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5 재·보선 참패한 한나라당, 지도부는 ’휘청’ 박근혜·이명박은 ‘전투 태세’
▣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1. 4월25일 밤 11시께 한나라당 개표 상황실. 재·보궐 선거의 윤곽이 드러난 뒤 강재섭 대표를 비롯한 주요 당직자들은 일찌감치 자리를 떠 파장 분위기였다. 이때 이재오 최고위원이 들어섰다. 얼굴에 미소가 가득해 다른 당직자들과는 대조적이었다. 강 대표의 위기가 자신에게는 기회라고 생각했을까. 현장에 남아 있던 몇몇 기자들이 “표정 관리를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얘기할 정도였다. 지난해 7월 박근혜-이명박 대리전 양상으로 치러진 전당대회에서 강 대표에 밀려 2위를 차지한 이재오 의원은, 강 대표가 사퇴할 경우 대표직을 승계할 수도 있다. 최근에도 강 대표가 당직자의 정치적 중립을 요구하자 이 의원은 소신이 더 중요하다고 맞섰다.
#2. 4월26일. 한나라당이 재·보선 충격파에 시달리면서 수습책을 놓고 갑론을박을 하고 있던 시각, 박근혜 전 대표는 와 인터뷰를 했다. 이날 오후 열린 의원총회에서는 상당수 의원들이 두 대선 주자의 날선 대립을 패배의 주요 원인으로 꼽았는데 박 전 대표는 달리 보는 듯했다. “(2005년 2월 국회에서 합의한 행정중심 복합도시 법안을 놓고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이) ‘군대라도 동원해 막고 싶다’고 했는데, (그런 분과) 같이 유세를 하면 오히려 표가 떨어지지 않았겠나.” 박 대표는 “선거란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다”며 “선거에 졌다고 곧바로 당과 지도부가 흔들리면 국민에게 믿음을 줄 수 없다”고 말했다.
“이러다 당이 깨지는 것 아니냐”
4·25 재·보선 참패의 후폭풍으로 강재섭 대표 체제가 휘청거리고 있는 가운데, 박근혜·이명박 두 진영의 대립이 시간이 갈수록 가팔라지고 있다. 4월26일 하루 ‘자숙’하는가 싶더니 다음날부터 다시 ‘전투 모드’로 바뀌었다. 박 전 대표의 공격에 이 전 시장 진영은 ‘공식적으로는’ 무대응 입장을 밝혔다. 그런데 이 전 시장의 한 핵심 측근은 “우리가 박 전 대표를 향해 ‘독재자의 딸과 당을 같이할 수 있겠느냐’고 말하면 좋겠느냐”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 좋겠느냐면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 민주주의를 위해 치러야 하는 비용 수준은 진작에 뛰어넘었고 수습이 힘든 국면으로 넘어가고 있다. 그 다음은 “도저히 같이 못할 사람들”이라고 선언하고 나가거나 상대방을 밀어내는 단계밖에 남지 않았다. 한나라당 의원들은 “이러다 당이 깨지는 것 아니냐”고 우려했다.
문제는 상황이 이러함에도 뚜렷한 수습책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박·이 양쪽 진영의 ‘공식’ 입장은 거의 유사하다. 현 지도부(강재섭 대표 체제)가 당을 잘 이끌어주길 바란다는 것이지만, 박 전 대표는 ‘성찰’에, 이 전 시장은 ‘쇄신’에 무게를 싣고 있다. 쇄신은 범위가 넓다. 분위기 쇄신도 쇄신이지만 인적 쇄신도 쇄신이다. 실제 26일 의원총회에서 ‘이명박계’로 분류되는 심재철·박찬숙·권오을·홍문표 의원 등은 지도부 총사퇴론을 폈다. 황우여 사무총장 등 지명직 당직자들이 일괄 사표를 냈고 5명의 최고위원 가운데 강창희·전여옥 최고위원이 사퇴 기자회견을 마친 뒤라, 지도부 총사퇴는 곧 강재섭 대표와 이재오·정형근 최고위원의 사퇴를 의미했다.
전당대회가 자칫 ‘분당대회’될 수도
의원총회에서는 백가쟁명식의 수습책이 쏟아져나왔다. ‘이럴 바엔 차라리’ 수준의 당 해체 주장과 ‘별일 아니니 그냥 현재의 지도부에 힘을 실어주자’는 양 극단의 소수 목소리를 빼고 보면, △임시 전당대회를 열어 새 지도부를 선출하는 방안 △임시 전당대회에서 현 지도부의 신임을 묻는 방안 △지도부 총사퇴 뒤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전환 등이 제시됐다.
