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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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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의회의’방식을 제안함

등록 2006-09-20 00:00 수정 2020-05-02 04:24

국익도 지키고 평택 농민의 이익도 함께 지키자는 공공갈등관리전문가의 해법… 무작위 100명 선정해 국민 패널을 구성한 뒤 토론 거쳐 합의 도출해보자

▣ 박홍엽 한국행정연구원 초청연구원·행정학 박사

평택 사태를 바라보는 국민의 마음은 답답하다. 국익도 지키면서 그곳 농민의 이익도 지킬 수 있는 해법이 나왔으면 좋겠는데 도무지 그런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 미군기지 이전사업을 추진하는 정부 쪽이나 미군기지 이전 확장을 반대하는 주민과 평택미군기지확장저지 범국민대책위원회 쪽 모두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마주 보며 달리는 기차처럼 질주하고 있다. 매번 충돌이 계속될 때마다 우리 사회의 갈등의 골이 더욱 깊어지는 것 같아 그런 상황을 바라보는 국민의 마음은 착잡하기 그지없다.

왜 이토록 상황이 악화됐나

갈등이 악화될 대로 악화된 현재의 시점에서 평택 사태를 합리적으로 풀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정부도 한-미 간에 합의된 일정에 쫓겨 무리해 보일 정도로 이전 사업을 추진하고 있고 반대쪽도 입장이 강경하고 감정적으로 격앙돼 있다. 정부를 보면 기지 이전의 당위성만 외치는 것 같고 반대쪽을 바라보면 기지 이전을 반대하는 구호만 난무하는 것 같다. 이 때문에 정작 논의되어야 할 국익 차원의 이전 규모의 적정성이나 주민 생계 보호를 위한 이주 대책 등은 보이지 않는다.

평택 사태에서는 우리 사회의 공공 갈등에서 나타나는 몇 가지 대표적인 특징들을 볼 수 있다. 첫째, ‘가치 추구적’인 갈등이 ‘이익 갈등’을 압도해 갈등 해결이 어려워진다는 점이다. 새만금 간척사업과 천성산 터널 공사, 부안의 방폐장 입지를 둘러싼 갈등을 분석해보면, 처음에는 개발 지원이나 보상 규모 등 해결 가능한 문제들이 주요 쟁점이 된다. 그러나 갈등이 이어지면서 환경보전, 생태계 보호, 반핵 등 쉽게 해결되기 어려운 ‘가치’ 문제로 갈등이 전환된다. 어떤 사람이나 집단도 자신이 옳다고 굳게 믿는 신념이나 가치에 대해서는 쉽게 타협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 해결은 어려워진다.

둘째, 갈등이 해당 지역에 국한되어 진행되기보다는 전국적인 쟁점으로 전환된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은 정부와 해당 지역 주민 등 직접적인 이해관계자의 범주를 넘어 시민사회단체 등 외부 이해관계자가 개입되면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셋째, 대부분의 가치 추구적인 문제에서 일어나는 상황이지만 손에 잡히는 대안 제시 없이 갈등이 지속된다는 점이다. 갈등 당사자들이 원래 입장에서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아 ‘완전 승리-완전 굴복’의 상황으로 치닫게 되면 갈등 상황은 더욱 경색되기 마련이다. 새만금이나 천성산 사업 등은 사법부의 판결에 따라 일단 갈등이 매듭지어질 수 있었지만 평택의 미군기지 이전을 둘러싼 갈등은 헌법재판소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계속되고 있어 더더욱 풀어지기 어려운 상황이다.

평택 사태의 해결 방안을 찾으려면 상황이 이렇게까지 악화된 원인을 살펴봐야 한다.

