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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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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루판, 타고 남아도 붉은 빛

등록 2007-02-09 00:00 수정 2020-05-03 04:24

손오공이 파초선을 빌려 꺼야 했던 ‘화염산’이 있는 지상에서 가장 낮은 도시…‘풍요로운 땅’의 영화는 흔적 없는 이곳에서 웨이우얼족은 자치정부를 꿈꾼다

2007년 1월 말, 취재진은 실크로드의 대표적인 오아시스 도시 투루판을 찾았다. 100년 전 이 도시를 찾은 서구와 일본의 탐험가들은 폐허로 변한 도시와 무덤과 석굴들을 파헤쳐 많은 문화재를 도굴해갔다. 산업혁명 이후 부강해진 서구 세력이 침범하기 전까지 투루판은 혹독한 자연을 다스려가며 풍요로운 문화를 꽃피워왔다. 투루판의 폐허 속에서 시간은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은 647호 투루판 화보를 시작으로 두세 차례에 걸쳐 ‘지성’의 이름으로 자행된 서구와 일본의 야만을 고발할 계획이다. 편집자

▣ 투루판(중국 신장웨이우얼자치구)=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 글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겨울의 실크로드는 황막했다. 바람이 불었고, 희뿌연 모래가 날렸다. 빠르게 지나는 차창 바깥에서, 별로 아름답거나 화려하지 않은 모래언덕과 붉은 산의 능선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져 있었다. 관광객들을 기다리는 낙타는 말이 없었고, 노새는 성질을 이기지 못해 길고 원통한 울음을 내뿜으며 몸을 뒤척였다. 사막의 혹한 속에서 손오공이 파초선을 빌려 꺼야 했던 불타는 ‘화염산’(火焰山)도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 너머 톈산 산맥의 푸른 만년설들이 눈동자에 안겼다, 사라졌다. 그곳에서는 바람이 많이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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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를 만든 건 8할이 불과 모래와 바람

베이징에서 출발한 하이난항공 보잉 737-800 여객기는 단번에 신장웨이우얼자치구의 수도 우루무치에 닿지 못했다. 겨울의 우루무치에는 안개가 자주 끼고 눈이 많아 비행기가 연착되기 일쑤다. 2007년 1월22일 오전 10시, 예정 시간보다 두 시간 늦게 베이징을 출발한 항공기는 목적지에서 서북쪽으로 260km 떨어진 도시 커라마이에서 날개를 접었다. 두 시간의 기다림 끝에 비행기는 다시 날아올라 한 시간 만에 승객들을 우루무치 공항에 쏟아냈다. 최종 목적지 투루판은 세계에서 가장 긴 사막 공로인 312호 고속도로를 타고 동쪽으로 다시 두 시간 반을 달려야 한다. 투루판은 한국에서 먼 도시다.

투루판은 사방이 높은 산들로 둘러싸인 동서 120km, 남북 60km의 오아시스다. 투루판의 총면적 5만㎢ 가운데 80%가 넘는 4만㎢는 고도가 해면보다 낮다. 가장 낮은 곳은 도시의 남쪽 외곽에 있는 아이딩호인데, 수면은 해발 -154m다. 아이딩은 웨이우얼어로 ‘달빛’이라는 뜻이다. 우리 이름으로 치면 ‘월광 호수’쯤 될까. 투루판은 지상에서 가장 낮은 도시다.

이곳의 척박한 자연환경은 투루판 사람들을 강한 전사로 만들었다. 지금의 투루판을 만든 것은 8할이 불과 모래와 바람이다. 작열하는 태양열은 주변 산에 막혀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해, 이곳 기온은 여름이면 보통 50도 가까이 오른다. 지열까지 합치면 지표면의 기온이 83.3도까지 오른 기록도 있다. 연평균 강우량은 16.6mm인 데 견줘, 증발량은 3천mm나 된다. 차가운 주변 고산지대에서 봄이면 건조한 바람이 사정없이 불어닥친다. 그렇지만 겨울의 투루판은 여느 평범한 도시와 다름없다. 서울에서 가져온 두꺼운 외투를 버리고, 모직 점퍼 하나를 걸친 채 거리를 쏘다니기 시작했다.

혹독한 자연환경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톈산 산맥의 만년설이 녹아 흘러든 물 때문이다. 투루판 사람들은 이 물의 증발을 막기 위해 카레즈라는 독특한 관개시설을 개발해냈다. 카레즈는 페르시아어의 ‘지하수’에서 유래한 말로 알려져 있는데, 정확한 어원은 학자마다 의견이 다르다. 쉽게 말하자면, 물의 증발을 막기 위해 고안된 건조지대의 지하 인공 수로를 뜻한다. 사람들은 원시적인 곡괭이와 삽을 이용한 절박한 노동으로 한땀한땀 지하 땅굴을 파들어갔다. 한 사람이 모래를 파내면 두 번째 사람이 모래를 바구니에 담고, 세 번째 사람이 땅굴로 뚫린 구멍으로 바구니를 두레박에 담아 지상으로 퍼올린다. 그렇게 만든 카레즈의 전체 길이가 서울과 부산을 10번 넘게 왕복할 수 있는 거리인 5500km다. 중국 정부는 카레즈를 진시황의 만리장성, 수양제의 베이징~항저우를 잇는 경항 대운하(전체 길이 3200km)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중국 3대 역사로 꼽고 있다.

