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과의 설전 이후 지지율 한 자릿수로 떨어진 고건 전 총리…범여권 후보로 인식돼 얻었던 호남의 표심까지 하향 곡선 그릴까
▣ 류이근 기자 ryuyigeun@hani.co.kr
간이역은 다음 역으로 가는 징검다리다. 기차가 종착역에 도달하기 전 잠깐 쉬었다 가는 공간일 뿐이다. 정치인들은 종착역이고 싶어하지 기차가 지나고 나면 잊혀지는 간이역이고 싶어하지 않는다. 종착역은 많은 여의도 정치인들이 언젠가는 도달하고 싶은 정치적 꿈, 바로 대통령이 되는 것이다. 한 번도 공개적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고건 전 총리의 꿈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꿈의 실현은 단 한 사람에게만 허용되는 냉혹한 현실이다.
‘간이역에 그치는가?’ 고 전 총리는 대선을 1년 앞둔 지금, 또다시 이런 질문을 받고 있다. 그 자신과 캠프, 열성 지지자들은 이런 질문이 불편하겠지만 피할 순 없는 일이다.
사실 고 전 총리의 정치적 운명이 간이역이나 징검다리에 멈출 것이라는 시각과 견해는 결코 새로운 것도 갑자기 튀어나온 것도 아니다. 그것들이 최근에 다시 주목받는 것은 그가 자신의 의도와 무관하게 노무현 대통령으로 인해 여론의 집중 조명을 받고, 그 조명이 사라지면서 따라온 일이다. 그리고 때를 같이 해 그의 지지율이 하향 곡선을 그리는 것을 한동안 차분히 지켜보며 말을 아꼈던 많은 이들이 말을 쏟아내면서다.
“사람은 뒷모습이 좋아야 한다”
가장 최근에 고 전 총리가 국민들에게 노 대통령과 이전투구하듯 비친 장면을 더듬어볼 필요가 있다. 싸움을 다시 붙여보자는 게 아니라, 둘 사이에 어떤 오해와 상처가 있었는지 좀더 면밀히 살펴보자는 것이며, 일부에서 관찰되는 것처럼 고건을 정치적으로 재조명하는 나름의 계기가 됐던 사건이기 때문이다.
노무현: “제가 이것(대북정책 협의체제) 한번 해보자고 맨 처음에 고건 총리를 기용했었지요. 그래서 고건 총리가 다리가 되어서, 그쪽(각계각층의 대표적 지도자나 원로)하고 나하고 가까워질 것이라는 희망으로 그랬는데. 오히려 저하고 저희 정부에 참여한 사람들이 다 왕따가 되는 그런 체제에 있는 것이지요. 중간에 선 사람이 양쪽을 끌어당기질 못하고 스스로 고립되는 그런 결과가 되기도 하고요. 결과적으로 실패해버린 인사지요.”(2006년 12월21일 민주평통자문회의 제50차 상임위원회에서)
고건: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은 한마디로 자가당착이며 자기부정이다. 노 대통령과 참여정부가 국민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다면 그것은 상생과 협력의 정치를 외면하고 오만과 독선에 빠져들어 국정을 전단(專斷)한 당연한 결과이다. …노 대통령이 스스로 인정하는 ‘고립’은 국민을 적과 아군으로 구분하는 편 가르기, 21세기 국가 비전과 전략은커녕 민생 문제도 챙기지 못하는 무능력, ‘나눔의 정치’가 아니라 ‘나누기 정치’로 일관한 정치력 부재의 자연스런 귀결일 것이다.”(12월21일 발표한 성명에서)
노무현: “사실을 제대로 확인해보지 않고 나를 공격하니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사과라도 해야 할 일이다. 나는 그(고건)를 나쁘게 말한 일이 없다.”(12월23일 청와대 참모회의에서)
고건: “대통령께서는 진의가 아니라고 하시던데 일반 국민들이 무슨 뜻으로 들었는가가 중요하다.”(12월23일 서울 상암동 심장병 어린이 돕기 ‘희망 한걸음’ 행사에서)
노무현: “내가 두 번 세 번 해명을 했는데도 전혀 미안하다는 표정이 없어서 섭섭하다는 말씀을 꼭 좀 드리고 싶습니다. 술은 빛깔이 좋고 냄새가 좋고 그 다음 맛이 좋으면 그걸 좋은 술이라고 하지요. …뒤가 깨끗해야 그게 좋은 술입니다. 나는 술뿐만 아니라 사람도 뒷모습이 좋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대통령이 동네북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좋은 사람들이 있고 그렇게 하면 안 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 대통령을 동네북처럼 이렇게 두드리면 저도 매우 섭섭하고 때로는 분합니다.“(12월26일 국무회의에서)
정운찬 뜨고, 고건이 진다?
