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를 맞은 대북 포용정책에 분명한 옹호 메시지 던지며 해법 제시… 후광을 업으려는 정치권의 노력에 발언 하나하나가 큰 파장 가져와
▣ 류이근 기자 ryuyigeun@hani.co.kr
기자들의 전화로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최경환 비서관과의 얘기는 자주 끊겼다. “목포시에 물어보세요” “목포역 앞에서는 환영 인파들이 나오면 자연스럽게 인사하지 않겠어요.” “기자용 버스요? 대절하지 않습니다.” “보도지원 계획은 따로 없습니다.”
지난 10월25일 10여 통의 전화에 하나하나 답변하느라 그는 점심식사에 집중할 수 없었다. 연초에 그를 봤을 때도 이렇진 않았다. 요즘 그는 여느 한가한 전직 대통령의 비서관이 아니었다.
미국에 대해 악역을 자처한다?
최근 DJ의 이름과 얼굴이 신문과 방송에 부쩍 자주 등장한다. 기사가 되기 때문이다. DJ는 중요한 뉴스 인물로 떠올랐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기삿거리다. DJ 비서관의 전화통에 불이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10월28일 퇴임 뒤 처음으로 찾는 자신의 고향, 전남 목포 방문을 앞두고 언론이 그냥 지나칠 리 없다. 그런데 DJ가 왜 이 시점에 기사가 되고, 언론들이 따라붙을까? 이 물음은 그가 동교동에서 왜 나왔는지와 결국 같은 질문이다.
DJ의 외출은 자주 있었지만, 정치적 주목을 크게 받은 것은 지난해에 한 번 있었다. 이른바 ‘X파일’이란 옛 안기부의 불법 도감청 사건에 연루돼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 등 자신의 사람들이 줄줄이 구속되는 상황에서 병원에 입원한 것이다. ‘병상정치’라는 용어가 나올 만큼 그의 의도와 행보에 언론의 관심이 집중됐다. 그즈음 도 그의 정치력 복원에 의미를 두고 ‘DJ 파워, 네 가지의 비밀’이란 표지 기사를 내보낸 적이 있다.
최근 DJ의 행보는 지난해와 많이 다르다. 더욱 활발하고 더욱 분명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82살(DJ는 주민등록상 1926년생이지만, 실제는 1924년생이다)의 노구를 이끌고 던지는 메시지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이다. 북한의 핵실험으로 한반도의 명운에 짙은 먹구름이 드리운 상황에서 그의 발언은 그가 전직 대통령이기 때문이 아니라 햇볕정책의 창시자이자 수호자이기 때문에 나라 안팎에서 주목받고 있다.
햇볕정책이란 이름으로 상징되는 대북 포용정책은 북한의 핵실험 이후 중대한 도전을 받고 있다. ‘햇볕정책을 폐기하라’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사업을 중단하라’는 보수의 목소리들이 기다린 듯이 터져나오고 있다. 그가 동교동을 나서지 않을 수 없는 환경이자 이유들이다. 그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지만 DJ 쪽은 “햇볕정책의 창시자라고 해서 그것을 방어하는 차원에서 나선 것은 아니다. 지금은 민족의 운명이 걸린 문제”라고 말한다.
DJ는 햇볕정책에 대한 변론뿐만 아니라 북핵에 대한 자신의 해법까지 제시했다. 혹 있을지 모를 군사적 수단의 동원과 경제적 제재를 반대하고, 북-미 대화를 통한 해결을 강조했다. 그리고 아직도 북한과의 대화를 꺼리는 조지 부시 미국 정부를 향해 과감한 비판을 빼놓지 않았다. 현 참여정부가 미국을 향해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던 말을 DJ가 악역을 자처해 대신하는 부분도 있다.
고향 목포 방문에 갖가지 억측 증폭
하지만 그의 말은 경험과 연륜을 가진 국가원로의 목소리로만 비쳐지지 않는다. 정치적 주석은 전직 대통령의 행보에 늘 따라붙기 마련이다. 그 주석은 저마다의 이해에 따라 다르다. 북의 핵실험 뒤 대북 포용정책의 폐기를 소리 높여 외쳐온 의 주석은 가장 극단적이다. 이 신문의 10월24일치 사설은 “김 전 대통령은 쉬는 게 나라를 돕는 길이다”는 자극적인 제목을 달고 있다. DJ가 미국의 책임론을 제기하는 것이 대한민국을 국제적 고립의 길로 가게 할 수 있다는 걱정에서 나온 말이라고 했다. DJ가 대학을 돌며 강연을 하고, 언론과 인터뷰하면서 북핵 해법을 제시하는 것마저 정치를 재개했거나 정치에 관여한 것으로 보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럴 법도 하다. 북핵은 어느덧 정쟁의 한복판에 서 있다. 이 시점에서 DJ가 햇볕정책을 얘기하는 것 자체가 정치적으로 읽힐 수 있는 여지가 크다.
더군다나 DJ가 퇴임 뒤 처음으로 고향인 전남 목포를 방문하는 것은 정치적 억측들을 증폭시켰다. DJ 쪽은 단순한 “고향 방문”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정치 재개를 운운하는 것 자체가 불쾌하다는 반응이다. 최경환 비서관은 “지금까지 철저히 정치적 중립을 지켜왔다. 심지어 탄핵 때에도 여러 사람들이 찾아왔지만 아무 얘기를 하지 않았다. 국민들이 정치를 하라고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뭣하러 일부러 정치의 한복판으로 뛰어들겠나. 그런 기사들에 몹시 불쾌하다”고 말했다. DJ는 여러 차례 정치 불개입을 밝혀왔다. 정치에 개입해봤자 득 될 것이 없다는 것은 DJ도 잘 안다고 한다.