첫째, 정부가 범부처적으로 주한미군대책기획단을 구성해 기지 이전 관련 행정과 주민보상 및 지원 대책을 실시하고 있지만 사업의 초기 단계부터 해당 지역 주민들과 충분한 협의하에 진행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정책 ‘결정 과정’에서 충분히 의견을 수렴하지 않아 정책 ‘집행 과정’에서 갈등이 발생되는 공공 갈등의 전형적인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정부는 안보와 관련된 사안이었기 때문에 우선적으로 한-미 간 협의를 완료하고 그 다음으로 국회 비준을 받은 뒤에 주민 협의를 시작할 수밖에 없어 협의가 미흡했다고 이해를 구하고 있다. 그렇지만 최소한 국회 비준 단계에서부터 대표성을 가진 직접적인 이해관계자로 구성된 협의기구를 구성해 합의 형성 절차를 밟았다면 지금같이 일부 주민들이 협의를 기피하거나 최소한 대화의 테이블에 나타나지 않는 일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울러 미군기지 이전을 반대하는 단체들의 정치적 의견을 국회 비준 과정에서 충분히 경청하고 수렴했다면 현재와 같이 미군기지 이전에 관한 쟁점이 다분히 이념적이고 정치적인 이슈로 계속 남아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정부가 주민 보상과 지역 발전이라는 이해갈등적 요소와 미군기지 이전 반대라는 가치갈등적 요소를 분리 대응하지 못한 것이 오늘날 사태가 확대된 한 요인이라 여겨진다.

국회에서라도 컨센서스를 모아야

둘째, 갈등 당사자들이 대안 제시 없이 ‘전부 아니면 전무’(all or nothing) 태도로 임하는 것도 갈등을 더욱 악화시키는 요인이다. 정부 쪽에도 대안을 제시하려는 노력이 부족한 점이 있지만 어떠한 대안 제시도 없이 무조건적으로 미군기지 이전사업을 원점 재검토하라는 반대쪽의 태도에도 문제가 있다. 국회에서 비준까지 받고 이미 막대한 재원을 투입해 80%가 넘는 주민에게 보상이 끝난 상황에서 사업의 원점 재검토를 주장하게 되면 정부에게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원점 재검토란 사업 자체를 전면 부정하는 것으로 정부에 기지이전 사업을 폐기하라는 것인데 이같은 요구는 사실상 정부와의 협의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러면 평택 사태에 어떻게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먼저 정부와 반대쪽 모두 상대방에게 책임이 있다는 주장을 잠깐 멈추고 상대방의 의견을 경청하고 일반 국민들에게도 판단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국민참여적 의사결정 방식 가운데 하나인 ‘합의회의’ 방식을 제안하고자 한다. 예를 들면 일반 국민 가운데 무작위로 100여 명을 선정해 국민 패널을 구성한 뒤 그들 앞에서 정부와 반대쪽 모두 미군기지 이전에 관한 각자의 의견을 충분히 발표한다. 그 뒤 국민 패널이 자체적으로 토론을 거쳐 어떻게 하는 것이 국익에 합당하고 주민 이익에도 부합한지 합의를 도출하도록 한다. 이런 발표와 토론 과정을 거치면서 국민 패널에 참여하지 않는 일반 국민들도 국가적 사안에 대해 이해를 깊게 하고 어느 의견이 더 타당한지 판단할 수 있게 된다. 물론 국민 패널의 합의 결과를 정부와 반대쪽 모두 반드시 수용해야 할 의무는 없지만 최소한 나아갈 방향과 보완해야 할 점은 찾을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만일 이런 국민적 합의 형성 절차나 과정이 어렵다면 최소한 국회의 해당 상임위에서 정부와 반대쪽이 각자의 의견을 밝히는 기회를 갖고 그 과정에서 국민들의 컨센서스를 모아가는 것도 한 방법이다. 국회가 미군기지 이전을 비준해놓고 그 뒤의 갈등에 수수방관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국민의 눈에 무책임하게 보일 수 있다. 입법 전의 갈등 예방 노력도 중요하지만 입법 뒤의 갈등 해결을 위한 노력도 국회가 수행해야 할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이다.

‘장미의 전쟁’의 교훈에서 배워야

한때 우리나라에서 상영됐던 외국 영화 을 보면 갈등의 끝이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렇게 사이가 좋던 부부가 사소한 언쟁으로 다투기 시작해 마지막에는 서로에게 깊은 상처만 남긴 채 비극적인 종말을 맞게 된다는 내용의 영화다. 이제는 우리 모두 어떻게 하면 평택에서 발생한 갈등을 우리 사회의 번영과 공동체 형성에 순기능적으로 작용하게 할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이다. 그같은 고민을 통해 우리 사회의 갈등 해결 역량이 한 단계 높아지고 아울러 우리 사회가 더 성숙하고 민주화된 사회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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