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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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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한 검사의 일탈이었나

등록 2007-02-16 00:00 수정 2020-05-03 04:24

제이유그룹 수사과정에서 불거진 거짓말 강요로 검찰은 사면초가…거물급 피의자를 잡기 위한 사술? 검찰 신문의 투명성 논란 확대

▣ 김창석 기자 kimcs@hani.co.kr

“내가 시키는 대로 도와줘, 깨끗하게.”(검사)

“거짓말하라고요?”(피의자)

“거짓말하고 법원에 가서도 거짓말하세요.”(검사)

녹취록 공개 이유에도 의혹 일어

검사가 피의자에게 거짓 진술을 권유 또는 강요한 것이 명백해 보이는, 이 녹취록이 검찰을 궁지에 몰아넣고 있다.

녹취록에는 “희생타를 날려, 뭘 생각하겠다는 거야”라는 대목과 누구를 희생타로 삼을지를 시사하는 실명도 등장한다. “뭐 강정화도 잡고, 이재순도 잡고. 이재순은 뭐 형사처벌까지 가기를 바라지도 않아. 옷만 벗기면 돼”라고 돼 있는 부분이 그것이다. ‘유죄협상’(플리바기닝)을 벌였다고 짐작할 수 있는 대목도 있다. 결국 진술조서에 피의자가 서명을 거부하자, “검사가 진술을 강요했네, 그런 소리 하면 안 돼”라고 입단속까지 했다.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는 말까지 내뱉은 것이다.

제이유그룹 로비 의혹 사건 수사 과정에서 터진 서울동부지검의 이른바 ‘피의자 거짓 진술 강요 사건’은 검찰 초유의 일이다. 물론 지금까지 검사의 신문 과정에서 문제가 드러난 일은 많았다. 자백을 받기 위해 추가 혐의를 제시한다거나, 밤샘조사 과정에서 강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자백을 강요한다거나, 심지어 피의자에게 폭언하거나 폭행한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이 아닌 내용을 법정에까지 가서 증언하라고 피의자에게 강요한 사실이 입증 자료와 함께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거짓 진술을 강요한 백아무개(39·사시 35회) 검사는 사건이 불거진 뒤 춘천지검으로 발령났고, 대검찰청은 감찰 조사를 벌이는 중이다.

제이유그룹 사건은 다단계업체인 제이유의 주수도(51·구속수감 중) 회장이 2003년 1월부터 2005년 12월까지 제이유그룹을 운영하면서 투자자 11만2천여 명한테서 1조8천억원의 피해를 끼치고, 회삿돈을 횡령했다는 것이 주요한 내용이다. 주 회장은 이런 혐의로 지난해 8월 구속기소된 뒤 무기징역을 구형받고 1심 선고를 앞두고 있다. 이재순 전 청와대 사정비서관의 연루 의혹이 불거진 지난해 11월 말은 이 사건의 분수령이었다. 이후 검찰은 12월 말께 이 전 비서관에 대해 무혐의 처분을 내렸지만, 이번 사건으로 이 전 비서관의 이름이 다시 오르내리고 있다.

녹취록 공개와 관련해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제이유그룹 관련자들이다. 녹취록 존재 사실을 처음 폭로한 강정화(47)씨는 제이유그룹 납품업자였다. 백 검사의 조사 내용을 녹음한 김영호(40)씨는 제이유그룹 전 상품 담당 이사였다. 김씨는 지난해 6월 구속기소됐고, 강씨 역시 지난해 검찰의 수사를 받은 인물이다. 특히 강씨는 학습지를 제작해 제이유그룹에 납품하는 회사였던 ㅅ사의 대표였는데 이재순 전 청와대 비서관의 동생이 한때 이 회사의 대표로 재직한 사실이 밝혀져 그 배경에 의혹이 쏠리기도 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전 비서관의 연루 의혹을 검찰에 처음 제보한 이가 김씨라는 게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강씨 소유의 ㅅ사가 이 전 비서관과 제이유그룹을 잇는 ‘고리’라는 구체적인 내용을 수사팀에 알렸다”는 게 검찰 쪽의 설명이다. 검찰과 제이유그룹피해자모임 쪽은 이런 복잡한 배경 때문에 폭로의 배경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동안 검찰 수사팀에 협조적이었던 김씨가 태도를 바꾼 이유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녹취록 공개를 이용해 자신의 추가 기소를 막으려 했거나 주 회장과 일종의 거래를 하려 한 것 아니냐는 의혹도 일고 있다.

판사하다 옮긴 뒤 뭔가 보여주려 했다?

그러나 사건의 복잡한 배경과는 별개로 검찰이 곤혹스러워하는 진짜 이유는, 검사가 피의자를 상대로 거짓 진술을 강요한 사실은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을 접하는 검사들은 대체로 이 사건을 ‘검사 개인의 일탈’ 문제로 보고 있다. 대검찰청에 근무하는 한 부장검사는 과의 전화 통화에서 “조직 내부에서 만연한 잘못도 아닌데 검찰 조직 전체의 문제로 몰고 가는 것은 옳지 않다”며 “한 검사의 잘못된 일처리가 사건의 본질”이라고 말했다.