한족에 동화될까 두려운 이슬람 마을

그 물을 끌어들여 투루판은 빛나는 고대 문화를 꽃피웠다. 지금까지의 발굴 결과를 보면 투루판 전역에는 고대 고창국의 수도 고창고성(高昌故城), 그 고창국과 고창국을 정벌한 당나라의 공동묘지였던 아스타나 고분군, 베제클리크와 토욕구의 석굴사원, 2천 년 전 차사전국의 수도이자, 이후 군사 기지로 사용됐던 교하고성(交河故城) 등 178개의 유적지가 있다. 고창고성에는 의 주인공이 된 스물여섯의 청년 승려 현장(602~664)과 그를 끝까지 잡으려 했던 고창국의 왕 국문태의 애절한 일화가 전한다. 국문태는 현장이 그의 나라에 남아 불법을 가르쳐주기 바랐지만, 인도로 불경을 얻으러 장도를 떠난 현장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국문태의 위협과 구금에 현장은 단식으로 맞섰다. 결국 현장의 뜻을 꺾지 못한 국문태는 현장에게 여비로 쓸 많은 보물을 제공하고 그를 떠나보냈다. 인도에서 불경을 구한 현장이 다시 고창고성을 찾았을 때 국씨 고창국은 당에 망해 폐허로 변해 있었다. 지금도 고창고성의 대불사 터의 오른쪽에는 현장이 한 달 동안 설법했던 돔 모양의 사원 터가 폐허로 남아 있다.

투루판은 돌궐어로 ‘풍요로운 땅’이란 뜻이다. 그 도시에서 옛 영화의 흔적을 찾기는 어려웠다. 현대의 투루판을 지배하는 이미지는 궁벽한 가난이다. 투루판 시내에서 동쪽으로 60km를 달리면 닿는 이슬람 마을 마자촌에서 만난 마이마이티(39)는 투루판의 전형적인 농민이다. 투루판 문물국 학예사 딩난난(27)은 “이곳은 신장웨이우얼자치구에서 가장 오래된 이슬람 마을”이라고 말했다. 마이마이티는 땅 5천 평을 갖고 있는데 4천 평에는 포도를 심고 1천 평에는 목화를 심는다고 했다. “한국 사람들은 축구를 잘해요. 지난번 월드컵 때 우리도 응원했죠. 가끔 한국 사람들이 오기도 한답니다. 한국 사람들은 예의가 발라서 좋아요.” 투루판은 포도 산지로 유명해 당나라 시대에는 장안 사람들이 이곳의 포도와 포도주를 마시기도 했다. 시 외곽에서 만나는 건물 3채 중 하나는 건포도를 만들기 위한 건조실이다. 이곳 건포도는 대부분 유럽으로 수출되고, 그 밖에 면화·메론·수박도 많이 난다.

마이마이티의 아내 마리카(37)는 낯선 손님을 보고 굵은 밀 반죽을 기름에 튀긴 웨이우얼족들의 명절 음식 산즈, 낭, 집에서 직접 말린 건포도를 내왔다. 아이는 모두 세 명인데, 첫째와 둘째는 투루판 시내에 있는 학교에 갔고, 집을 지키는 것은 막내 일라함(4)뿐이다. “많이 드세요. 갑자기 찾아오셔서 드릴 게 없네요. 차를 좀 내와야 할까봐요.” 마을에서 가장 높은 산 중턱에 자리잡은 이슬람 사원이 이채로웠다. 카자흐스탄 등에서 친척이 올 때면 같이 나가 예배를 드린다고 했다. 사원 안에는 늙은 상수리나무가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다.

투루판 인구의 대부분은 웨이우얼족들이다. 우루무치와 투루판은 본디 웨이우얼족의 땅이었다. 그들은 여전히 중화인민공화국으로부터 독립을 꿈꾸고 있다. 이곳은 8세기까지 당의 영향권 아래 있었지만, 그 뒤로 웨이우얼족을 비롯한 여러 민족이 몰려들었다. 청나라의 영향권 아래 든 것은 18세기 중엽, 우루무치에 안서제독을 주둔시킨 뒤다. 1944년 웨이우얼족과 카자흐족이 주동해 쿠처에 동투르키스탄공화국을 세웠지만 얼마 못 가 중국군이 들어와 정권을 넘겨받았다. 이따금 우루무치에서는 무장 웨이우얼족의 테러가 터지기도 한다. 웨이우얼족들은 한족에 동화될까 두려워 아이들을 한족 학교에 보내지 않는다고 했다. 시골 농가에서 만난 웨이우얼인들은 대부분 중국어를 말하지 못했다.

PC방에는 김종국과 마야의 노래가

웨이우얼족들의 주식은 둥근 보름달 모양의 마른 빵 낭과 양고기 꼬치다. 투루판 시내 양구이 꼬치 전문점에서 만난 바르만(35)은 “우리는 이슬람교도이기 때문에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루자’란 이름의 고기 난로에서 버드나무 숯을 이용해 20년 동안 양꼬치를 구웠다. 꼬치에는 소금, 후추, 웨이우얼 향료인 즈랑을 뿌린다. 무슬림인 웨이우얼인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바르만은 “바르만이란 이름은 투루판에서 매우 흔한 이름”이라고 말했다. 낭은 한 개에 중국 돈으로 2~3위안(한국 돈으로는 260~400원), 양고기 꼬치는 한 개에 5위안(650원)이다. 밤이면 웨이우얼족 젊은이들도 PC방으로 모여들고, 그곳에선 가수 김종국과 마야의 노래가 배경음악으로 깔린다. 불 꺼진 시내는 고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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