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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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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들 군대 가고 싶겠나

등록 2007-03-16 00:00 수정 2020-05-03 04:24

중학교 졸업 직후까지 여호와의 증인에 몸담았던 소설가 장정일 기고문…군대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씻어내야 대다수 남성의 적대감도 줄어들 것

▣ 장정일 소설가

우리 사회에서는 종교나 군대 문제에 대해 좋은 말만 하려 들지, 두 집단과 연관해서는 될수록 공론화를 기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두 집단을 건드려서는 득 되는 게 없고 ‘피박’만 쓰기 십상이라, 종교와 군대 문제가 한 몸체로 엉클어진 ‘양심적 병역 대체’에 대해서는 아예 침묵하는 게 최상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한동안 내 고민이기도 했기에 글을 쓴다.

세속법과 하느님 법이 상충할 때

‘너희들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냐?’ 여호와의 증인들이 양심적 병역 대체를 탄원할 때 곧바로 돌아오는 질타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모든 국법을 충실히 지키기로 한 여러 기독교 교파의 구성원들과 동일하게, 여호와의 증인들 역시 세속의 법을 온전히 준수하길 원한다. 기독교인이 자신이 살고 있는 나라의 국법을 잘 따라야 한다는 권고는 다름 아닌 예수님의 말씀으로,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라는 질문에 ‘가이사(황제)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고 대답하신 바 있다.

위에 예거된 예수님의 말씀을 잘 따른다는 의미에서 여호와의 증인들은 성실한 납세자이며, 좋은 시민일 것이다. 그런데 어쩌자고 우리나라 국민의 4대 의무 가운데 하나라는 병역은 한사코 거부하는 것일까? 이런 사태는 예수님의 권고와 모순된 행태로 보여지기도 하지만,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또 다른 가르침과 정면으로 상치되기에 일어나는 것이다. 즉, 세속의 법을 따르되, 세속의 법과 하느님의 법이 정면으로 상충할 때에는 하느님의 법을 따르는 게 신앙인의 양심이다.

‘신앙인의 양심이 먼저인가? 공동체의 법규가 먼저인가?’ 하는 곤혹한 딜레마는 확실히 신정(神政)이 분리된 현대 사회의 문제로, 신앙의 원리가 곧 사회 법규였던 신정일치 사회에서는 드문 문제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런 딜레마가 귀찮다고 신정일치 사회로 되돌아가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중세판 전체주의라고 해야 할 그런 사회에서는 종교가 개인의 양심과 인권을 억압했고 거기서는 진정한 신앙마저 불가능했다. 그런데 조금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양심적 병역 대체를 추호도 인정할 수 없다는 사람들의 논리는, 신앙인의 양심도 국법에 복속돼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또 다른 신정일치라고 해야 한다.

통계에 의하면, 해방 이후 지금까지 약 1만2천여 명의 여호와의 증인 신도가 병역거부로 징역형을 받았으며, 매년 700명 정도가 병역거부로 인한 전과자가 된다고 한다. 또 병역법이 복잡한 건지 아니면 괘심죄인지, 병역거부로 옥살이를 한 여호와의 증인들이 출소를 해서는 예비군 훈련 소집 통지서에 시달린다고 한다. 이런 슬픈 사태를 끝내기 위해서는 신앙인의 양심과 공동체 법규 간의 갈등을 어느 일방에 의해 폭력적으로 해소하려는 악법을 고쳐야 하고, 딜레마를 합리적으로 조정할 방안을 찾아야 한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는 면제받는데…

양심적 병역 대체를 간구하는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가장 먼저 쏟아지는 질문이 “너희는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냐?”는 거라고 말했지만, 실은 이 질문만큼 왜곡된 것도 없다. 올림픽이나 월드컵에서 우수한 성적을 올린 선수들이 병역 면제가 되는 경우에서 보듯이, 대한민국 국민됨은 여러 가지 가치와 방법을 통해 완수될 수 있고, 병역필만이 완전한 국민됨을 인증해주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없는 것처럼 말하지만, 실제로는 공익요원이나 공중보건의 같은 숱한 병역 대체 임무가 존재한다.

