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darkblue">각 당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혀 장기 표류할 가능성 보이는 국민연금 개혁</font>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지난 4년간 끌어오면서 지칠 대로 지쳤고 연금개혁 동력이 이제 다 떨어지는 상황까지 왔다. 하지만 이번 기초노령연금법 국회 통과로 연금개혁 불씨가 아직 꺼지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열린우리당 허윤정 정책전문위원)
이른바 ‘연금 정국’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 지난 4월2일 국회 본회의에서 정부와 열린우리당이 제출한 국민연금법 개정안(보험요율은 현행 9%에서 매년 0.39%씩 인상해 2018년 12.9%로, 급여율(소득대체율)은 현행 60%에서 50%로 인하)과 민주노동당·한나라당 공동 수정 발의안(보험요율은 현행 유지, 급여율은 2008년 50%로 낮춘 뒤 매년 1%포인트씩 인하해 2018년에 40%에 도달)이 모두 부결됐다. 열린우리당의 ‘더 내고 덜 받는 안’과 민주노동당·한나라당의 ‘그대로 내고 덜 받는’ 수정안이 모두 무산된 것이다. 그러나 이날 열린우리당이 제출한 기초노령연금법 제정안은 국회를 통과했다. 이 기초노령연금법은 국민연금 가입과 상관없이 65살 이상 전체 노인 인구의 60%에게 급여율 5%(노인인구 평균소득액 대비 기초연금액· 2008년 약 8만9천원)의 기초연금(최소 생활비)을 지급하는 제도다. 그동안 국민연금 개혁의 초점이 재정안정화(국민연금법 개정)였다면, 이제는 연금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각지대’ 해소(기초노령연금)가 핵심 의제다.
표결 직전 ‘찬성표 던지자’ 쪽지 돌아
국민연금은 가입자들이 낸 보험료를 재원으로 하는 반면, 기초(노령)연금은 조세(국가 일반회계)를 기반으로 한다. 즉, 재정 기반이 서로 분리돼 있다. 그럼에도 국민연금법 개정과 기초노령연금법안은 동전의 앞뒤 면처럼 연동돼 있다. 재정 기반은 다르지만 수혜 대상자는 똑같은데다, 국민연금법 개정을 통해 재정 안정화를 꾀하되 대신 줄어든 급여 수준을 기초노령연금으로 어느 정도 보완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국민연금 급여율 인하는 사실상 기초노령연금 도입을 명분으로 삼고 있다. 이번에 열린우리당은 두 개 법안(국민연금법·기초노령연금법)으로, 한나라당·민주노동당 수정안은 기초연금을 국민연금법 개정안에 통합해 단일 법안으로 제출했다. 그런데 어떻게 열린우리당이 제출한 두 법안 중 국민연금법은 부결되고 기초노령연금법만 압도적 다수(찬성 254표, 반대 9표)로 통과됐을까? 민주노동당 오건호 정책전문위원은 “한나라당이 열린우리당의 기초노령연금 안을 강하게 비판하면서도 막상 표결에서는 노인 표를 의식해 전원이 찬성표를 던지는 일이 벌어졌다”고 말했다. 열린우리당 허윤정 정책전문위원은 “당시 본회의장에 대한노인회 소속 노인 80여 명이 방청객으로 앉아 지켜보고 있었는데, 차라리 기권하거나 본회의장을 나가버렸으면 했지 노인들이 보는 앞에서 한나라당 의원들이 반대표를 던지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내년부터 노인들한테 기초연금 용돈으로 8만9천원을 주자는 법안이 “한나라당의 반대로 무산됐다”는 비판이 쏟아질까 우려한 것이다. 실제로 기초노령연금법 표결 직전에 한나라당 의원들 사이에 찬성표를 던지자는 쪽지가 돌았다고 한다.
