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과의 인식 격차 드러내며 석유를 움켜쥐려는 쿠르드 자치정부… 키르쿠크 편입과 함께 분열의 서막이 열리는 상황에 자이툰이 있다
▣ 에르빌=글·사진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이라크 북부 에르빌 외곽의 하사로크 지역은 가난한 쿠르디스탄 마을의 전형이다. 오랜 세월 개발의 손길이 닿지 않아 남루할 대로 남루한 마을 곳곳에선 힘겹게 버티고 선 흙벽을 쉽게 마주할 수 있다. 사막의 모랫빛을 닮은 우중충한 빛깔의 낡은 건물에서 가난한 쿠르드인들은 그렇게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이전과 마찬가지 모습으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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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폐한 마을과 ‘민사작전’
지난 9월22일 오전 하사로크 마을 들머리에선 한국군 자이툰 부대 장갑차가 삼엄한 경계를 서고 있었다. 자이툰 부대가 ‘다기능 민사작전의 꽃’으로 부르는 ‘그린 에인절 작전’이 막 시작될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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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0가구 280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하사로크 마을에서 자이툰 부대는 학교 급수시설을 설치해주고, 컴퓨터 11대를 기증했다. 버려진 땅을 다져 축구장을 만들었고, 주민들의 숙원사업이던 보건소도 지어줬다. 또 마을 진입로 보수와 복토·포장 작업도 실시했다는 게 부대 관계자의 설명이다. 이날은 7주간에 걸쳐 진행된 ‘민사작전’을 마감하면서 한국군이 마련한 마을잔치가 열리는 날이었다.
마을 동쪽 끝 공터엔 대혁 천막 여러 동이 네모꼴로 쳐졌고, 군악대의 흥겨운 연주가 주민들을 부르고 있었다. 간단한 검문을 마친 수백 명의 주민들은 행사가 시작되기 전부터 일찌감치 자리를 잡고 앉았다. 사단 군악대와 의장대, 농악대가 나서 공연을 펼쳤고, ‘자이툰 태권도 교실’ 어린이들이 태권도 시범을 보여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러는 사이에도 자이툰 병원의 출장 의료시설이 마련된 천막 한켠에는 전통 복장을 한 수많은 여성들이 간이진료를 받느라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주민들은 하나같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쿠리 넘버원’(한국 최고)을 외쳐댔다.
마을 안으로 들어섰다. 오랜 기간 천천히 폐허로 변해온 탓인지 금세라도 무너질 듯 아슬아슬하게 자리를 지키고 선 집이 흙먼지를 뒤짚어쓰고 있었다. 개축을 위해 들여다놓은 듯 아무렇게나 벽돌이 쌓여 있는 집도 눈에 띄었지만, 대부분은 무너질 듯 초라한 행색 그대로였다. 7주간의 ‘봉사’로 이들의 삶에 의미 있는 변화를 가져오길 기대하는 건 애당초 무리였다. 마을 전체의 재건·복구를 위해선 결국 쿠르드 자치정부가 나서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땡볕에서 경계근무를 서고 있던 한 병사에게 말을 걸었다. 민사작전에 처음 참가한다는 그는 “거리에서 주민들을 볼 때마다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며 “마을을 둘러보면 뭐라도 더 해주고 싶은데 지금으로선 뭘 더 해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다른 병사는 “우리도 한국전쟁 끝난 뒤 이런 상태가 아니었겠느냐”며 “그때 우리가 미군에게 느꼈던 감정을 이들도 우리에게 느끼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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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드족 31% “미군 장기주둔해야”
자이툰 부대는 이라크의 전후 재건·복구를 지원하기 위해 파병됐다. 하지만 쿠르디스탄이 가난한 것은 전쟁으로 인한 상처 때문이 아니었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기 전부터 그들은 가난했고, 전쟁으로 인해 파괴된 것을 ‘전후’에 ‘복구’할 것은 애초부터 없었다. 쿠르드에 필요한 것은 ‘전후 복구’가 아닌 ‘개발 원조’였다. 그럼에도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대한민국의 군대는 이역만리 쿠르디스탄으로 날아와 하릴없이 ‘새마을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파병 재연장 문제가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는 지금 되짚어봐야 할 대목이다.
파병의 명분에 대한 논쟁과는 별도로 파병의 ‘조건’이 바뀌고 있다는 점도 쉽게 비껴갈 수 없는 상황이다. 중앙정부가 여전히 제 구실을 다하지 못하고, 평화롭게 공존하던 아랍족이 수니와 시아로 갈려 핏빛 보복의 악순환으로 치닫고 있는 사이 천천히 ‘나라 안의 나라’가 돼가고 있다. 지난 9월27일 미 메릴랜드대학 부설 국제정책평가프로그램(PIPA)이 내놓은 여론조사 결과는 쿠르드족과 아랍인 사이의 늘어만 가는 현실 인식의 격차를 극명히 보여준다.