설전은 고 전 총리가 26일 자신의 캠프에 “팩트(사실)에 대한 문제를 제외하고는 일절 대응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리면서 사그라졌다. 하지만 대통령과 전직 총리가 주고받은 설전은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만큼이나 남긴 상처도 컸다.
고 전 총리의 핵심 측근 중 한 명인 고재방 전 교육인적자원부 차관보(현 광주대 교수)는 29일 고 전 총리가 입은 상처를 묻는 기자에게 “국민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노 대통령)이 어떻게 위정자를 할 수 있냐? 그건 말도 안 된다. 국가를 바로 만들어야 한다”며 대통령의 발언을 성토하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또 다른 측근인 김덕봉 전 총리 공보수석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총리는 총리의 입장을 다 밝혔다. 더 이상 그 문제에 대응하지 않겠다.” 말을 아끼면서도 그는 “손해? 지지율 얘기하냐? 지지율 특별히 손해날 것 없다. 1월1일치(여론조사)를 봐야겠다”며 여론의 흐름에 민감하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캠프의 분위기를 전했다. 이번 사건으로 당장 고 전 총리의 지지율에 큰 하락이 있거나 반대로 큰 상승이 있다고 보긴 어렵다.
하지만 거의 동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미묘한 변화들과 그 징후들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12월26일 CBS(기독교방송)과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가 전국 성인남녀 779명을 상대로 자동응답시스템(ARS) 방식으로 실시한 대선 후보 선호도 조사(95% 신뢰수준에 오차범위 ±2.56%)에서 고 전 총리는 9.8% 지지율을 기록했다. 한 자릿수 지지율 추락은 지난 2년여 동안 대선 후보 여론조사에서 고건이란 이름을 올린 뒤 처음이다. 조사기관과 조사 방식의 신뢰성을 제기하는 쪽도 있지만, 조사 결과는 전파를 타고 빠르게 퍼졌다. 조사가 얼마나 많은 이들의 여론을 제대로 반영했는지 모르나 반향은 컸다. 특히나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가 국회·언론사·시민단체·학계 등 정치 분야의 오피니언 리더 100명을 상대로 ‘범여권 대선 후보로 누가 가장 적합하냐’를 물어본 결과 고 전 총리(23%)가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25%)한테 밀린 것으로 나오면서 정치권엔 큰 화젯거리가 됐다. 섣부른 감이 있었지만, 이즈음 “정운찬이 뜨고, 고건이 진다”는 말도 슬슬 나오기 시작했다.
국민이 원치 않는 ‘싸우는 고건’
최근 고 전 총리의 지지율 하락 추이도 새삼스럽게 주목받고 있다. 가 11월15일 여론조사기관인 리서치플러스에 맡겨 전국 성인남녀 500명을 대상으로 한 전화 면접조사(오차범위 95%, 신뢰수준 ±4.5%)에서 그는 11.5%의 지지율을 기록했다. 최근 고 전 총리의 지지율은 간신히 두 자릿수에 걸려 있다. 이 12월 말 조사를 끝내고 1월1~3일 발표를 앞둔 여론조사기관 두 곳의 조사 결과치를 파악했더니, 지지율은 9~12%인 것으로 나타났다. 2004년 한때 32%를 웃돌던 그의 지지율은 2년의 지루한 항해 끝에 10%대 초반(표 참조)으로 내려왔다.
