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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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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난민, 비교체험 극과 극!

등록 2007-01-13 00:00 수정 2020-05-03 04:24

힘 있고 돈 많은 자들은 ‘기회의 땅’에서 15만 달러에 즉석에서 거주비자를 사고… 돈도 배경도 없이 안전을 찾아 떠나온 이들은 날마다 여러 모양의 전쟁을 치르고…

▣ 암만=글·사진 김동문 전문위원 yahiya@hanmail.net

이라크를 벗어났다. 다 전쟁 때문이다. 그러나 전쟁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날 방법은 없다. 이라크에 남아 있는 가족들과 친척들의 슬픈 이야기들이 언제 전해질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르단에 사는 이라크인들 중에는 이라크 위성방송을 애써 보지 않는 이들이 있다. 조국과 고향의 아픈 모습을 그대로 직면해야 하는 탓이다.

요르단에서 만날 수 있는 이라크인들은 사연도 가지각색이다. 이라크 전쟁 이전에 나온 사람, 전쟁 직후에 나온 사람, 점령이 계속되면서 유혈 사태를 피해 나온 사람…. 형편과 처지에 따라 이라크인들의 요르단 일상은 다른 그림을 그리고 있다.

암만의 강남, 밤이면 이라크인들의 해방구

“이 지역은 이라크인들이 넘쳐나요. 밤이면 이라크인들의 해방구가 돼버리지요.” “여기에 오면 모처럼 마음의 여유를 찾을 수 있어요. 그래서 주말이면 이곳을 찾아듭니다.” 한국의 강남에 해당하는 암만 서부의 라비야 지역은 이라크 이주민들의 새로운 명소가 된 지 오래다. 그중에도 ‘라비야 서클’ 주변은 ‘작은 바그다드’로 불린다. ‘아부 알카심’이나 ‘캇도우리’ 같은 이라크 전문 식당이나 이라크인들이 즐겨 찾는 ‘알마우리디’와 ‘월드 도넛 카페’와 같은 카페도 늘고 있다.

“샤쿠 마쿠?”(잘 지내세요?) “슐로넥?”(어떻게 지내세요?) “젠!”(좋아요!) 아부 알카심 식당, 휴일인 금요일 오후 늦은 점심을 즐기는 이라크인들이 줄을 선다. 요르단에 몇 안 되는 이라크 음식 전문 식당이다. 식당 안에 들어서면 이라크인들의 아랍어 사투리가 진하게 풍겨난다. 이곳은 작은 이라크고 바그다드다. 모처럼 가족이 다 같이 나와 자리를 잡고 이라크의 맛을 즐기는가 하면, 음식을 잔뜩 사가는 이라크인들로 번잡하다. 그 인파 속에 가족과 함께 온 와에드가 있었다. “한국에서 물건을 들여와 이라크에 판매하는 무역업을 하고 있다. 지금 하고 있는 비즈니스 상황은 좋은 편이다.” 아들 셋을 둔 와에드는 전쟁을 피해 2년 전 암만에 정착했다.

그는 전쟁 직후에 이라크를 빠져나온 이들처럼 이라크에서 나름대로 경제적 기반을 갖추고 있었다. 전쟁 초기에 이라크를 벗어난 이들은 대개 사담 후세인 정권에서 부귀와 권력을 누렸던 이들과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사업가들이 주를 이뤘다. 요르단을 제2의 근거지로 삼고 이라크를 오가는 정·재계 인사들도 적지 않다. 암만에서 이라크를 상대로 무역업을 하고 있는 칼리드(56)는 “육로를 이용해 암만과 바그다드를 오가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이나 마찬가지”라며 “예전엔 국경택시를 타거나 승용차를 몰고 다녔지만, 지금 유일한 교통수단은 항공편뿐”이라고 말했다.