열린우리당의 기초노령연금법안에 반대표를 던진 의원은 민주노동당 8명과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 1명뿐이었다. 자신이 제안한 법안에 유 장관 스스로 반대표를 던지는 희한한 일이 벌어진 셈이다. 물론 유 장관은 국민연금법 개정안이 무산된 상황에서 기초노령연금법만 통과되면 연금개혁이 ‘반쪽’이 되고, 오히려 정부 재정 부담이 더욱 악화되기 때문에 반대표를 던질 수밖에 없었다. 유 장관은 즉각 장관직 사퇴 의사를 밝혔고, 한덕수 국무총리는 기초노령연금법 거부권 행사를 대통령에게 건의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4월 국회에 국민연금법 개정안을 다시 제출해 통과시키려는, 국회 압박용 카드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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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도 ‘타협 중재안’ 따로 제시
그러자 한나라당·열린우리당·민주노동당·민주당·통합신당모임 등 6개 정파 대표들은 지난 4월11일 긴급 모임을 갖고 4월 국회에서 연금개혁을 재논의하기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국민연금 개혁은 다시 안갯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일단 열린우리당은 민주당·통합신당과 공조를, 한나라당은 민주노동당을 공조 파트너로 삼고 있는 형국이다. 이런 와중에서 연금개혁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뒤늦게 민주당까지 대선을 겨냥한 노인 표 획득에 나섰다. 각 당의 안을 절충한 ‘타협 중재안’을 따로 제시해 연금 정세에 한몫 가세하겠다는 것이다. 통합신당모임 쪽도 한나라당·민주노동당 대 열린우리당·민주당의 국민연금 대치 전선이 형성되면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면서 ‘캐스팅보트’ 역할을 하겠다고 나섰다. 민주노동당은 통합신당 소속 의원 5명을 이미 포섭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나라당과 민주노동당이 손잡고 공동 수정안을 내는 기이한(?) 일이 벌어진 것도 이런 ‘연금 정치’ 측면과 무관하지 않다. 물론 민주노동당 내부에서도 “어떻게 한나라당과 공조하느냐”는 반발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오건호 전문위원은 “2004년에 가장 먼저 한나라당이 노인표 획득를 위해 무작정 기초연금을 제시했는데, 한나라당 입장에서 국민연금은 딜레마이고 양날의 칼이다. 감세를 주장해온 한나라당이 어떻게 기초연금을 위한 대규모 재원을 감당할 수 있는가”라며 “이런 모순에 처해 있기 때문에 한나라당이 민주노동당과 손을 잡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민주노동당 안이 양대 노총 등 국민연금 가입자 단체들과 협의를 거친 것이기 때문에 민주노동당과 같은 배를 타면 저항도 덜할 것이라는 셈법을 한나라당 쪽이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 쪽은 “기초연금과 관련해 한나라당 사상 처음으로 시민사회단체가 한나라당에 공감하고 있다”면서 “이번 연금개혁 국면을 활용해 한나라당이 ‘따뜻한 복지’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을 부각시킬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물론 한나라당과 민주노동당이 공동 수정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저소득층 노인과 부유층 노인에 대한 기초연금 수급 여부를 둘러싸고 갈등을 빚다가 파국에 이를 뻔한 상황도 발생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반면, 국회 내 세력 구도상 의제 설정 능력이 떨어지는 민주노동당으로서는 한나라당의 수적 우위를 등에 업으면 국민연금 정세를 주도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알려진다. 민주노동당과 한나라당 간의 좌우합작, ‘오월동주’는 이런 배경에서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민주노동당 쪽은 “한나라당이 민주노동당 안의 기본 골격을 수용한 것인데도 언론 보도에서는 민주노동당은 빠진 채 ‘한나라당 수정안’이란 이름으로 한나라당만 부각되고 있다”고 불만을 표시했다.
65살 이상 노인의 60%냐 80%냐
사실 국민연금 재정 안정화 쪽만 보면,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한나라당 공동 수정안은 별 차이가 없다. 연금재정 고갈 시기를 보면 열린우리당 안을 적용하면 2065년이고, 민주노동당·한나라당 안을 적용하면 2062년이다. 한쪽 안은 급여율을 50%로 낮추되 보험료를 12.9%까지 인상하는 것이고, 다른 쪽 안은 급여율을 40%까지 낮추되 보험료는 그대로 유지하기 때문이다.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는 지점은 결국 기초노령연금의 수급 대상자 수와 급여 수준이다. 열린우리당의 기초연금 안은 2008년부터 65살 이상 노인의 ‘60%’(약 300만 명)에게 2008년 현재 약 8만9천원(급여율 5%)을 지급한다는 것이고, 민주노동당·한나라당 수정안은 65살 이상 노인 ‘80%’에게 내년에 8만9천원을 지급하되 이후 해마다 급여 수준을 높여 2018년에 급여율 10%(2008년 현재 불변 가격으로 약 18만원)를 지급하는 안이다.
