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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건이 진 자리, 노무현이 남았다

등록 2007-01-25 00:00 수정 2020-05-02 04:24

결국 ‘간이역’에 그치고 만 고건, 그의 낙마가 남긴 ‘노무현 주의보’…여권 후보의 가장 큰 걸림돌인 ‘대통령과의 관계’를 누가 뛰어넘을까

▣ 류이근 기자 ryuyigeun@hani.co.kr

결국 고건 전 총리는 ‘간이역’에 그쳤다.

그는 지난 1월16일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왜 대통령 되기를 포기했는지 온갖 억측을 뒤로한 채 훌쩍 지방으로 떠났다. 고 전 총리가 서울로 돌아오더라도 다시 정치판으로 복귀하는 일은 없을 것같다.

정치란 참 야박하다. 간간이 거품 시비가 있긴 했어도 그는 ‘다음에 대통령이 되실 분’들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1위를 달렸다. 그에 비해 ‘애도’의 주간은 너무 짧았다.

16일 오후부터 사흘 동안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기자가 만난 많은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의원들은 그에 대해 “안타깝다”는 말 외에 특별히 기억할 만한 코멘트를 하지 않았다. 쉽게 잊혀지는 정치인, 그것도 그의 한계였을까? 그를 다룬 기사들도 이틀 만에 종적을 감췄다. 그가 남긴 정치 유산인 한 줌의 지지율을 누가 상속받을까에 그나마 계산과 관심이 가 있을 뿐이었다. 이미 퇴장한 그의 이름이 당분간 언급되는 것도 단지 이 때문일 것이다.

여권 후보에겐 불가피한 화두 ‘노무현’

고건의 대선 경주 포기는 그의 유산과 빈자리를 노리는 이들에겐 희망이다. 그보다 앞서 달리던 대선 주자들보다 그의 뒤에 처져 있는 이들에겐 더욱더 그렇다. 또 다른 주자들에겐 마라톤 코스를 달릴 때 머릿속에 새겨야 할 몇 가지 주의점들 가운데 또 하나를 추가하는 정치 학습의 기회였다. 바로 ‘노무현 주의보’다.

고 전 총리는 최근 하향 추세를 겪으며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에게도 밀렸지만 범여권의 대선 주자들 가운데 비교할 대상이 없을 만큼 부동의 1위를 지켜왔다. 그런 그가 노 대통령이 의도한 건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노 대통령과 한바탕 전쟁을 치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힘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642호 ‘고건은 간이역에 그칠 것인가’ 참조). 물론 고건은 이미 자신을 중심으로 한 정치세력의 결집이 한 발짝도 진전되지 않으면서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그래서 그가 쓰러진 것을 순전히 노 대통령 탓으로만 볼 순 없다. 하지만 노 대통령이 그에게 결정타를 날렸다는 해석은 무리는 아니다. 이는 여의도에서 떠도는 “대통령은 누구를 대통령이 되게 할 순 없지만, 안 되게 할 수 있는 힘은 여전히 갖고 있다”는 말을 되씹게 만든다. 고건의 대권 포기를 계기로 맨 먼저 ‘노무현 다시보기’를 해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노 대통령은 고 전 총리와 한창 설전을 주고받던 지난해 12월26일 국무회의에서 이런 말을 했다. “난 장관 7개월 만에 보도를 통해 제 해임 소식을 듣고 (해양수산부 장관을) 그만두었지만, 지금까지 그 대통령(김대중)을 비방하거나 그렇게 비판해 말한 일이 없다.” 그의 말은 비단 고 전 총리뿐 아니라 각료를 지낸 뒤 자신과 ‘맞장’을 뜬 열린우리당 정동영 전 의장과 김근태 현 의장을 겨낭한 것으로도 해석됐다. 분명한 경고였다. 여권의 잠재적 대선 후보들이 경선을 통해 대선 후보가 되기 전까지 부딪혀야 할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노 대통령이다. 정치컨설턴트인 김윤재 변호사는 “열린우리당의 모든 세력이 여기에 포로가 돼 있다”고 지적했다. 여권 후보로 대통령을 꿈꾸는 이들에게 노 대통령과의 관계 설정 방식은 불편하지만 피할 수 없는 화두다. 김근태 캠프의 한 인사는 “노무현의 힘은 경선 전까지 계속 후보들에게 작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DJ와 YS, JP로 상징되는 ‘3김 정치’를 뛰어넘겠다던 노 대통령은 그들에게 붙은 ‘정치 9단’이라는 단수도 뛰어넘었다. 이제 노 대통령은 ‘정치 10단’으로 불린다. 대선이 치러질 올해 예측할 수 없는 커다란 정치적 변수들이 터져나올텐데, 이미 나온 2개는 모두 노 대통령과 직·간접적으로 연계됐다. 개헌 카드는 그가 주도적으로 던졌다. 고건의 대권 포기 과정에 노 대통령은 “그 문제는 더 무슨 얘기를 하는 게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1월17일 중앙언론사 편집·보도국장 초청 간담회)라고 얘기했지만, 노무현의 이름을 빼놓고 넘어갈 순 없다. 노무현에 대한 지지나 호불호를 떠나 그의 의제 설정 능력과 대통령중심제에서 나오는 현실적 힘은 여전히 막강하다. 이런 이유로 여의도에서 “노무현 대통령에겐 레임덕(임기 말 권력 누수)이 없다”고 말하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정동영에겐 재도약의 기회 될수도

