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북 지원이 북핵 문제 해결 과정과 연계되어 있는 복잡한 상황…6자 회담 재개와 원활한 논의를 위해서라도 ‘입구론’ 입장에 서야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보릿고개가 태산보다 높다’는 말이 있다. 은 이를 ‘한 해 동안 농사지은 식량을 가지고 다음해 보리가 날 때까지 견디어나가기가 매우 힘듦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설명한다. ‘춘궁기’니 ‘춘황’이니 하는 표현도 겨울을 나며 묵은 곡식이 바닥을 보인 뒤 4~5월께 햇보리가 나올 때까지 어렵기만 한 농촌의 식량 사정을 일컫는다. 남한에선 이제 사전에서나 그 뜻을 헤아릴 수 있는 이 낱말들이 북한에선 여전히 목숨이 걸린 현실어로 통용된다. 반세기 흩어져 살아온 역사가 새삼 기막히다.
지난해 7월 북한의 동시다발 미사일 발사 실험 이후 중단된 쌀·비료 등 대북 인도 지원 재개 문제를 두고 정부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북한의 식량부족 사태가 ‘대량 아사’의 재연으로 이어질 것이란 국내외의 경고가 나오고 있지만, 북한이 핵실험까지 벌인 마당에 인도 지원 재개의 ‘명분’을 찾기가 쉽지 않은 탓이다. 이재정 통일부 장관이 12월28일 오후 취임 뒤 처음으로 한 언론 브리핑에서 △6자회담 진전 △남북대화 재개 △국민의 공감대 형성 등을 대북 인도 지원 재개를 위한 전제로 꼽은 것도 이 때문이다.
이 장관은 이날 브리핑에서 “(대북 인도 지원) 재개의 방법을 빠른 시간 내에 만들어가도록 하겠다는 것이 제가 갖고 있는 원칙”이라고 덧붙였지만, 조만간 대북 인도 지원이 재개될 것으로 보는 이들은 많지 않다. 정부 스스로 대북 인도 지원 문제를 북핵 문제 해결 과정과 교묘히 연계시켜놓은 탓이다. 이른바 ‘출구론’의 함정이다. 시계를 조금만 거꾸로 돌려보자.
‘보릿고개’ 목숨 걸린 현실어인데…
“6자회담 국면을 보지 않을 수 없고 그래서 어렵지만, 의연하게 상황을 감내하며 남북관계를 개선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도록 여러 노력을 하겠다. 북한이 6자회담에 복귀한다면 유보하고 있는 쌀과 비료 지원을 재개할 생각이다.”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은 지난 9월22일 서울 광장동 워커힐호텔에서 열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지역대표·자문위원 워크숍에서 대북 인도 지원 문제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동시다발 미사일 발사 실험으로 중단된 대북 인도 지원 문제를 어떻게든 풀어야 한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읽힌다.
하지만 그의 이런 발언이 나온 지 불과 열흘 만에 북한은 핵실험을 강행했고, 이어 유엔 차원의 대북 제재 결의안이 통과됐다. 정부로선 미사일에 이어 핵이란 ‘추가 상황’이 벌어진데다, 국제사회의 움직임을 거스를 ‘명분’을 쉽게 찾아내지 못했다. 북한의 전격적인 회담 복귀 발표가 나온 뒤에도 인도 지원 재개 결정을 선뜻 내리지 못한 채 시점을 놓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리고 12월18~22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6자회담 5차 2단계 회의가 큰 소득 없이 휴회에 들어가면서 또다시 발목을 붙잡히고 말았다.
