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분단 상상력’을 ‘해금’하고 살펴본 2·13 베이징 합의 이후 벌어질 일들…60일 초기 이행조치 뒤 핵 폐기 논의가 시작되면 통일은 ‘말’에서 ‘실천’으로
‘한반도 냉전 구조 해체의 서막은 시작된 것인가?’
지난 2월13일 제5차 6자회담 3단계 회의에서 참가국 협상 대표들이 합의한 ‘9·19 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초기조치’(이하 2·13 베이징 합의)는 ‘역사적’이란 수식을 붙일 만하다. 그동안 ‘말’의 차원에 머무르던 한반도의 비핵화를 위한 노력이 이번 합의로 ‘행동’ 단계로 올라서게 됐다. 물론 갈 길은 멀다. 그 길에 수많은 난관이 도사리고 있음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이란 ‘목표 지점’을 향한 대장정을 더는 미룰 수 없다. ‘우울한 미래의 파국’을 예감하기보단, ‘미래지향적 상상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김연철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가 그 ‘목표 지점’으로 가는 길을 모색해봤다. 편집자
▣ 김연철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
미래는 꿈꾸는 자들의 것이다. 분단 시대의 꿈은 평화와 통일이다. 그러나 우리의 ‘탈분단 상상력’은 분단돼 있다. 넘지 말아야 할 선들이 그어져 있다. 이제는 넘어보자. 5차 3단계 6자회담의 성과로 북핵 폐기 과정이 시작됐다. 한반도 평화체제의 가능성도 다가오고 있다. 가야 할 길이 멀지만,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목표 지점을 상상해볼 때가 왔다. 그래야 먼 길에서 길을 잃지 않을 것이다.
2·13 베이징 합의는 말 그대로 ‘초기 이행조치’다. 60일 이내에 영변의 핵시설을 폐쇄하고 다시 쓸 수 없도록 하는 불능화 조치가 뒤따를 것이다. 그러면 북한이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핵무기는 어떻게 되는가? 폐기 시점은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 속도에 달려 있다. 다시 말해 워싱턴의 북한 대사관에 인공기가, 평양의 미국 대사관에 성조기가 나부낄 때 북핵 문제는 완전히 해결된다.
30일 이내 1950년의 ‘적성국 교역법’ 논의
북한과 미국이 친구가 된다는 것은 현재의 시점에서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북핵 문제는 사실 북-미 관계가 핵심이다. 북-미 관계는 비대칭적이다. 미국의 입장에서 북한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북한의 입장에서 미국은 거의 전부다. 적대의 중심이고, 국제사회로 나아가는 길목이며, 체제 유지의 근거다.
2·13 베이징 합의 이후 30일 이내에 북-미 관계 정상화를 논의할 실무그룹이 만들어진다. 북-미 양국은 우선적으로 테러지원국 해제와 적성국 교역법 변경 문제를 논의하기로 했다. 적성국 교역법은 한국전쟁 직후인 1950년 12월17일 취해졌고, 핵심 내용은 미국 내 북한 자산을 동결하는 것이다. 관계 정상화의 초기 단계에서 이 법률을 우선적으로 논의하는 이유가 있다. 외교관계 수립을 위해서는 양국 간 채권과 채무를 청산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1997년 12월 미국 재무부 해외자산통제국은 미국인이 보유하고 있는 북한 채권의 신청을 공고한 바 있다. 북한과의 채권·채무 청산협상에 대비하기 위한 준비조치였다. 그동안 중단됐던 관계 정상화의 과정이 이제 다시 시작될 것이다.
테러지원국 해제도 중요하다. 북한은 1987년 11월 대한항공 여객기 폭파사건 직후 ‘테러지원국’이 됐다. 테러지원국에 대한 미국의 제재는 대외원조 금지, 무역제재 등 다양하다. 무역제재의 주요 내용으로는 △일반특혜 관세 적용 금지 △수출입은행의 보증 금지 △국제금융기구에서 차관 및 사업지원 표결시 자동 반대 등이다. 테러지원국 해제는 북한이 정상교역국으로 대우받는 기회가 될 것이다. 북한이 아시아개발은행(ADB)이나 세계은행(IBRD) 회원국이 되는 것도 가능해진다.