노무현 주의보는 비단 여권의 대선 후보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닐 수 있다. 노 대통령은 편집·보도 국장들과의 간담회에서 “국회 표결에서 설사 (개헌안 부결로) 이긴다 할지라도 그 정당과 그 당의 후보들은 모두 두고두고 이 부담을 짊어지고 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나라당 대선 후보들을 향해 작정하고 한 말이다. 다음날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가 최고위원회 회의에서 “위험천만, 안하무인, 초헌법적 발상”이라고 비판한 것도 노 대통령의 다음수를 의식한 때문이다. 노 대통령과 한나라당 유력 대선 후보와의 직접적인 ‘싸움’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노 대통령이 개헌 발의를 제안하자,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는 “참 나쁜 대통령”이라고 비난했다. 그러자 노 대통령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떠올리게 만드는 “나쁜 대통령은 자기를 위해 개헌하는 대통령”이라고 받아쳤고, 박 전 대표는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노 대통령이 지지율은 낮지만 어떤 사안에 대해 명분을 쥐고 있을 경우, 야당의 대선 후보가 정면으로 싸움을 걸다가 자칫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

결국 여든 야든 대선 후보들은 ‘노무현’을 뛰어넘어야 한다. 방식은 다양하다. 싸워 이길 수도, 손을 맞잡을 수도, 무시하고 넘어갈 수도 있다. 그래서 여전히 노무현의 틀에 갇힌 여권은 문제다. 김윤재 변호사는 “노무현 대통령이 여당을 더욱 옥죄고 제약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상황으로 여권의 대선 후보가 노 대통령과 함께 길을 간다면 대선은 지는 게임”이라고 말했다.

고건의 낙마를 계기로 노무현 다음으로 다시 주목받는 인물은 정동영이다. 정동영 전 의장의 캠프인 나라비전연구소의 이재경 연구실장은 “반사적 이익은 반사적 이익으로 사라진다. 고건의 빈자리 때문에 반사적 효과로 생기는 몇%의 지지율 상승엔 큰 의미를 두진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고건의 유산은 분명 정동영에겐 재도약의 기회다. 1월18일 여의도 대하빌딩 6층 나라비전연구소의 직원들은 이날 아침에 배달된 의 대선 후보 여론조사에서 7%가 넘는 정 전 장관의 지지율을 확인한 뒤 오랜만에 밝은 표정들이었다. 전북 군산 출신인 고 전 총리의 지지층 가운데 30% 안팎이 지역적으로 호남이었기 때문에 전북 전주 출신인 정 전 의장이 가장 큰 수혜를 입을 것이라는 분석이 우세하고, 실제 여론조사로도 나타나고 있다. 한귀영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실장은 “정 전 의장의 지지 기반이 거의 형해화된 상황에서 고 전 총리가 빠진 자리로 인해 운신의 폭이 넓어졌다”고 평가했다. 그런 측면에서 전남 목포가 고향인 천정배 전 법무부 장관도 주목받고 있다. 물론 고건이 가졌던 지지율이 단기적으로 이명박과 박근혜에게로 훨씬 더 많이 넘어갔지만, 정치전문가들은 시간이 흘러 여권 쪽의 후보가 뜨거나 정해지면 돌아올 표로 분석한다. 임종석 열린우리당 의원은 “현재로선 호남 유권자들이 전반적으로 부동층이 된 것”이라며 “정동영도 고건 반사이익을 기대할 게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중간 사라져 명확한 전선 형성될 수도