이 단체가 9월1~4일 이라크 전국에서 1150명을 상대로 실시해 내놓은 조사 결과를 보면, 수니-시아파 사이의 인식 차이보다 아랍-쿠르드 사이의 격차가 훨씬 큰 것으로 드러났다. 이를테면 미국 주도의 다국적군 철수 시점을 묻는 질문에 시아파의 74%, 수니파의 91%가 ‘1년 안에 철군해야 한다’고 답했다. 반면 쿠르드족은 응답자의 35%만이 1년 내 철군을 원했고, 응답자의 31%는 ‘철군 시한을 정하지 않고 장기 주둔해야 한다’고 답했다.
점령군의 성격에 대한 평가에서도 반응은 크게 엇갈렸다. 쿠르드족 응답자의 56%가 미군 등 다국적군을 ‘안정화군’으로 본다고 답한 반면, 시아파와 수니파에선 각각 17%와 2%만이 같은 답변을 내놨다. 또 ‘다국적군이 갈등을 방지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유발하고 있다고 보느냐’는 질문엔 시아파의 82%와 수니파의 97%가 각각 ‘그렇다’고 답한 반면, 같은 답변을 한 쿠르드족은 절반가량(41%)에 그쳤다. 다국적군에 대한 저항세력의 공세에 대해서도 시아파와 수니파의 각각 62%와 92%가 ‘인정한다’고 답한 반면, 같은 응답을 한 쿠르드족은 15%에 그쳤다. 아랍인과 쿠르드족 사이의 현실 인식의 격차는 이미 위험 수준에 이르렀다.
지난해 말부터 석유 개발에 뛰어들어
더욱 심각한 것은 석유자원을 둘러싼 쿠르드 자치정부와 이라크 중앙정부의 충돌 가능성이 점차 현실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석유자원 확보를 독립국가 건설의 디딤돌로 보고 있는 쿠르드 자치정부는 이를 위한 절차를 차근차근 밟아가고 있다. 후세인 샤흐리스타니 이라크 원유장관은 지난 5월 취임 일성으로 “석유 탐사와 생산과 관련된 모든 계약을 중앙정부가 직접 관리해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쿠르드 자치정부는 이미 지난해 말부터 독자적으로 석유자원 개발에 뛰어들었다. 지난 9월9일 쿠르드 자치의회를 통과한 ‘쿠르드 지역 석유법안’은 이런 쿠르드 자치정부의 ‘야심’을 고스란히 드러내준다.
전문과 본문 15개 장 78개 조항, 3개 항의 부칙으로 구성된 이 법안은 “쿠르디스탄의 석유자원은 쿠르드 자치정부의 재산”임을 명시하고 있다. 또 자치정부 천연자원부를 쿠르드 지역에 매장된 석유자원 개발의 주체로 규정했고, 미개발 유전 탐사·개발을 위한 ‘쿠르디스탄 시추·생산회사’(KEPCO)와 기존 유전시설을 운영하기 위한 ‘쿠르디스탄 원유회사’(KNOC) 설립을 명문화했다. 이 밖에도 ‘쿠르디스탄 석유판매기구’(KOMO), ‘쿠르디스탄 석유시설운영기구’(KODO) 등의 공기업 창설을 규정하는 한편, ‘쿠르디스탄 석유신탁기구’(KOTO)를 설립해 석유자원 개발과 판매를 통한 수익금을 관리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법안 1조에서 언급하고 있는 이른바 ‘분쟁지역’ 관련 조항이다. 법안 1조 2항은 ‘분쟁지역’에 대해 “키르쿠크를 포함해 (쿠르드 자치지역 편입 여부를 놓고)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지역”으로 규정했다. 또 4장 22항에선 “법이 효력을 발휘한 지 3개월 안에 분쟁지역에 대한 관할권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경우, 석유자원 관리 권한 및 수익금 통제권한은 쿠르드 자치정부가 보유한다”고 규정해놓고 있다. 이라크 북부 유전지대의 심장부 키르쿠크를 노골적으로 겨냥한 조항이다.
1927년 유정이 발견되면서 개발이 시작된 키르쿠크 유전지대는 1934년 창설된 이라크석유회사(IPC)의 모태다. 이 일대에서 채굴된 원유는 터키의 지중해 연안 항구 케이한까지 파이프라인으로 운송되기 때문에 이라크 남부를 통과할 필요도 없다. 사담 후세인 정권 시절 극심했던 ‘아랍화 정책’에도 키르쿠크 전체 인구의 65%가량은 여전히 쿠르드족이다. 내년 11월로 예정된 주민투표에서 키르쿠크가 쿠르드 자치지역으로 편입되기 위해선 과반수의 찬성만 얻으면 족하다.