북한이 적극적으로 ‘군축’을 주장할지도
북한이 국제금융기구에 가입하면 어떻게 될까? 물론 북한이 세계은행의 회원국이 되려면 국제통화기금(IMF)에 가입해야 하는데, 이때 북한은 화폐발행액, 주요 품목의 생산량, 국방비 지출 등 경제통계를 공개해야 한다. 이런 과정을 모두 거치면, 북한은 국제금융기구의 차관을 얻을 수 있다. 도로와 철도 등 사회기반시설 건설 과정에서 낮은 금리의 차관을 활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통일 과정에서 소요되는 막대한 비용을 남한이 모두 부담해야 한다는 걱정에서 벗어나도 된다. 북한이 정상 국가가 되면, 북한 스스로 개발 자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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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관계 정상화 과정이 시작되면, 최소한 ‘뜨거웠지만 너무 짧아서 아쉬웠던’ 2000년 수준까지는 빠르게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 2000년 10월12일 조명록 차수가 워싱턴을 방문한 뒤 양국은 ‘조-미 공동코뮈니케’를 채택했고, 10월 말 매들린 올브라이트 당시 미 국무장관이 방북을 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존 네그로폰테 미 국무부 부장관은 방북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2005년 6월17일 정동영 당시 통일부 장관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면담했을 때, 김 위원장은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을 강도 높게 비판하면서도 “미국과 수교하고 우방국가가 되면 핵이고 미사일이고 뭐든 다 폐기할 용의가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미국의 고위급 인사가 방북을 해서, 김정일 위원장으로부터 ‘미국과 친구가 되고 싶다’는 의사를 확인하게 된다면 양국 관계는 그만큼 빨라진다. 북한이 미국의 우방국가가 되면 한반도의 역사가 달라질 것이다.
2·13 합의에 따라 60일의 초기 이행조치 기간이 지나면 6자 외무장관 회담이 열린다. 북한의 핵시설 폐쇄와 5개의 실무그룹 구성을 평가하고, 다음 단계로의 진입을 논의할 것이다. 한반도 평화체제를 논의할 4자회담도 이 회담 직후에 시작될 것이다. 6자회담과 달리 별도의 4자회담 형식으로 한반도 평화체제를 논의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 한국전쟁 종전을 선언하고, ‘잠정적인 정전체제’를 ‘항구적인 평화체제’로 전환하려면 관련 당사자들의 집중적인 논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미 9·19 공동성명 채택 과정에서 평화체제 논의에 참여하고 싶어했던 일본에 단호하게 ‘해당사항 없음’을 밝힌 바 있다.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는 중요하다. 북한은 그동안 핵 폐기의 대가로 체제보장을 요구해왔다. 평화체제만큼 확실한 체제보장 방안도 없을 것이다. 물론 한반도 평화체제는 목표 개념이고, 동시에 과정의 의미를 가진다. 우선적으로 조지 부시 대통령이 제기한 ‘한국전쟁 종전 선언’이 평화체제 논의의 출발이 될 수 있다. 분단의 경계선에서, 개성으로 가는 길 위에서, 혹은 달리고 싶은 녹슨 철마 옆에서, 남북한의 정상과 부시 대통령이 “한국전쟁은 끝났다. 한반도에서 더 이상 전쟁은 없으며, 이제 곧 항구적인 평화체제 논의를 시작한다”고 선포할 날도 머지않았다.
물론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해결해야 할 과제는 결코 적지 않다. 북한은 우선적으로 한-미 양국에 ‘군사적 신뢰구축’의 초기 이행조치로 한-미 합동군사훈련의 중단을 요구할 것이다. 주한미군의 위상과 역할의 조정도 요구할 것이다. 군사적 신뢰구축 과정은 전반적인 관계 정상화의 속도에 영향을 받으면서 진행될 것이다.
다음 단계는 군축을 포함한 군비통제다. 북한이 대량살상무기를 포기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핵을 포기하고 미사일을 포기했을 때, 북한의 입장에서 재래식 무기는 더 이상 ‘억지력’을 갖기 어렵다. 현재의 남북한 경제력 격차를 고려할 때, 북한은 재래식 군비경쟁을 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북한은 적극적으로 ‘군축’ 주장을 제기할 것이다. 평화 문제와 관련해서 앞으로 북한이 적극적이고, 남한이 소극적이 되는 날이 올 것이다.
한반도 평화체제가 가시화되면, 우리는 ‘국방개혁 2020’을 변경해야 한다. 2020년까지 620조원에 달하는 국방비 지출을 계획하고 있다. 물론 한반도 평화체제가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해군이나 공군력의 확대 발전은 필요하다. 하지만 대북 억지력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지상군 전력 강화비는 대폭 줄일 수 있다. 현재 지상군 전력 강화비는 270조원 정도로 책정하고 있다. 50%만 줄여도 140조원의 재원이 마련되고, 이 돈은 사회복지 비용으로 전환할 수 있을 것이다.
불안정한 정전체제의 유산도 해소해야 할 것이다. 그동안 남북을 가로질러온 분단의 선이었던 ‘비무장지대’는 사실 ‘무장지대’였다.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을 계기로 작은 평화지대가 만들어졌지만, 이제는 점에서 선으로 나아가 면으로 전면적인 평화지대가 만들어져야 한다. 공단이 확장되고, 관광지대가 넓어질 것이며, 곳곳에 만남의 광장들이 만들어질 것이다.
