와 공동으로 개발한 ‘차세대 고등학교 경제 교과서’ 모형(책자)을 언제 배포하나?

김경회 교육부 인적자원정책국장(김경회) : 조만간 한다. 배포 전 오탈자나 통계 일부를 수정하는 작업 중이다. 마무리 단계에 와 있다.

한21 : 내용은 어느 정도 바뀌나?

김경회 : 집필진(한국경제교육학회)이 결정할 부분이다. 크게 바뀌진 않을 거다.

한21 : 상반기 중으로 끝나나?

김경회 : 그렇게까지 안 간다. 이달 안으로 끝내는 게 목표다.

한21 : 다음달엔 배포할 수 있겠다.

김경회 : 그렇다. 하지만 이건 학생용 교재가 아니라 교사용 참고 자료다. 그래서 어디에 보내는 게 도움이 될지 고민 중이다.

김경회 교육부 인적자원정책국장은 지난 5월2일 과의 전화 통화에서, 차세대 고등학교 경제 교과서 모형을 6월 내에 배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전경련도 확인했다. 박찬호 전경련 사회협력본부 상무는 “서로 신뢰 속에 공동 작업을 했다. 교육부가 배포하기로 공식적으로 약속했다. 곧 배포할 거다. 현재 교육부에서 보완 작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차세대 고등학교 경제 교과서 모형은 애초 지난 2월에 배포하기로 했다가, 반대 여론에 부딪혀 중단됐다. 지금까지 교육부와 전경련은 반대 여론을 자극할까봐 ‘함구령’을 내렸다. 하지만 곧 차세대 고등학교 경제 교과서 모형의 배포로 ‘경제 교과서 논쟁’ (2006년 7월6일치 617호 ‘경제교과서를 매우 쳐라’ 참조)이 다시 불붙을 것으로 보인다.

기업에 부담 주면 일자리 잃을 것?

교과서는 국가가 공인한 지식 체계다. 제도권 교육은 교과서를 통해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해낸다. 정치·경제·사회적으로 다투는 세력들이 교과서 논쟁에 사활을 거는 이유다. 최순영 민주노동당 의원은 “교육은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가장 정치적”이라고 말했다. 경제뿐만 아니라 역사, 사회 등 다른 교과서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교과서 논쟁’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결국 이데올로기 투쟁의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동시에 ‘가치 투쟁’이 흔히 그렇듯 아주 치열하다. 쉽게 끝나지도 않는다.

논쟁의 기원과 주도권은 ‘자본’에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나 대한상공회의소 등 경제 단체들과 이들에게 이론을 공급하는 우파 학자들이 “경제 교과서가 반기업·반시장적인 내용으로 짜였다”고 문제를 제기하면서 논쟁이 비롯됐고,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등은 이를 비판해왔다. 주목할 만한 점은 최근에 이러한 논쟁의 외연이 넓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반박과 방어에 매달렸던 전교조 등도 적극적인 모드로 전환해 현 경제 교과서의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전교조는 4월24일 민주노동당 정책위, 최순영 민주노동당 의원실과 함께 ‘경제 교과서를 계기로 본 교육 실태와 대응 방안 모색’이란 주제로 토론회를 열었다. 이날 발제를 맡은 신성호 전교조 참교육실 사무국장은 현 7차 경제 교과서 4종((주)두산, 대한교과서(주), 법문사, (주)천재교육)을 분석했다. 분석은 크게 △반노동자적 서술 △약육강식의 기업관 미화 △경제성장 과정의 왜곡과 미화 △시장 경제 체제의 일방적 찬양 △남북 통일에 대한 부정적 인식 △정부 개입의 부정적 서술 △세계화 일방적 찬성 등 교과서 100여 곳에 나타난 표현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아래 다섯 개만 추려봤다.

“각자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모든 경제 문제들이 ‘자동적으로’ 해결되는 사회를 시장 경제 체제라고 한다.”(두산 35쪽)

“(근로자가) 하루 5만 원 정도의 가치를 창출했다면 그 범위 내에서 소득을 얻으려고 해야 한다. 만약 그 이상을 요구하면 기업에게 부담이 되며, 그러면 근로자도 ‘일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두산 212쪽)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노사 분규, 소득 분배의 불평등, 계층 간의 위화감 등 사회 불안 요인들도 대부분 ‘경제 윤리의 확립’으로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천재교육 109쪽)

“생산성이 높은 사람들은 소득이 높은데, 이런 사람들에게 높은 세금을 부과하면 세금을 피하기 위해서 노동 공급을 줄이려고 할 것이다. 이런 현상이 여러 사람에게 발생한다면, 나라 전체의 생산성이 감소하고 따라서 경제 성장 속도도 늦추어질 수 있다.”(대한교과서 165쪽)