독립 쿠르디스탄의 꿈이 영근다
마수드 바르자니 쿠르드 자치정부 대통령의 발언도 점차 거침이 없어진다. 그는 지난 6월6일 뉴스 전문채널 와 한 인터뷰에서도 “독립 쿠르디스탄 건설을 꿈꾸는 것은 모든 쿠르드족의 권리이며, 누구도 이런 권리를 부정할 수 없다”며 “현재로선 이라크 연방에 속하는 것이 쿠르드족의 이익에 부합하지만 다음 세대나 우리 세대에서 독립의 꿈이 이뤄질 수도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랍족으로선 키르쿠크의 쿠르드 자치지역 편입이 이라크의 분열로 가는 서막으로 비쳐질 게다. 그 아찔한 상황 한가운데 자이툰 부대가 버티고 섰다.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서 ‘동맹의 볼모’가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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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터뷰/카림 신자리 쿠르드자치정부 내무장관]“자이툰 부대의 영구 주둔을” |
“자이툰 부대가 영원히 쿠르디스탄에 주둔하기 바란다.”
지난 9월21일 오후 에르빌 시내 청사 집무실에서 만난 카림 신자리 쿠르드자치정부(KRG) 내무장관은 “쿠르드인들은 한국군을 동맹군이 아닌 친구로 여긴다”며 이렇게 말했다. 이날 임종인 의원(열린우리당) 등 이라크 현지조사에 나선 국회의원단 5명과 신자리 장관이 나눈 면담에서 오간 내용을 인터뷰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이라크 전역과 에르빌 지역의 치안 및 재건·복구 상황이 궁금하다.
=한국 정부가 자이툰 부대를 통해 지원해준 모든 것에 감사한다. 현재 쿠르디스탄 상황은 안정적이며, 치안 또한 매우 좋다. 지난해와 올해가 또 다르다. 치안 상황이 안정적으로 유지되지 못했다면, 개발도 없었을 것이다. 지난주 에르빌에서 엑스포가 열렸는데, 전세계에서 수많은 회사들이 참여했다.
이라크 전체 상황은 나아지고는 있지만 시아-수니파로 갈려 종파 간 갈등이 있고, 알카에다를 비롯한 테러조직도 여전히 활동 중이다. 여기에 옛 바트당 잔당 세력도 있다. 이들로 인해 이라크 치안상황이 나빠졌다. 이라크 정부는 군과 경찰을 육성하고 있고, 치안유지 권한도 속속 넘겨받고 있지만 바그다드 상황은 여전히 나쁘다. 그래서 쿠르드 이외 지역은 아직 재건·복구가 쉽지 않다.
잘랄 탈라바니 대통령을 비롯해 이라크 중앙정부에 쿠르드족이 많이 진출해 있는데.
=대통령과 각 부서 장관은 물론 의회 쪽에도 쿠르드족 진출이 활발하다. 이라크에선 이제 쿠르드족이 없이는 아무것도 안 된다.
바그다드 상황에 대한 평가는?
=바그다드에선 동맹군 사령부와 이라크 정부 청사가 위치해 있는 ‘그린존’만 안전하다. 그 외 모든 지역은 치안이 불안하고, 상황도 계속 나빠지고 있다. 바그다드 치안상황이 워낙 열악하다 보니 하루 100명가량이 죽어가고 있다. 이런 상황이 언제쯤 끝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럼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건가?
=군대와 군대 간 전쟁은 끝났지만, 테러와의 전투가 계속되고 있다. 희생자 대부분은 무고한 시민이다. 미군이나 이라크군 1명을 죽이기 위해 50~60명의 민간인이 숨지는 상황이다. 이는 분명 전쟁이 아니다. 테러와의 싸움일 뿐이다.
이라크 전쟁을 거짓 명분으로 일으킨 잘못된 전쟁이며, 이미 실패한 전쟁이란 지적이 있다.
=미국 국민들은 자국군에 대해 자랑스러워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라크에서 미국이 테러와 싸우지 않으면, 미국 본토에서 싸워야 할 것이다. 동맹군을 노리는 테러범들은 외부에서 들어온 불순세력이다. 그들은 미군이 이곳에 와 있기 때문에 지금 이라크에서 미군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미국과 동맹군은 이라크에서 좋은 일을 하고 있다. 사담 후세인 정권 당시 쿠르드족이 겪었던 것에 비하면 지금의 희생은 아무것도 아니다.
자이툰 부대가 오기 훨씬 전부터 쿠르디스탄은 평온했던 것으로 안다.
=2천 명 이상의 한국군이 와서 안정화에 큰 기여를 했다. 한국의 기업들이 많이 와서 뭔가 가져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한국 기업인이 쿠르디스탄에 올 수 있게 해달라고 당신네 외교부에 말해달라. 한국인과 한국 기업인들이 여행 규제에 묶여 이곳에 오지 못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유엔 안보리는 이라크에 새 정부가 구성되면 외국군이 철군해야 한다고 결의한 바 있다.
=한국군이 영원히 쿠르디스탄에 주둔하기를 바란다. 우리는 이미 형제 같은 친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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