주변에 있는 카페 알마우리디 안으로 들어서자 커피와 차를 마시며 연이어 물담배 ‘아르길라’ 연기를 뿜어내는 이들로 가득하다. 카페는 그야말로 너구리굴처럼 뿌연 연기로 차 있다. 카페 한쪽에서는 무선 인터넷을 즐기고, 주사위 놀이 ‘타울레’와 도미노 게임에 열중하는 이들도 눈에 띤다. 이들 중 대다수는 이라크 이주민들이다. 밤이 깊어갈수록 모여드는 이라크인들로 카페가 낮보다 북적였다.

버젓이 이라크 번호판을 단 고급 차량

이라크인들 무리 안엔 시아파도 있고, 수니파도 있다. 바그다드 출신도 있고, 북부 모술 지역에서 온 이도 있다. 대학교수 집안 출신도 있고, 사업가나 국영기업체 고위 임원 집안 출신도 있다. 후사인과 무한나드, 자이드, 알라아도 마찬가지였다. 가족을 바그다드에 두고 홀로 유학 생활을 하고 있는 자이드와 후사인, 가족이 다 이주해온 무한나드와 알라아. 이들에게 종파나 집안 배경은 중요하지 않았다. 암만 북부 이르비드에 있는 과학기술대에 재학 중인 18살 동갑내기 이라크 출신 학생들이다. 1990년 걸프전쟁이 불러온 경제 제재의 피해자들이고,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의 희생자들이다.

“요르단에서 사는 데는 불편한 것도 있지만 희망과 안전이 있고, 하고 싶은 공부를 마음껏 할 수 있어서 좋다. 그렇지만 이라크의 암담한 미래 때문에 갑갑증은 여전하다.” 후사인의 말에 듣고 있던 친구들도 고개를 끄덕거린다. 혹독한 경제 제재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도 못한 이들은 이어진 전쟁으로 그나마 교육받을 기회마저 박탈됐다. 이들 나이 또래의 이라크 젊은이들은 그 누구 못지않은 어려운 시기를 가장 민감한 나이에 겪고 있다. 분쟁과 갈등, 절망과 포기할 수 없는 희망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

요르단 최대의 쇼핑몰인 암만 중심가의 ‘메카몰’. 오래전부터 이곳을 ‘이라크인들이 접수했다’는 현지인들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리고 있다. 이른바 ‘물 좋다’는 곳에도 이라크인들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이라크 출신으로 보이는 청소년들이 몰려다니는 모습을 바라보는 현지인들의 시선이 곱지 않다. 돈과 배경의 유무에 따라 이라크 이주민들의 요르단 생활은 극단적으로 엇갈린다. 경제력이 있는 이주민들의 암만 생활은 그야말로 ‘광’이 난다. 이들은 이라크보다 나은 경제 환경과 사업 배경, 교육과 의료 혜택을 부담없이 누릴 수 있다. 요르단 거주비자를 받는 데도 어려움이 없다. 최근 요르단 정부는 이라크인들의 체류 조건을 강화하면서, 미화 15만달러(약 1억4천만원)만 예치하면 즉석에서 거주비자를 내주고 있다. 재력이 있는 이들에겐 큰 부담이 아니다.

부유한 이라크인들은 주로 암만 서쪽 지역에 모여 살고 있다. 최대의 부촌인 압둔 지역은 물론 라비야 등 고급 주택 지역에 이라크 부유층이 소유한 집들이 즐비하다. 수백만~수천만달러를 호가하는 호화 저택에 사는 전·현직 이라크 고위 관료들도 있다. 그래서인지 버젓이 이라크 번호판을 단 고급 차량들도 쉴 새 없이 오간다. 이 지역에 사는 이라크인들은 전혀 ‘문화 충격’을 겪지 않고, 안전이 보장된 환경에서 살고 있다.

가장 두려운 것은 ‘국외 추방’

그러니 돈 있고 힘 있는 이라크인들에게 요르단은 ‘기회의 땅’이다. ‘물정’은 모르고 돈은 있으니, 현지인 집주인이 부르는 대로 집값을 지불한다. 집값이 오를 수밖에 없다. 일부 요르단 현지인들은 “이라크 부유층 때문에 부동산 가격은 물론 생활 물가까지 뛰고 있다”고 볼멘소리를 하기도 한다. 지난해 11월 암만 시내 호텔 연쇄 폭탄테러의 배후에 이라크인들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이주민들이 더욱 곤경에 처했지만, 힘 있고 경제력 있는 이라크인들에겐 ‘남의 얘기’였다. 하지만 이들과는 전혀 다른, 날마다 여러 모양의 ‘전쟁’을 치르며 살아가야 하는 이라크인들이 더 많다. 돈도 배경도 없이, 안전을 찾아 조국과 일가친척을 떠나온 이들이다.

