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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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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무죄라니 돌아올 수 있나요

등록 2007-02-03 00:00 수정 2020-05-03 04:24

‘인혁당 사건’으로 억울하게 죽은 남편 그리며 살아온 여인들…아내들까지 강제 연행해 고문했던 이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

▣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어느 화사한 봄날 남편이 집을 나섰다. 아내와 아이들을 돌아보고 “갔다 오겠다”며 빙긋 웃었다. 남편은 오지 않았다. 그때가 마지막일 줄 아무도 몰랐다. 그렇게 나간 남편은 1년 뒤 싸늘하게 식어서야 돌아왔다. 아내들은, 죽어서 돌아오기 전까지 가족 대표로 들어간 법정 먼발치에서 남편을 보았을 뿐 단 한 번도 눈을 맞추고 얘기해보지 못했다. 그날 이후 남은 사람들은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다. 1975년 4월9일 이후 32년이 그렇게 흘렀다.

이른바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대법원 판결 뒤 18시간 만에 사형된 8명, 도예종·서도원·하재완·송상진·우홍선·김용원·이수병·여정남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여느 가장들처럼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며 출퇴근을 하는 생활인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침묵을 강요당하면서도 침묵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다 ‘간첩’이 됐다. 죽었다. 가족들은 하루 아침에 ‘빨갱이 가족’이 됐다.

어느 날 남편을 데려간 검정색 세단

많은 이들이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모르거나, 그저 안다. 암울했던 역사의 한 토막으로 기억한다. 기자도 그랬다. 1월23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재판관 문용선)가 재심 선고 공판에서 이미 사형된 피고인들에게 무죄를 선고한 이후 역사가 ‘현재’가 됐다. 남은 가족들에게는 줄곧 현재였는데도 말이다.

은 유족 가운데 강순희(74)·유승옥(69)·이정숙(61)씨를 어렵게 한자리에 모셨다. 각각 우홍선·김용원·이수병씨의 부인이다. 이들에게서 박정희 정권이 파괴한 삶을 들었다. 기자는 첫 대면에 인사말을 찾지 못해 애를 먹었다. 무죄 판결을 받아 이제야 누명을 벗게 됐으니 축하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래도 고인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아픔을 후벼판 인터뷰는 1월25일 저녁 2시간 넘게 진행됐다.

1974년 4월18일 오후 유승옥·이정숙씨 집에 경찰이 들이닥쳤다. 아무 설명 없이 집을 뒤지고 책과 라디오 등을 가져갔다. 밤이 돼도 남편은 오지 않았다. 이씨는 젖먹이를 업고 남편을 찾아나섰다. 어떤 이는 중정이 있는 남산으로 가보라고 했고, 어떤 이는 형무소가 있는 서대문으로 가보라고 했다. 서대문형무소 앞에서 사흘쯤 기다린 뒤에야 스쳐 지나가는 검정색 세단을 탄 남편을 볼 수 있었다. 이씨는 걱정 말라고 소리치며 쫓아갔고 남편은 고개를 돌려 웃었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한참을 울었다. 그나마 생사를 확인한 것을 위안으로 삼았다.

아내들은 남편이 왜 며칠째 돌아오지 않는지, 어디에 있는지를 4월25일 중앙정보부(이하 중정)의 사건 발표를 통해 알게 됐다. 강순희씨도 5월2일 똑같은 일을 당했다. 인혁당 재건을 위해 일했다면 중정의 발표 뒤에 몸을 피했을 텐데 강씨의 남편 우홍선은 평소처럼 회사에 출근해 회의를 하던 중에 연행됐다. 세 집에서 가져간 라디오는 모두 ‘북괴방송 청취용’으로 둔갑했다. 가장 최신형이었던 강씨네 라디오는 조서에 ‘고성능에 특수장치를 한 라디오’로 기록됐다. 그 라디오가 중정이 제시한 유일한 증거물이었다.

구명운동 하던 아내들까지 강제 연행

남편들이 강제로 연행되고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실린 뒤에도 아내들은 아직 순진했다. 정성스럽게 탄원서를 작성해 보냈다. 박정희 대통령 앞, 육영수 여사 앞, 민복기 대법원장 앞, 신직수 중정부장 앞, 황산덕 법무부 장관 앞…. 강순희씨는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이 실체가 없었던 만큼, ‘재건’은 조작이라는 증거물을 찾아다녔다. 한국전쟁 당시 학도의용군으로 참전해 최전선에서 싸우다 대위로 예편한 남편을 공산주의자로 만들어놨으니 머지않아 진실이 밝혀질 것으로 생각했다.