그런데도 DJ의 행보에 정치적 의미를 덧붙이는 것은 그의 정치적 영향력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DJ의 영향력은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이 지난 10월23일 행정 관료, 교수, 법조인 등 전문가 1천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누가 한국을 움직이는가’라는 질문에 DJ는 5위를 기록했다. 전직 대통령으로서는 톱10에 든 유일한 인물이다. 호남에서는 그에 대한 지지가 곧 그의 업적에 대한 지지로 나타나고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가 10월24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남북교류 사업을 지속해야 하나’는 질문에 광주·전라 출신들의 응답자 70.4%가 “지속해야 한다”고 응답했다. 교류를 지속해야 한다고 답한 전체 응답자 55.7%보다 훨씬 높게 나온 것이다. 한귀영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연구실장은 “대북정책에 대한 호남 지역의 진보성을 보여주는 자료이자, 호남 지역에서 DJ의 영향력을 볼 수 있는 중요한 지표”라며 “호남에서 햇볕정책에 대한 지지가 일관되게 높게 나타나는 것은 DJ가 거둔 역사적 성과를 저버릴 수 없다는 호남민들의 생각도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호남과 대북 포용정책에 대한 지지가 결합돼 DJ의 정치적 영향력을 뒷받침해주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분당 비판은 통합론 지지였나
DJ의 정치적 영향력이 적지 않기 때문에 정치권이 DJ에게 달라붙는 것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 수 있다. 당연한 셈법이다. 하지만 DJ 스스로가 자신의 이름을 정치판의 중심에 오르내리게 만든 측면도 있다. 그는 10월9일치 과의 인터뷰에서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의 분당과 관련해 “그것(분당)에 여당의 비극이 있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산토끼 잡으려다 집안 토끼를 놓친 격”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참여정부는) 햇볕정책을 계승한다고 해놓고 대북송금 특검을 했고, 특검만 하더라도 현 정부가 무리하게 강행해 수많은 희생을 냈다”고 속내를 드러냈다. 이른바 개혁진보 세력의 분열이 ‘분당’과 ‘특검’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통합’을 위한 메시지로 여권에서 재해석되기 시작했다.
많은 정치인들이 DJ의 말을 현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명분으로 빌려왔다.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은 DJ의 발언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거들었으며, 정동영 전 의장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자 열린우리당 내 ‘창당 실패론’을 놓고 한바탕 논쟁이 벌어졌다. ‘통합 신당론’이 부상했다. DJ가 일부러 연출한 상황은 아니겠지만 정치권에 화두와 명분을 제공하는 역할을 한 것마저 부정할 수 없다. DJ는 파장을 불러온 이 인터뷰에 앞서 오래전부터 자신을 찾아오는 여권의 인사들에게 비슷한 메시지를 던졌다. 동교동계인 배기선 열린우리당 의원실은 “DJ가 세 가지를 얘기하곤 했다. 열린우리당은 특검과 분당에 대해 사과하고, 민주당은 탄핵에 대해 서로 사과하라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DJ가 나서서 범여권 통합의 과정에 조정자 역할을 할 것처럼 얘기하는 것은 나가도 한참 나간 얘기다. DJ 쪽은 10월 초 논평을 내어 “최근 일부 언론과 정치권에서 향후 정치 일정과 관련해 ‘김대중 전 대통령과 누구의 연대’ ‘여권 통합에서 김 전 대통령의 역할론’ 등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에 대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DJ가 사실상 정치의 전면에 나설 수 있다는 이같은 설들은 말 그대로 설에 그칠 공산이 크다. 현실성이 떨어지는데다 DJ가 그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정계 개편 과정에서 DJ의 역할론은 DJ가 스스로 물꼬를 튼 측면도 있지만 정치권의 아전인수 격 해석에 부풀려진 면이 더 크다.
“시간을 서로 뺏으려고 난리”
DJ가 정치 불개입을 선언했지만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DJ의 후광을 업으려는 정치권의 노력과 시도는 끊이지 않을 것이다. 최근 여권의 한 대선 후보 캠프에 있는 보좌관은 북핵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DJ가 써줬다”고 농담 아닌 농담을 던졌다. 그리고 DJ의 민족화합, 노무현의 반지역주의와 자신의 캠프 슬로건을 덧붙이면 진보개혁 세력의 대통합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자신했다. DJ로부터 대북 포용정책의 정통성을 계승했다는 명분을 얻자는 것이다. 다른 캠프들도 계산이 비슷하다. 최재천 열린우리당 의원은 “건강 때문에 1주일에 나흘밖에 낼 수 없는 시간을 서로 뺏으려고 난리”라며 “여전히 범여권의 정통성을 DJ가 갖고 있다 보니, 정통성의 수단을 찾고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정치인들이 DJ를 이용하려는 측면이 강하다”고 말했다. ‘진보개혁 세력’의 분열이 통합되지 않는 한 상징적 구심점으로서 DJ의 정치적 영향력은 지속될 수도 있다.
11월2일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후원회의 ‘후원의 밤’ 행사와 전시관 개관식이 열린다. 많은 정치인들의 발길이 닿을 것이다. DJ는 그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질 것인가, 아니면 정치적 오해를 피하려 침묵할 것인가. 지금 정치권이 DJ의 입을 모두 주목할 만큼 그의 정치력이 ‘너무’ 커진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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