잘나가던 때 고건 신드롬을 만든 서울의 40대는 최근 이명박 전 시장 지지로 돌아섰다. 이 전 시장이 청계천 등 가시적 성과를 쌓아 지지층을 갉아먹는 동안 고 전 총리는 통합이란 깃발만을 조용히 들고 있었다. 이목희 열린우리당 의원은 “고 전 총리의 지지라는 게 실제 고건에 대한 평가라기보다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에 절망하고 분노하는 오갈 데 없는 마음이 가 있는 것”이라며 “(통합신당의) 다이내믹(활력)이 생겨나 ‘누군가’ 부상하면 반사이익으로 형성된 고 전 총리의 지지율이 물거품처럼 될 것”이라고 말했다. 고 전 총리는 간이역에 불과할 수 있다는 얘기다. 최근 범여권에서 제3의 후보론이 뜨는 것 자체가 ‘고건으론 힘들다’는 인식 속에서 세를 얻고 있는 측면이 강한 만큼, 제3의 후보가 정운찬이든 그 누구든 부상할수록 고 전 총리가 힘들어질 수 있다.
갈라선 노 대통령과 고 전 총리의 관계는 고건의 리더십과 지지층을 같이 놓고 봤을 때, 의미 있게 해석할 만한 점들이 있다. 한귀영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실장은 “한나라당에서 홍준표 의원이나 원희룡 의원이 싸운다고 해서 국민들이 뭐라고 하지 않지만, 안정감과 경륜을 바탕으로 통합형·화합형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 고건이 싸우는 모습은 국민들에게 좋지 않은 느낌을 줬을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호남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 전 총리는 10%대 지지율임에도 불구하고 광주·전라 지역에서 지역별로 가장 높은 30%의 지지율(KSOI 12월12일 조사)을 보이고 있다.
“호남이 불편해할 계기가 될 수도”
그나마 고 전 총리의 버팀목 구실을 호남이 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호남 지역은 노무현 대통령이 10%대의 낮은 국정수행 지지도를 보이는데도, 다른 지역에 비해 가장 높은 신뢰를 보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한귀영 실장은 “이번 사건은 노 대통령이나 열린우리당의 호남 지지층 가운데 고건이 좋아서라기보다 유력해서 범여권 후보로서 지지했던 이들에게 고건을 불편하게 인식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같은 분석을 서울 성동갑에 지역구를 둔 최재천 열린우리당 의원은 현장에서 경험하고 있다고 한다. 최 의원은 12월28일 통합신당 추진 성동갑대책위원장을 맡게 됐다며, “이전에 고 전 총리 중심으로 범여권의 흡수 통합이 이뤄질 것이라고 본 옛 민주당 지지자들은 지방선거 직후 독자적인 준정치적 결사체를 만들어 나를 따라오지 않았다”며 “최근 그의 능력에 실망하고 열린우리당이 통합신당 쪽으로 방향을 정해 정국의 키를 잡자 3년 만에 처음으로 내 쪽으로 들어왔다”고 말했다. 물론 이런 현상을 확장해 일반화하기엔 무리가 있다.
고건 전 총리에게도 다른 대선 후보만큼 똑같이 1년이란 정치적으로 꽤 긴 시간이 기회로 남아 있다. 그 시간 동안 많은 변화들을 예상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변화를 이끌고 주도해야 한다는 지난 몇 차례 대선의 정치적 교훈이 그에게도 예외가 아니라는 점이다. ‘고건 플랫폼’이 종착역이 될 가능성은 지금 10%에 불과하더라도 현실이 될 가능성으론 결코 작은 수치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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