“며칠 전에도 ‘하쉬미 쉬말리’ 지역 인터넷 카페에 단속 경찰들이 들이닥쳐, 이라크인들을 무더기로 체포해갔다.” 한 이라크 출신 이주민의 표정에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암만 서부의 부유층 지역과 달리 서민 지역인 하쉬미 쉬말리·마르카·자발 아슈라피예·자발 마스다르·자발 나디프·자발 타즈 같은 곳은 ‘고립된 섬’처럼 다가온다. 요르단 토박이들보다 이라크인이나 이집트·팔레스타인 실향민들이 모여 사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주민’이라기보다 ‘난민’에 가까워 보인다.

이들 지역 거주자 대다수는 불법 체류자다. 체류 기간을 하루 넘길 때마다 우리 돈 2천원가량의 과태료를 내야 한다. 그럼에도 하루 이틀도 아니고 몇 달 몇 년씩 불법 체류 상태에 있는 이들이 적지 않다. 불법 체류자들의 하루하루는 언제나 전쟁이다. 이라크인 불법 체류자를 노린 집중 단속이 무차별적으로 벌어지기 때문이다. 불법 체류자 단속 경찰 ‘와피딘’은 사복 경찰이다. 불법 체류 이라크인들이 와피딘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연행된다고 비인격적인 대우나 인종 차별을 받게 되는 일은 없다. 다만 한 가지, ‘전쟁의 땅’을 피해온 그들은 ‘국외 추방’이 두려울 뿐이다.

‘연말연시 특별 방범 기간’을 맞아, 서민층이 몰려 있는 암만 구시가지 곳곳은 평소와 달리 많은 경찰들이 근무를 하고 있다. 이들을 바라보는 이라크인들의 심기가 편할 리 없다. “저게 불법 체류자 단속 차량이다.” 이라크 출신 와파(38)는 “연말연시를 맞아 불법 체류 이라크인들 단속이 대폭 강화됐다”고 힘없이 말했다. 실제로 평소와 달리 이라크인 젊은이들의 움직임은 뜸한데도, 구시가지 주요 도로변에선 단속 나온 경찰들의 불심 검문을 받고 연행되는 이라크인들의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암만 거주자 3명 중 1명은 이라크 난민

단속의 표적이 되는 것은 주로 차림새가 허름한 이들인데, 이슬람 명절이나 특별한 절기만 되면 단속이 강화된다. 와파는 “일단 단속반이 뜨면 버스 가득 추방 대상자들을 채울 때까지 무차별 단속을 벌이기 일쑤”라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장기 불법 체류 이라크인들은 나름의 ‘노하우’가 있다. 우선 외출할 때는 말끔한 옷차림을 해 단속 경찰의 시선을 피한다. 말투도 생김새도 이라크인 티를 최대한 벗어버린다. 공휴일이나 명절 기간에는 나들이를 삼가고, 돈이 들더라도 시내 나들이를 할 때는 택시를 타고 오간다.

그럼에도 요르단으로 몰려드는 이라크인들은 갈수록 늘고 있다. 지난 한 해(11월 말 현재) 이라크-요르단 국경인 르웨이셰드를 통과한 이라크인은 입국자가 24만241명인 반면, 출국자는 19만2021명이다. 단순 계산만으로도 요르단에 남은 이라크인이 4만8220명에 이르는 셈이다. 최근 들어선 매일 1천여 명의 이라크인들이 요르단으로 밀려들고 있다. 까다로운 입국 심사 끝에 입국을 거부당해 발길을 돌리는 이들도 상당수인 점을 감안할 때, 요르단을 향해 출발하는 이라크인들은 이보다 훨씬 많을 게다.