증인들에게 대체복무를 허용하면, 입대자 가운데 신앙과 상관없이 ‘편한’ 대체복무를 바라고 여호와의 증인이 되리라는 우려도 있다. 하지만 중학교 졸업 직후까지 여호와의 증인에 몸담아본 내 경험으로는, ‘나이롱’ 증인이 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일주일에 세 번 나가는 집회와 매달 정해진 전도 시간 완수도 버거울 테지만, 당신이 증인이 되기로 했다면, 삶 전반의 기호와 양식을 바꾸어야 한다. 거기에 적응하지 못하면 가차 없는 제명이 기다리고 있다.

민주사회의 장점은 특권을 줄이는 대신, 국민 대다수의 평등을 확보하기 위해 똑같은 값을 가진 여러 종류의 대체 입법과 대안을 마련할 줄 안다는 것이다. 진정한 선진 사회란 될수록 성역(聖域)을 줄이고, 공동체 구성원이 서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여러 종류의 대안을 내놓는 사회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병역 거부’라는 특권을 주장하는 게 아니라, ‘대체복무’를 원한다. 그런 뜻에서 이 문제의 해결은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능력을 가늠하는 시금석이 된다.

우리 사회가 양심적 병역 대체를 폭넓게 용인하기 위해서는 물론 대다수 시민들의 인식이 바뀌어야겠지만, 그보다 시급한 것은 군대다. 이 글을 청탁받기 이틀 전에도, 전경이 자살했다는 안타까운 뉴스를 들었다. 이처럼 군대가 의혹투성이인데다 가혹하기 때문에, 양심적 병역 대체가 용인되지 않는 분위기가 분명 있다. 누구나 가고 싶을 만큼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군대는 가는 사람이 무조건 손해’라는 군대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군대 스스로 씻어낼 수 있을 때, 양심적 병역 대체에 대한 대다수 남성의 적대감도 줄어든다.

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뭐니뭐니 해도 우리나라 종교계와 성직자들이 전향적인 사고를 해야 한다. 모든 종교는 ‘살인하지 말라’는 정언 명령을 교리로 하지만, 세속화된 우리나라 종교계는 이 정언 명령을 내팽개치고 ‘살인의 정당성’을 세속의 법칙에 귀속시켰다(‘국가를 위해서는 살인도 정당화된다’). 게다가 성직자들은 군승이나 군목으로 근무하며 살인을 피할 수 있는 행운을 누리면서도, 행여 살인에 가담하고 싶어하지 않는 평신도의 양심을 지켜주지 않는 것은 위선적이다. 불교도 오태양씨의 경우처럼 ‘양심적 병역 대체’는 이제 여호와의 증인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양심적 병역 대체에 대한 사회적 동의를 얻는 필요조건은, 총대를 멘 군대와 종교계가 바뀌는 것이다. 군대의 사정이 열악할수록 남성들의 복수심은 양심적 병역 대체를 만부당하게 여기게 된다. 또 종교적 정언 명령을 철저히 고심한 바 없던 성직자들은 벌거숭이 살갗을 드러내는 자신의 남루(襤褸)를 가리기 위해 침묵하거나, 사회가 위임한 유권 해석의 지위를 빌려 종교적 정언 명령을 고심하는 신앙인들을 사이비로 낙인찍어왔다.

바라는 게 ‘편한’ 대체복무일까

향후에 어떤 병역 대체 입법이 만들어질지 알 수 없지만, 이들이 거부하는 것은 국가가 국민에게 부여하려는 병역이라는 이름의 공역(公役)이 아니라, 살인과 전쟁에 필요한 집총(執銃)과 전투 훈련이다. 내가 알기로는 공중보건의나 공익요원 등 여러 형태의 대체복무자들은 근무처를 배당받기 전에 몇 주간의 집총 훈련을 한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강조컨대, 양심적 병역 대체 희망자들이 바라는 것은, 공역의 거부나 ‘편한’ 대체복무 혜택이 아니라, 어떠한 살인에도 가담하지 않겠다는 양심을 고수하는 것이다. 대체 입법에는 이 점이 반드시 고려돼야 한다.

우리나라는 어느 나라보다 폭력지수가 높다고 한다. 그래서 평화와 이웃 사랑이란 가치를 몸소 실천하는 사람들은 소중하기 짝이 없고, 그들이 사회에 봉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야말로 서로가 윈윈(win-win)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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