그런데 기초연금 수급 대상자 60%, 80%는 각각 어떻게 정해진 것일까? 이 수치는 일정한 소득인정액(소득+재산) 기준을 정해놓고 여기에 들어가는 노인 인구층을 자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전체 노인 인구의 60%, 80%를 기술적인 ‘적정 선’으로 사전에 정하는 방식으로 설정됐다. 이와 관련해 65살 이상 인구의 소득 수준에 대한 공식 발표 자료는 없지만, 현재 노인 인구 60%는 소득인정액 4500만원 선, 80%는 6천만원 선에 해당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복지부 연금정책과 쪽은 “조세를 거둬 기초연금 재정을 마련해야 하는데 증세는 국민 부담이 커지고, 급여율 5% 정도라면 재정 부담이 가능하다고 본다”며 “기초노령연금은 조세를 기반으로 한 빈곤층 ‘공공 부조’ 성격이 강하고, 국민연금은 가입자들이 낸 보험료를 재정으로 하는 ‘보편적 사회보험’이기 때문에 기초연금은 국민연금과 별도의 법안으로 제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정부와 열린우리당은 기초연금을 저소득·취약계층만을 위한 공적 부조로 보는 반면, 민주노동당과 한나라당은 기초연금도 보편적 연금으로 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민주노동당·한나라당 수정안은 기초연금 수급 대상을 노인 인구의 80%로 더 폭넓게 설정하고 있다. 한나라당 이상로 정책전문위원은 “기초연금은 원칙적으로 모든 노인들한테 지급해야 한다. 예컨대 삼성 이건희 회장도 국민연금 가입자로서 연금재정에 기여하고 있고 국민연금 급여율 인하로 피해를 보게 되므로 당연히 8만9천원을 받아야 한다”면서 “정부 안처럼 국민연금법 바깥에 별도의 법안으로 기초연금을 설계하면 국회의원들이 표를 얻기 위해 기초연금 급여율을 5%에서 나중에 10%, 15%로 계속 올리는 포퓰리즘(대중 영합주의)에 빠지게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민주노동당 오건호 전문위원은 “기초연금 지급 대상이 60%로 한정되면 중간 소득계층 노인의 경우, 국민연금 급여율이 깎이면서 기초연금 수혜 대상에서도 제외돼 실질급여율 피해자가 발생하게 된다”고 말했다. 민주노동당·한나라당 수정안에 따르면, 20년 가입자 기준 실질급여율은 최상위 소득자(360만원 이상·상위 20%로 기초연금 지급에서 제외)의 경우 현재 19.2%에서 2013년 17.3%, 2018년 13.9%로 떨어진다. 반면 160만원 소득자는 같은 기간 30% 안팎이 유지되고, 120만원 소득자는 현재 35.4%에서 2018년 36.6%로 약간 더 나아진다. 또 90만원 소득자는 현재 42.4%(현행 국민연금 급여율 60%는 40년 가입자 기준임)에서 2018년 44.4%로 높아지게 된다.
재논의 방식 두고도 팽팽히 맞서
오건호 정책전문위원은 “연금개혁안이 통과되면 기초연금 재정 마련을 위해서라도 불가피하게 우리 사회 전반에 재정·조세 개혁 움직임이 대대적으로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4월 국회에서 연금개혁 처리가 물건너갈 공산도 배제할 수 없다. 6개 정당이 오는 4월25일까지 연금법안을 재논의하기로 합의했지만, 열린우리당은 이미 통과된 기초노령연금법안을 기정사실로 인정해 손대지 않는 것을 전제로 삼자고 주장한다. 반면, 한나라당과 민주노동당은 기초노령연금법안을 아예 폐기하는 것을 전제로 논의하자고 맞서고 있다. 아무튼 ‘연금 정치’를 둘러싼 정당 간 각축에는 복잡한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혀 있고 고도의 정치적 계산이 동원되고 있다. 그래서 4월을 넘길 경우 연금개혁 논의는 대선 정국으로 빠져들면서 장기 표류할 가능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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