평화국가, 경제협력으로 풀어간다
그동안 쟁점이 돼왔던 서해의 북방한계선(NLL) 문제도 해결돼야 한다. 정전체제는 육상에서의 경계선은 명확히 했지만, 해상에서의 경계선 문제는 추후 협의하기로 여지를 남겨뒀다. 해상경계선의 분쟁적 성격은 그동안 두 번의 서해교전 사태로 나타나기도 했다. 당분간은 국경선 개념으로 접근한다면,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울 것이다. 경제로 풀어야 한다. 그동안 해상 충돌의 원인도 어업권과 통항권 문제였다. 어업권이 문제라면, 이 지역을 공동어로구역으로 설정하고 합리적인 배분 방식을 합의하면 될 것이다. 통항권 문제라면, 민간선박에 준해 직항로를 허용하면 될 것이다. 평화의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한반도 평화체제의 가능성은 적정 군사력의 규모와 더불어, 군대의 수도 대폭 줄일 수 있다. 이제 ‘평화국가’의 구체적인 미래상을 그려볼 때다.
북핵 문제의 해결 과정은 동시에 경제협력의 과정이다. 북핵 문제가 해결되면 개성공단은 전면적으로 확대될 수 있다. 그동안 개성공단에는 전략물자 통제제도에 따라 민감 설비가 들어갈 수 없었다. 의류나 봉제, 신발과 같은 노동집약적 산업은 들어갈 수 있었지만, 전자업종을 비롯한 기술집약적 분야는 진출하기 어려웠다. 북-미 관계가 개선되면 상황은 달라진다. 개성공단 제품을 미국 시장으로 수출할 수 있다면 공단의 규모도 커질 것이다. 북한은 더 이상 자립노선이 아니라, 수출지향형 체제로 경제체제를 변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핵시설을 폐쇄하고 불능화하면 상응 조치로 중유 제공을 약속했지만, 핵무기 폐기에는 새로운 에너지 지원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북한은 핵 폐기의 대가로 200만kW 송전 구상과 경수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물론 경수로를 제공받으려면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에 복귀해야 하고, 그렇게 하려면 비핵국가가 돼야 한다. 핵무기 폐기의 가능성이 분명해져야, 경수로 논의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북한은 200만kW 송전 구상을 변형된 형태든, 완전한 형태든 수용할 가능성이 높다.
많은 사람들은 송전 구상과 관련해 비용 문제를 제기한다. 건설비에 1조7천억원, 매년 발전비용으로 6천억원에서 8천억원 정도가 소요된다. 적지 않은 비용이다. 그러나 비용 논란에서 빠진 것이 있다. 편익이다. 파주에서 평양까지 송전탑을 건설하는 과정을 상상해보자. 도로와 철도를 닦는 과정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인력과 자재, 설비들이 북한의 산하를 휩쓸 것이다. 건설기간 3년이 지난 뒤 남북한의 교류협력 수준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진전되어 있을 것이다.
200만kW는 북한의 현재 연간 전력생산량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막대한 양이다. 전기 스위치는 남쪽에 있다. 남북한의 상당한 정치적 신뢰가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전기가 통하면 모든 것을 소통할 수 있다. 전기가 통하는 날, 분단은 최소한 반쯤은 무너질 것이다. 남북 경제협력이 심화하고, 전기가 통하고, 철도와 도로가 연결되면, 그것이 바로 남북 경제공동체로 가는 길이다. 경제통합의 길은 시간이 걸리겠지만, 결국 정치통합의 기반으로 작용할 것이다.
북핵 문제의 해결은 한반도에서 냉전의 종식을 의미한다. 국내적 냉전의 기반도 사라질 것이다. 맨 오른쪽에 서서 자기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친북 좌파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정신적 공황에 직면할 것이다. 미국의 대통령이 한국전쟁 종전을 선언하고, 평화체제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결국 북한과 미국이 수교를 하면, 시청 앞에서 성조기를 흔들던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친미가 더 이상 반북이 아니다. 친북도 더 이상 반미가 아니다. 그런 날이 다가오고 있다.
극우파는 정신적 공황에 처하고…
오로지 냉전 반공주의를 기반으로 살아왔던 한국의 왜곡된 보수는 정체성의 혼돈을 맞을 것이다. 미국에서 네오콘이 사라져가고 있고, 일본의 극우세력도 동북아의 평화 질서가 진전되면 고립될 수밖에 없다. 선진국 정치에서 극우세력은 보수의 경계 대상과 다를 바 없다. 한반도에서 냉전 종식은 극우와 보수를 구분하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냉전 반공주의가 아니라, 자유주의와 도덕적 가치를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보수가 만들어질 것이다.
평화는 많은 것을 변화시킬 것이다. 가야 할 길은 멀다. 꿈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상상력의 ‘해금’이 필요하지만, 동시에 상상력을 구체화하기 위한 의지와 노력, 그리고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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