유엔 난민고등판무관실과 요르단 정부 등이 내놓은 자료를 종합하면, 현재 요르단(주로 암만)에 거주하고 있는 이라크인은 약 75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암만의 상주인구가 250여만 명인 것을 고려하면, 암만 거주자 3명 가운데 1명은 이라크 난민이란 얘기다. 이 밖에 여전히 이라크를 떠돌고 있는 난민이 16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고 시리아(약 80만 명), 이집트(약 15만 명), 이란(약 5만4천 명), 레바논(약 2만~4만 명) 등지에도 이라크 난민들이 들끓고 있다.

한때 아랍권을 호령하던 강국 이라크는 이렇듯 나락으로 떨어져 있다. 외국군에 점령된 채, 수니와 시아로 갈려 서로에게 총질을 해대고 있다. 그리고 주민들은 불안한 오늘과 암담한 내일을 피해 낯선 땅으로 향하고 있다. 하지만 새로 정착한 땅에도 평화는 없다. 또 다른 전쟁이 그들을 집요하게 따라다니고 있다. 이라크 안에 살고 있건, 이라크를 탈출했건 이라크인들은 모두 전쟁을 겪고 있다. 스스로 운명을 선택할 수 없었던 이라크인들은 말한다. ‘아랍 민족주의는 어디에 있는 거냐’고.

아랍 민족주의는 어디에…

미국이 가져다준 ‘미국식 민주주의’는 이라크인들의 안전한 삶조차 담보해내지 못했다. 그러니 전쟁은 과연 무엇을,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 묻게 된다. 피해자는 끝없이 양산되는데, 가해자는 어디에도 없다. 그 역설의 한가운데서 고향 땅을 저버릴 수밖에 없었던 이라크인들이 외롭게 서 있다.



저당잡힌 청소년의 미래

16만 명 중 ‘공식’ 학생은 6만 명… 정부 비공식으로 난민 입학 제한


“공부하니까 좋아요. 학교 오기 전엔 집에서만 놀았어요. 밖에 나가면 위험하다고…, 애들도 안 놀아주고.” “요르단 공립학교를 다녔는데, 얘들이 이라크에서 왔다고 놀렸어요. 그런데 여기선 그런 게 없어 좋아요.”
암만 시내에 있는 한 비인가 이라크인 학교 수업 현장에서 만난 아이들의 얘기다. 유엔과 이라크 난민지원단체 등의 추정치를 보면, 현재 암만에 살고 있는 5∼17살 이라크 어린이와 청소년은 약 16만 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지난해 요르단 국·공립학교를 다닌 이라크 학생은 6만여 명에 불과하다. 미취학 연령대 어린이를 빼더라도 수만 명의 이라크 출신 어린이·청소년이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암만 일대에선 3곳의 이라크인 학교가 운영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라크 출신 학생들의 폭발적 증가는 가뜩이나 열악한 요르단 일부 지역 학교의 교육 환경을 더욱 어렵게 만든 주범으로 인식되곤 한다. 이라크 난민 대다수가 몰려사는 암만 빈민층 거주 지역은 그렇잖아도 과밀 학급으로 운영돼온 터였다. 현지인 학부모들의 불만이 쌓여갔고, 결국 요르단 정부는 ‘비공식적’으로 거주 비자가 없는 이라크 난민 가정의 자녀들이 국·공립학교에 등록하는 것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암만 외곽의 한 교회 건물을 빌려 비인가 교육 과정인 이라크인 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다우드(가명)는 “학습 환경도 엉망인 이곳으로 이라크 청소년들이 몰리는 이유는 처지가 같은 또래끼리 있다 보니 안정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라며 “학비를 내지 않아도 된다는 것도 중요한 이유일 것”이라고 말했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1학년 과정까지 개설해 운영하고 있는 이 학교에선 현재 450여 명의 학생들이 공부를 하고 있다. 학생들 가운데는 가족이 이라크의 여러 주변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이산가족’인 경우도 적지 않다.
좁은 공간에 이미 ‘과밀 학급’을 넘어섰지만, 지금도 입학 허가를 기다리는 학생들이 줄을 서 있다. 학교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동네에 사는 학생들이 많기 때문에 학교에선 최소한의 실비(한 달 약 6천원)을 받고 통학버스를 운영하고 있다. 이른 아침부터 마르카·하쉬미 쉬말리·나세르 등 암만 달동네를 돌며 학생들을 태우다 보면 낡은 버스는 늘 정원을 2~3배 초과하기 마련이다.
학생들의 나이와 학년도 천차만별인데, 제때 교육을 받지 못한 ‘만학도’가 적지 않은 탓이다. 교사인 파티마(가명)는 “정상적인 교육 환경에서 공부를 한 경험이 없는 아이들이 대부분이라 일정한 나이가 되어도 글을 읽고 쓰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1990년 사담 후세인 정권의 쿠웨이트 침공 이후 장기간 이어진 유엔의 경제 제재, 그리고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점령으로 이라크 청소년들의 미래가 저당 잡히고 만 것이다.