결론이 정해져 있던 비상군법회의 ‘드라마’는 속전속결로 진행됐다. 남편을 살리려는 아내들의 구명운동도 치열해졌다. 아내들은 찾아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 사건의 진상을 알리기 위해 언론사에도 발이 닳도록 찾아다녔지만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곳은 없었다. 초대받지 않은 국제앰네스티 행사장에 몰래 들어가 단상에 올라 인혁당 사건의 실체를 알리기도 했다. 처음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이들은 종교인들이었다. 조지 오글 목사, 제임스 시노트 신부와 천주교 인권위원회의 함세웅 신부 등이 발벗고 나섰다. 1심과 2심에서 잇따라 사형이 선고된 뒤에도 “함부로 죽이지는 못할 것”이라는 말에 한 가닥 희망을 걸었다.

구명운동이 본격화되자 중정은 아내들까지 강제로 연행했다. 1975년 1월9일 명동성당 앞에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조작”이라는 호소문을 발표한 것이 계기였다. 48시간 동안 잠을 재우지 않았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대드느냐”고 협박을 하고 폭행을 했다. 남편이 국가 전복 활동을 한 사실을 목격했다는 진술서를 강요했다. 남편들의 법정 투쟁을 지켜본 아내들은 처음엔 완강히 버텼지만, 난생처음 겪는 폭력을 견디지 못해 몇몇은 그들이 부르는 대로 받아 적었다. 중정은 허위 진술서를 받아내기 위해 최음제로 추정되는 약을 사용하기도 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물을 받아마신 한 아내는 중정 조사 직후 의지와 다르게 반응했던 몸이 부끄러워 아이들과 동반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1975년 4월8일 대법원은 각본대로 사형을 선고했다. 아내들은 정신을 놓아버렸다. 다음날 오전 재심을 청구하러 가는 길에 벌써 사형이 집행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늘이 무너졌다. 강순희·유승옥씨는 남편의 시신을 수습하러 갈 정신이 남아 있지 않았다.

“분이 풀리지 않아. 살릴 수 없으니까…”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조작한 정권은 고인들이 남긴 마지막 말까지 조작했다. 이정숙씨는 “먼저 도착해 유언 기록을 봤던 시누이(이수병의 여동생)가 본 내용과 나중에 유족들에게 보여준 유언의 내용이 달랐다”고 증언했다. 막내였던 김용원의 유언 가운데는 동생에게 가족들을 당부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기록대로라면 고인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유언을 했다. 장례시 종교의식을 거부한다고.

사형 판결과 집행 이후 쓰러져버린 유승옥씨는 남편의 마지막 가는 길마저 지켜보지 못했다. 교사 임용고시에서 전국 수석을 한 뒤 경기여고 교사로 재직했던 ‘수재’ 남편은, 그래서 죽어서도 자랑스러운 남편은 죄수복 차림으로 허접한 판자관에 담겨 땅에 묻혔다. 유씨는 그게 한이 된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강순희씨는 장례를 치른 뒤 100일을 누워 있었다. 강씨는 매주 산소에 가서 하늘과 땅과 세상을 향해 ‘박정희 살인마, 천벌을 받으라’고 세 번씩 크게 외쳤다. 박정희가 머리기사로 실린 신문을 꼭꼭 씹어먹었다. 박정희가 죽을 때까지 몇 년을 그렇게 살았다.

아내들은 남편을 묻은 날, 같이 죽었다. 살고 싶어 산 게 아니었다. 목숨을 이어간 유일한 이유는 자식들 때문이었다. 남편의 명예회복 때문이었다. 그날 이후 32년의 삶은 각자 소설 한 권씩의 분량이 됐다. 정보원과 담당 형사들의 감시는 그렇다 쳐도 이들이 맺고 있던 사회와의 끈은 모두 끊어졌다. ‘섬’에 살았다. 장사를 하고, 행상을 하고, 학습지를 돌리면서 억지로 살았다. 다시 숨을 제대로 쉬기 시작한 지는 채 몇 년이 되지 않는다.

이제는 할머니가 된 아내들에게 재심 판결에 대한 솔직한 소회를 들어봤다. 너무 오래 걸렸다고 말했다. 강씨는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는 해결될 줄 알았다. 오늘도 산소에 다녀왔다. 당신이 힘이 있다면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빨리 통일이 되게 도와달라고 했다”고 말했다. 유승옥씨는 “한편으로 고마우면서도 남편이 돌아올 수 없으니 가슴이 너무 아프다”고 했다.