물론 이번 회담이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난 것은 아니다. 1월 하순 회담이 재개될 전망이고, 회담 진전의 최대 걸림돌인 ‘방코델타아시아’(BDA) 등 대북 금융제재 문제에 대해 북-미가 양자접촉을 하기로 한 점 등은 전문가들 사이에서 ‘조심스런 낙관론’의 근거가 되고 있다. 조성렬 국제문제조사연구소 기획실장은 “미국이 북핵 문제 해결을 ‘동결-신고-사찰-폐기’ 등 4단계로 나누고, 핵 폐기로 가는 첫 단계인 동결 시점에서 상주대표부 교환과 종전선언문 채택 가능성을 내비친 것은 북으로서도 매력적인 제안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선거 국면에선 운신의 폭 더 좁아져
어차피 이번 회담은 ‘지나가는 회담’이었던 만큼 1월 하순 회담이 재개되면 구체적인 성과가 있을 수 있다는 게 조 실장의 지적이다. 그는 “정부 입장에선 스스로 대북 지원을 끊어놓고 핵실험까지 이어졌는데, 아무런 변화가 없는 상황에서 인도 지원을 재개한다면 보수진영의 공세에 시달릴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며 “자가당착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대북 지원 재개를 쉽게 결정할 수 없는 상황인 만큼, 차기 회담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회담을 통해 핵 시설 동결과 그에 따른 보상이란 ‘초기 이행단계’에 북-미가 합의한다면, 이를 대북 인도 지원 재개의 명분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게다.
물론 여기에는 전제가 있다. 6자회담 재개 시점에 열릴 금융제재 문제를 둘러싼 북-미 양자접촉이 가시적인 성과를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이정철 숭실대 교수(정치외교학)는 “이번 회담은 사실상 6자회담 참가국이 모여 미국이 그동안 거부해온 북-미 양자접촉을 할 수 있도록 체면을 살려준 것”이라며 “방코델타아시아 문제가 풀려나가는 상황에 모든 게 달려 있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6자회담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고 보는 게 맞을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마냥 낙관만 할 순 없는 상황이란 게다.
시간도 많지 않다. 6자회담 진전을 마냥 기다리기엔 북한의 식량 상황이 워낙 절박하다. 한 외교안보 전문가는 “지난 가을걷이가 물난리 등으로 예년보다 적었다지만, 그래도 겨울까진 이를 통해 그럭저럭 버틸 수 있을 것”이라며 “문제는 다가오는 봄철”이라고 말했다. 대통령 선거의 해를 맞아 신년 벽두부터 빡빡한 국내 정치 일정도 대북 인도 지원 재개 결정의 시급성을 더해준다. 당장 2월이면 열린우리당이 당의 명운을 건 전당대회를 치르게 되고, 3월 초부턴 각 당에서 대선 후보 경선이 본격화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선거 국면에선 대북 인도 지원 재개 문제가 정치 쟁점화할 가능성이 높아질 테니, 정부 입장에선 운신의 폭이 더욱 좁아질 수밖에 없는 사세다. 이정철 교수는 이렇게 지적했다. “그동안 정부는 북핵 문제에 대한 ‘출구론’을 견지해왔다. 북핵 문제가 해결 가닥을 잡으면 대북 지원도 하고 대화에도 적극 나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입구론’으로 바꿀 시점이 됐다. 북핵 문제 논의가 다시 시작되는 시점(입구)이니 만큼 대북 지원을 망설일 이유가 없다. 회담 재개와 원활한 논의를 위해서라도 ‘입구론’ 입장에서 대북 지원을 재개해야 한다.”
노 대통령이 직접 나서야 할 때
대북 인도 지원은 더 이상 ‘민족 내부의 문제’만이 아니다. 대량 아사 위기에 빠진 이웃을 돕는 것은 인류 보편의 문제다. 그러니 대북 인도 지원 재개의 ‘명분 찾기’도 생각보다 쉬울 수 있다. 이를테면 북한은 적십자회담 등을 통해 공식적으로 지원을 요청하는 최소한의 노력을 기울이고, 남한은 이를 계기로 대화와 인도 지원 재개에 나선다면 파국은 피할 수 있다. 일부에서 “이젠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나서야 할 때”라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서보혁 코리아연구원 연구위원은 “노 대통령이 신년회견 등을 통해 남은 임기 동안 통일·외교·안보정책에 집중하고 국내 정치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밝히는 한편, 대북 인도 지원 재개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국민의 이해를 구한다면 ‘명분’은 어렵지 않게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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