“후세인은 여전히 대통령”

이라크와 요르단을 오가는 국경택시 기사 6명과 나눈 대화

“내가 행복한 것인지 슬픈 것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적어도 분명한 것은 이라크는 이라크인들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를 알았던 후세인 같은 대통령을 다시는 갖지 못할 것이란 점이다.”
사담 후세인은 처형됐지만, 공개적인 자리에서 그의 죽음에 환호하는 이라크 피난민들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언론에는 기쁨의 함성을 토해내는 이들이 종종 등장했지만, 암만에 나와 살고 있는 이라크인들은 속 시원히 속내를 드러내 보이지 않았다. 이라크와 요르단을 오가는 ‘국경택시’ 기사들을 찾아나선 이유다.
암만 구시가지에 자리한 국경택시 정류장은 ‘바그다드 터미널’로 불린다. 차를 마시며 얘기를 나누고 있는 이라크인 운전기사들 사이에 끼어 앉아 후세인의 죽음에 대해 물었다. 바그다드 중심가 알만수르 출신이라는 무스타파(33)와 뉴바그다드 출신 왈리드(36), 바그다드 외곽 도라 지역 출신의 아마드(35)와 루사파 출신의 아부 미리얌(37), 아다미야 출신의 아부 왈리드(47)와 바그다드 서부에서 왔다는 아부 세이프(40)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말을 이었다.
“사담 후세인이 죽었다. 이라크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의 죽음을 기뻐하는 자들은 (시아파 강경지도자 무크타다) 사드르주의자들과 쿠르드족들뿐이다.”
“시아파라고 모두가 사담의 죽음을 환호하진 않았다.”
“나는 후세인 대통령 지지자이다. 그는 여전히 이라크의 대통령이다.”
“그가 독재자였는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독재자는 세계 곳곳에 얼마든지 있다. 북한의 김정일도 독재자가 아닌가?”
“수니파는 미국을 반대하고, 시아파는 미국을 지지한다. 북한이 미국을 반대하고 남한이 미국의 ‘지배’를 받는 것과 비슷하다.”
“전쟁 전과 후를 비교해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전쟁 전 바그다드는 물도, 전기도, 안전도, 일자리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 모든 게 없다.”
“뭐가 민주주의인가? 민주주의, 웃기는 일이다.”
“사담은 아랍의 영도자요, 위대한 용사였다. 그를 죽인 것은 살인이고, 범죄다.”
이들은 모두 수니파 무슬림이라고 스스로 밝혔다. 요르단에 나와 있는 이라크인 가운데 절반 이상은 수니파다. 나머지 이주민들은 시아파 무슬림이 많은데, 10% 정도는 기독교인들이다. 시아파 이주민들은 조심스럽게 후세인의 죽음을 “그 때문에 죽거나 고통받은 이들의 한을 풀어주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반면 기독교도인 이주민들은 그의 죽음에 대해 “안타깝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았다. 고국을 떠난 이라크인들도 출신 지역과 종파에 따라 넘어서기 쉽지 않아 보이는 ‘감정의 벽’을 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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