“한숨만 나온다. 한마디로 너무 억울해서… 뭐가 억울하냐면 못된 짓 한 놈들이, 박정희 그놈은 죽었지만 동조해서 죽인 놈들이 우리하고 더도 말고 똑같이 당했으면…. 솔직히 무죄 판결… 분이 풀리지 않아. 사람이 없으니까, 살릴 수 없으니까…. 무죄 받은 사람을 죽여놨으니 어처구니가 없다. 솔직히 한마디로 원수 못 갚고 무죄라는 것만 받아야 하나 생각하면 너무 속상하다.” 이정숙씨의 말은 끊겼다 이어지기를 반복했다.

그 범죄자들은 왜 말이 없나

강순희씨는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편지지에 적힌 시 한 편을 건넸다. 날짜를 보니 남편을 뺏기고 누워 있던 때였다. 홍기선 감독의 작품 제목마냥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며’ 몸으로 쓴 시였다.

세월아 가거라
빨리 가거라
내 슬픔을 안고
빨리 가거라
멀리 멀리
세월아 가거라

첫 번째 당신을
죽인다고 할 때는
나, 묶인 당신을 바라보며
울며 몸부림치니
몸짓으로 나를 달래며
괜찮다고 괜찮다고
웃어주던 당신

두 번째 당신을
죽인다고 할 때는
나, 울지 않고
하얀 얼굴로
뒤돌아보는 당신을 향해
나를 믿으라고
내 가슴을 치며
절대로 죽지 않는다고
세 번씩이나
뒤돌아보는 당신에게
가슴쳐 보이고

나, 그 길로 달렸건만
그 길이 당신을 살리는 길인 줄 알고
나, 나 그 길로 밤낮으로
쉬지 않고 달렸건만
그 모진 놈들에게
기어이 당신을 뺏기고야 말았네
원통하도다 원통하도다
어쩌다 그 모진 놈들에게
잡히었나 잡히었나

세 번째 열세 놈의
죽일 값어치조차
없는 늙은이들이
당신을 죽인다고 할 때는
나, 힘껏 늙은이들을 향해
소리 질렀네

양산 하나 다 산산조각이 나도록
두들기며 소리 질렀네
바닥에 누운 채로
질질 끌려나와
거리로 동댕이쳐졌네

사람 살리시오
사람 죽이는 것
구경만 하지 말고
사람 살리시오

밤이 깊두록
목이 터져라 하고
소리 질렀네

강씨의 바람대로 세월이 빨리 가기는 했는데 의문이 들었다. 그때 그 범죄를 저지른 수많은 사람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지, 왜 그들은 아무 말이 없는지.



인민혁명당 사건, 그 암흑의 역사

‘북괴 지령받아 지하당 조직’ 혐의로 64년 41명·74년 23명 구속해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인민혁명당 사건은 박정희 정권 초기인 1964년 8월 중앙정보부(중정·현 국가정보원)가 ‘북괴의 지령을 받고 국가 변란을 획책한 지하당을 조직한’ 혐의로 41명을 구속하고 16명을 수배하면서 시작됐다.



사건을 넘겨받은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 4명 가운데 부장검사 이용훈과 검사 김병리·장원찬은 20일 동안의 수사에도 불구하고 중정이 발표한 혐의를 찾지 못해 ‘기소할 가치가 없다’며 사표를 냈다. 김형욱 당시 중정 부장의 압력으로 서울지검 서주연 검사장이 구속 마감일 숙직 담당이던 정명래 검사에게 13명에 대한 기소장에 서명하게 했다.
1965년 1월20일 선거공판에서 도예종, 양춘우는 반공법 위반으로 각각 징역 3년, 2년을 선고받고 나머지 11명은 무죄를 선고받았다. 검찰은 이에 불복해 항소심을 제기했고, 그해 5월29일 열린 항소심 선고 공판에서 재판부는 원심을 깨고 피고인 전원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1차 인혁당 사건이 불거진 지 10년 만인 1974년 4월 중정은 유신반대 투쟁을 이끌던 전국 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의 배후로 이른바 ‘인혁당 재건위’를 지목하고 국가보안법 위반 등 혐의로 23명을 구속했다. ‘2차 인혁당 사건’의 서곡이었다. 구속자 중 도예종·여정남·김용원·이수병·하재완·서도원·송상진·우홍선 8명은 이듬해 4월 사형을 선고받고, 나머지 15명도 무기징역에서 징역 15년에 이르는 중형을 선고받았다. 사형 선고를 받은 8명은 대법원 확정판결이 내려진 지 18시간 만인 4월9일 사형이 집행됐다. 이 사건은 대표적인 인권침해 사건으로 국외에도 알려졌다. 국제법학자협회는 1975년 4월9일을 ‘사법 사상 암흑의 날’로 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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