“영국은 복지 국가를 지향하여… 국민의 담세율이 누진적으로 늘어 급기야 고소득층의 경우 소득의 80%를 세금으로 내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번 돈을 통째로 빼앗기고 보면 일하고 싶은 근로 의욕이나 창의력, 발전 욕구가 생길 리 없다.”(천재교육 112쪽)

‘경제학 원론’ 축소판 격인 교과서들

신성호 사무국장은 “우리나라 헌법은 시장경제 체제가 아니라 혼합경제 체제에 입각한 민주복지 공화국을 지향한다. 그런데 현행 교과서는 자유방임주의에 가까운 시장경제 논리 중심으로 되어 있으며, 정부 규제를 부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말했다. 입시 위주의 교육환경에서 수험서로 전락한 교과서에 드리워진 또 하나의 그림자다. 특히 현행 교과서가 6차 경제 교육 과정에서 비중 있게 다뤘던 3~4시간 분량의 노동 부분을 쏙 빼면서, 학생 다수가 미래에 노동자가 됨에도 노동자와 관련된 기술이 부족하고 심지어 반노동자적 표현이 늘어난 원인이 되고 있다.

내용뿐만 아니라 내용을 담는 그릇을 보자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현행 경제 교과서는 대학에서 배우는 경제학 원론의 축소판으로 불린다. 당연히 주류 경제학적 시각이 지배적이다. 류동민 충남대 교수(경제학)는 “경제학 원론이라는 게 주류 경제학을 공부하는 데 필요한 기본 지식”이라며 “대부분의 중·고등 학생들이 커서 정규직 또는 비정규직 노동자, 영세 자영업자가 되는 현실에서 노동자로서의 권리, 소비자운동, 공공성의 문제, 타인에 대한 배려 등을 교육받을 기회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교과서가 경제학 원론의 축소판이란 그릇에 집착할수록 노동 인권, 기업의 지속 가능한 경영, 사회적 책임 및 윤리 경영, 대량 생산과 소비에 따른 환경 파괴 문제, 소비자 및 지역 공동체 등 현대 경제 생활의 큰 화두가 되고 있는 주제들이 설 자리가 좁아진다. 따라서 경제학 원론에서의 해방이 필요하다.

안현효 대구대 교수(사회교육학)가 3월16일 YMCA가 주최한 경제 교육 토론회에서 지적한 것도 궤를 같이한다. “7차 경제 교과서에 대한 최근의 (이영훈 서울대 교수 등의) 비판은 경제 교육의 교육학적 차원을 무시한 채, 경제학자 입장에서 중등 과정 경제 교과서를 일방적으로 평가하고 있으며, 경제원론(지배적 경제 이론)의 이데올로기적 편향도 반영하고 있다.”

경제라는 영역은 정치·사회·문화·윤리 등 사회 체제의 다른 부분과 밀접하면서도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이 때문에 경제 교육 또한 이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가르쳐야 한다. 경제 사상가인 헨리 조지는 “경제 법칙과 도덕 법칙은 원래 하나”라고 말했다. 경제 교과서가 이론으로서 자기 완결성을 지닌 경제 법칙만을 가르치는 독립된 섬이 되어선 곤란하다는 충고다.

교과서 논쟁에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렇다면 바람직한 경제 교과서는 어떤 걸까? 합의가 쉽지 않다. 현 교과서는 어느 쪽도 제대로 만족시키지 못했다. 전경련은 교육부와 함께 만든 차세대 고등학교 경제 교과서 모형을 통해 그들 나름대로 지금의 교과서보다 자본의 이익을 훨씬 깊이 반영한 ‘대안 교과서’를 만들었다. 이에 맞서 전교조 등 진보 진영도 전경련 모델에 대한 단순 반대를 넘어서, 대안 교과서 제작을 준비하고 있다. 올해에 착수해 내년쯤 완성될 것으로 보인다. 장상환 경상대 교수(경제학)는 아르멘토의 말을 인용하면서 대안 교과서를 집필할 때 “경제 교육의 근본 목적으로서 공공선, 즉 우리 사회 내 개인과 집단의 일반적 복지를 지지하고, 동일한 문제에 보수적·자유주의적·급진적 시각 등 다양한 시각에서 해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8차 교육 과정에 따른 고등학교 경제 교과서는 2012~2013년이나 돼야 나온다. 그때까지 5년이란 시간이 남았다. 안현효 교수는 8차 교육 과정의 경제 교육 방향이 “지식, 의사결정 능력뿐만 아니라 비판적 사고, 반성적 사고를 가능하게 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허용하고 촉진하도록 재설계돼야 한다”고 말했다. 교과서 논쟁을 지켜보다 자칫 잊어버려선 안 될 사실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교과서를 만드는 거지?’