여권의 제3 후보들의 경우에도 고건이란 큰 지분을 가진 범여권의 선두주자가 빠짐에 따라 진입장벽이 낮아지는 기대감이 생겼다. 이들 개개인에겐 분명 희망의 신호로 읽힐 수 있다. 중간지대인 고건이 사라지면서 한나라당과 반한나라당의 명확한 전선이 형성될 것이라는 전망도 커지고 있다. 한나라당은 이를 우려한다. 정두언 한나라당 의원은 “여권에 당장 우리의 대항마가 없는 게 좋은 게 아니다. 국민들의 균형 심리가 작용해서 장기적으로 조정에 들어갈 거고, 앞으로의 상황도 더 예측하기 힘들어졌다”고 말했다. 여권 내에서 뜻을 모아 서둘러 ‘고건 이상의’ 새로운 후보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판을 뒤엎기 어렵게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 의식의 고조도 역발상으로 보면 여권이 얻은 소득일 수 있다.

하지만 범여권 전체의 틀에선 역시 손해로 볼 만한 지점들이 적지 않다. 어쨌든 정계 개편 과정에서 활용할 수 있는 흥행의 한 요소가 사라졌다. 의미 있는 정치 세력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크게 인물, 명분, 공간 3가지가 필요하다. 인물은 기수, 명분은 깃발, 공간은 그 깃발을 꽂을 땅이다. 이 세 요소가 항상 딱 맞아떨어질 필요는 없겠지만, 고건이란 기수 하나가 떠나면서 통합신당 논의도 어느 정도 탄력을 잃었다. 고원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 선임연구원은 한 발짝 더 나아가 “고 전 총리의 퇴장은 과거 회귀, 상층부의 이합집산, 세력중심의 판짜기 시도를 통해선 여권의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노무현은 2002년 초 국민참여 경선에서 당시 가장 유력했던 후보인 이인제를 누르면서 더욱 큰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최소한 이인제와 같은 몫을 해줄 징검다리가 될 수 있는 고 전 총리가 없는 오픈프라이머리(완전 국민참여 경선제)는 1등을 할 후보의 경쟁력을 극대화하는데 한계를 노정한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고 전 총리의 사퇴는 너무 빨랐다. 경쟁력이라는 싹은 본래 자신보다 덩치가 큰 인물과 승부를 벌이면서 자라기 때문이다.

고건의 빈자리 때문에 주목받는 인물은 또 있다. 한나라당 쪽의 손학규 전 경기지사다. 적지 않은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고건이 내걸었던 중도의 기치를 손 전 지사가 대신할 수 있다고 본다. 재밌는 풍경이긴 하지만 현실성이 떨어진다. 손 전 지사가 지금의 상황을 정치적으로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아무리 애매한 표현을 쓴다 하더라도, 그가 한나라당의 대선 후보가 되기 어려운 것 이상으로 여권의 후보가 되기도 어려운 게 현실이다. ‘제2의 이인제’의 운명을 그도 잘 알고 있다.

한국 정치사에 어떤 의미로 남을까

지는 사람이 있으면 뜨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고건은 이미 졌다. 필연이라 할 순 없지만 여권에서 새로운 후보가 다양한 변수 속에서 경쟁을 거쳐 떠오를 것이다.

한 발짝 비켜나서 고건의 자발적 대선 중도 포기의 정치적 의미도 짚어볼 필요가 있다. 고건의 사퇴를 강금실 전 서울시장 후보의 말을 빌려 “아름다운 포기”로 규정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어찌 됐든 그의 이름도 한국 정치사의 한 페이지에 기록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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