백 검사 개인의 이력이 이번 사건과 무관하지 않다고 분석하는 이들도 있다. 판사 출신이었던 백 검사가 ‘검찰 조직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보여야 한다’는 그릇된 공명심을 가지고 있었고, 결국 이런 욕심이 무리한 수사의 실마리를 제공했다는 시각이다. 백 검사는 1999년부터 6년 동안 판사를 하다 2005년 2월 검찰로 옮겼다. 검사가 된 뒤로 첫 임지에서 형사부 검사를 하던 그는 서울동부지검에서는 특수부 구실을 하는 형사6부로 배치됐다. 이에 대해 서울중앙지검의 한 부장검사는 “수사 경력이 1년 반도 되지 않은 인물을 곧바로 인지수사 부서인 특수부로 배치한 것이 부적절했던 것 같다”며 “그 정도 경력이라면 초임 검사와 마찬가지로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백 검사와 안면이 있는 한 판사는 “기자도 마찬가지이겠지만 판사나 검사들도 자존심이 강하기 때문에 새로운 조직에 가서 뭔가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지 않았겠느냐”고 귀띔했다.

그렇지만 검찰 수사팀이 이번 사건과 관련해 상당히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는 정황이 속속 드러나면서 백 검사의 ‘일탈’이 개인적인 것이 아닐 수 있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녹취록에 부분적으로 드러나 있는 사실관계를 종합해보면, 수사팀은 제이유그룹 쪽과 이 전 비서관의 연결고리로 강씨를 지목한 뒤 강씨를 구속하기 위해 김씨에게 거짓 진술을 하도록 압박한 것으로 보인다. 압박이 성공할 경우 그 다음 수순은 이 전 비서관의 형사처벌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검찰은 지난해 수사가 한창이던 7~8월께 제이유그룹 쪽에서 흘러나온 돈 일부가 강씨를 거쳐 이 전 비서관에게 흘러간 사실을 확인했다. 이 전 비서관과 강씨가 돈거래에 대해 “분당 오피스텔을 임대하고 매매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개인 사이의 돈거래”라고 해명했지만, 수사팀의 의혹은 가시지 않았다. 여기에다 2005~2006년 사이에 국가정보원이 작성한 주 회장의 ‘정·관계 로비 의혹 보고서’가 곧바로 검찰로 가지 않았던 배경에 이 전 비서관이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백 검사의 거짓 자백 강요가 있었던 셈이다. 수사팀의 수사 초점이 권력의 핵심을 향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일이라는 얘기다. 이런 점에 비춰볼 때 이번 사건의 원인을 단순히 ‘검사 개인의 과욕’이나 ‘공명심’으로만 보는 것은 무리다.

사실 그동안 검사의 조사 과정이 여론의 도마 위에 오른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검찰 수사 과정에서 검사가 피의자나 참고인에게 검사의 의도대로 진술을 유도하는 방법이 쓰인다는 사실은 검찰 안팎에서는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범죄 사실이 비교적 가벼운 일반 형사사건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지만, 정치인 등 유력 인사들이 피의자로 등장하는 특수부 사건들에서는 피의자들의 볼멘소리가 종종 새나오기도 했다.

검사가 피의자의 진술을 유도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먼저, 기소된 사실과 관련 없는 혐의로 압박하는 방법이 있다. 압수수색 과정이나 통화내역 조회에서 드러난 여러 사실들을 제시하면서 심리적으로 압박하는 ‘전술’이다. 또 기업인의 경우에는 세금 문제가 항상 아킬레스건이 된다. 물론 여기까지는 검사가 수사를 원활히 해내기 위한 검사만의 ‘수사기법’ 또는 ‘노하우’로 봐줄 만하다.

제도적 보완책 마련 시급

그러나 이 압박이 거물급의 피의자를 잡기 위한 ‘사술’로 활용되기 시작하면 문제는 달라진다. 수도권에 근무하는 한 중견 검사는 “‘누구를 불면 당신의 혐의는 어느 정도 줄여준다’는 식의 권유도 못한다면 특수부 수사가 제대로 이뤄지기 힘들다”며 “요즘에는 압수수색이나 계좌추적 같은 전통적인 수사 기법으로는 거물들을 잡기 힘들기 때문에 플리바기닝을 공식적으로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털어놨다.

진술 강요 이외에도 검사와 검찰 수사관들의 신문 과정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폭언과 폭력 문제다. 극히 일부 검사들한테서 문제가 되는 사안이지만, 여전히 피의자·참고인들의 불만사항이다. 가장 비극적인 사건은 2002년 10월 서울중앙지검 강력부에서 발생한 피의자 폭행 사망사건이었다. 이와 관련해 서울중앙지검의 한 고위 간부는 “이제 검찰이 하는 모든 수사는 유리상자 안에서 이뤄지는 것이며 이는 후배 검사들에게 매일처럼 강조하는 사항”이라고 말했다.

법조계 안팎에서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검찰 신문 과정을 투명화하는 제도적 보완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그 제도적 장치로는 △변호인 입회권을 전면적으로 허용하는 문제 △검사가 직접 신문하는 시스템을 정착시키는 문제 △사법개혁추진위원회가 형사소송법 개정안에 마련한 조사 과정 영상녹화 시스템을 도입하는 문제 등이 거론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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