‘반기업 퇴치 프로그램’ 작동 중(1~10위)

탈세·부패 뉴스 넘쳐나는데 교과서만 잡고 흥분한 재계

‘우리나라 반기업 정서 세계 1위’.
기사의 제목이다. 이 신문 기사가 경제 교과서 논쟁과 깊은 관계가 있다. 이 제목은 대한상공회의소가 지난 2003년 7월 전국 성인남녀 2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한국 경제와 기업에 대한 국민 의식조사’에서, 응답자의 68%가 기업인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조사 결과에서 따왔다. 상공회의소는 당시 이 조사 결과를 실은 ‘우리나라 반기업 정서의 현황과 과제’란 보고서에서 ‘반기업 퇴치 프로그램’을 마련해 추진해야 한다며, “기업에 대한 경제 교과서의 시각을 개선하는 작업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후 재계의 움직임은 기민했다. 상공회의소는 같은 해 10월 ‘경제 교과서 개선을 위한 종합 건의’를 교육인적자원부에 제출했다. 이듬해 신학기부터 중·고교 사회 및 경제 교과서의 내용이 일부 개선됐다. 몇 달 뒤 전경련 등 경제단체는 교육부에 446곳의 수정을 요구한다. 교육부는 2006년판 교과서에 재계의 요구를 받아들여 362곳을 뜯어고쳤다. 이 가운데 ‘편향적 시각 또는 비주류적 해석’ 23건, ‘시장경제에 대해 부정적 인상을 줄 수 있는 서술’ 19건, ‘주관적인 훈계·윤리적 내용’ 26건을 수정한 것이 눈에 띈다.
재계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자신들의 입맛에 ‘딱 맞는’ 교과서를 배포하고 싶어했다. 전경련은 2006년 교육부와 초·중등 경제 교과서 개선 작업을 공동으로 추진하기로 하고 ‘경제교육 내실화를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교과 개정 과정에 형식적 중립이라도 유지해야 할 교육부가 특정 이익단체와 손을 잡았다. 지난 2월 교육부는 공동협약을 맺고 전경련으로부터 자금 50%를 지원받아 교과서 개발 작업에 나섰다.
그런데 반기업 정서가 정말 교육 때문인가? 잊혀질 만하면 터져나오는 기업인들의 탈세와 부패 등에서 비롯된 부정적 이미지의 누적이 근본 원인 아닐까.




삑! 심판이 등장할 타임!

불투명하고 비민주적인 교과서 개발의 세계에도 원칙과 룰이 필요해

한국 축구팬들이 심판의 존재에 각별하게 주목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지난해 독일 월드컵 스위스와의 경기에서 오프사이드 논란을 지켜보면서 심판의 중요성에 절감했다.
교육과정 개발 기관 및 위원은 교과서의 원칙과 룰을 정한다. 하지만 교과서 논쟁에서 비교적 소소하게 다뤄져왔다. 하병수 교사(범국민교육연대 교육과정위원회 위원)는 최근 ‘국가 수준 교육과정 개발 체제의 문제점과 사회적 교육 과정위원회 설치 필요성’이란 글에서 “교육과정 개발의 권한을 분산하고, 교사와 학생·학부모의 의사가 반영될 수 있는 장치를 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교육과정을 개발하고 고시하는 권한은 교육인적자원부가 갖고 있다. 교육부는 교육과정의 연구·개발을 담당할 기관을 선정하는데, 최근엔 교육과정평가원이 주관해 새 교육과정 개정안이 마련된다. 하병수 교사는 이 과정에 크게 세 가지 문제점을 지적한다.
① 개발 기관 및 위원 선정의 과정이 철저히 개인적인 네트워크를 통해 불투명하고 비민주적으로 이뤄지며, 영향력이 있는 인사의 이해관계에 따라 기관 및 위원의 선정이 달라진다.
② 교육과정 연구·개발 위원들이 소속 학회로부터 압력을 받거나 이해관계를 관철하려고 한다.
③ 연구위원으로 참여하는 교사들의 위치가 종속적이다.
이런 논란을 예방할 수 있도록 교육과정 수립의 법적 절차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현행 초중등교육법을 고쳐, ‘사회적교육과정위원회’의 구성 등 교육과정 개발에 대한 원칙과 룰을 정할 필요가 있다. 사회적교육과정위는 전교조를 비롯해 교총·한교조·학부모 대표 등 다양한 교육 관련 단체로 구성한다. 또 독립성을 지니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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