한나라당이 새 지도부를 선출하든, 아니면 현 지도부의 신임을 묻든 임시 전당대회를 열어 1만여 명의 대의원들의 뜻을 묻자는 방안은 지극히 위험하다는 게 당의 중론이다. ‘평시’라면 몰라도 현재와 같이 박근혜·이명박 두 대선 주자를 중심축으로 원심력이 커져 있는, 조만간 ‘전시체제’로 돌입할 상태에서라면 어떤 성격의 전당대회를 열든 간에 박·이 양쪽 진영이 파열음을 내면서 격돌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전당대회를 열었다가 ‘분당대회’로 종칠 수도 있다는 우려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게다가 전당대회를 열 바에는 아예 대선 후보 선출 경선을 실시하자는 주장이 터져나올 수도 있다. 재·보선 패배의 원인을 둘러싸고 ‘네 탓 공방’을 벌이기 이전까지 양쪽 진영 갈등의 주요 소재가 경선 룰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이는 수습책으로 보기 힘들다.
그렇다고 강재섭 대표를 포함해 지도부가 모두 사퇴를 하고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리는 방안도 쉽지 않다. 우선 박근혜계, 이명박계를 제외한 ‘중립지대’가 별로 없다 보니 임시 지도부인 비대위에 자기 편을 집어넣으려는 싸움이 벌어질 수 있다. 우여곡절 끝에 비대위를 꾸린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남는다. 재·보선 참패 이전에도 ‘선출된 권력’인 강재섭 대표의 리더십은 허약해진 상태였다. 박근혜·이명박 등 유력한 대선 주자만 있을 뿐 한나라당은 보이지 않았다. 정당에서 선출직의 임기는 무의미할 정도로 정치적 상황에 따라 바람을 많이 탄다지만 “경선 1위는 대선 후보로, 2위는 당대표로 추대하자”는 주장이 공공연하게 나왔다. 정상적이라면 강 대표의 임기는 2008년 7월 정기 전당대회에서 새 대표가 선출될 때까지다. 이명박 진영의 한 의원이 18대 총선 공천권을 무기로 ‘중립지대’를 공략할 때도 강 대표는 “다음 총선은 내 임기 중에 치러진다”고 엄포를 놓았는데 머쓱해지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실제 한나라당 의원 대부분은 올 연말 대선 승리를 전제로 다음 대통령이 공천권을 행사할 것으로 보고 있다. 정치관계법 특위(위원장 안상수 의원)가 당 지도부와 상의 없이 위헌 소지가 많은 법안을 남발한 것도 강 대표의 위상을 보여주는 사례 가운데 하나다. 선출된 권력도 ‘허수아비’ 취급을 당하는데 ‘합의 추대된’ 비대위가 제대로 힘을 발휘하기는 힘든 구조다.
강 대표, 재신임 절차를 밟을 계획
백가쟁명식의 의원총회 뒤에 열린 최고위원회에서는 나름대로 ‘비책’을 모색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 지도부의 신임을 묻되 ‘미니 전당대회’에 해당하는 전국위원회를 열어 전당대회의 위험성을 피해가는 방안으로 가닥이 잡혔다. 한나라당의 당헌은 전국위원회가 ‘전당대회 소집이 곤란한 경우 전당대회 기능을 대행’하고 그 정수를 1천 명 이내로 구성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강 대표는 △감찰·윤리 기능 강화 △지역구 의원이나 당원협의회장(옛 지구당위원장)의 영향력이 절대적인 공천제도 정비 등의 개혁안을 투표에 부치는 방식으로 재신임 절차를 밟을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방안이 알려지자 강재섭 대표 지역구에서 벌어진 과태료 대납 사건, 의사협회 금품 로비 의혹 등을 거론하면서 총사퇴론의 ‘깃발’을 꽂았던 홍준표 의원은 “도덕성도 능력도 없는 지도부가 당헌에도 없는 재신임이라는 꼼수를 부리기보다는 깨끗하게 총사퇴하고 새 지도부가 구성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박·이 진영 가운데 어느 한쪽이 ‘큰맘’을 먹지 않는 한, 홍 의원의 주장은 옳고 그름을 떠나 묻혀버릴 가능성이 크다.
그렇지 않아도 ‘말발’이 서지 않는 강 대표가 재·보선의 악재로 꼽히는 과태료 대납 사건에도 이름을 걸쳤으니, 개혁안이 통과되고 재신임이 되더라도 그에게 힘이 쏠리기는 힘들 것으로 전망된다. 강 대표가 재신임이 된다면 이제는 ‘선출된 권력’이라기보다는 박근혜·이명박 진영의 어정쩡한 ‘합의’ 위에 얹혀가는 불안정한 구조다. 양쪽 진영이 경선 시기와 방법을 놓고 격돌하면 다시 휘청거릴 수밖에 없다. 근본 문제가 해소되지 않은 수습책은 수습책이 아니다. 미봉책일 뿐이다.
여의도 정가에서는 한나라당의 ‘4·25 참패’를 곧잘 예방주사에 비유한다. 견디면 올 연말 대선을 잘 이겨낼 수 있다는 뜻이다. 예방주사에 함유된 바이러스는 몸의 저항력을 키울 정도의 소량이다. 바이러스가 몸이 버틸 수 있는 저항력 범위를 넘어서거나 허약할 때 예방주사를 잘못 맞으면 독이 된다. 한나라당은 이미 주사는 맞았고 이젠 맷집을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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