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율 반토막나고 국민과의 소통 실패한 가운데 무기력의 늪에서 헤매다… 대안정당의 면모 갖추려면 단순 시스템 정비 넘어 당을 확 흔들어버려야
▣ 류이근 기자 ryuyigeun@hani.co.kr
요즘 민주노동당엔 희망을 얘기하는 사람을 찾기 어렵다. 다들 위기를 말한다. 하지만 뭔가 돌파구를 찾으려는 의지나 긴장감이 없다. 위기를 말하면서도 당이 끝 모를 깊은 무력감의 늪에 빠져 있는 이유다.
열린우리당 위기에 가려 보이지 않았을 뿐
5·31 지방선거 직후 민주노동당 중앙선본은 지방선거 평가 보고서를 만들었다. 이를 최고위원회(최고위)의 토론에 부치고 다시 최고위와 의원단 연석 워크숍에 올렸다.

광역 시도당위원장을 포함한 확대간부회의를 거친 보고서는 최고위를 거쳐 7월8일 중앙위원회에 부쳐졌으나 논란 끝에 부결됐다. 이어 23일 열린 임시 당 대의원 대회에 다시 올려져 지방선거 평가위원회를 구성하기로 결정이 내려졌다. 전당 차원의 냉정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지방선거가 끝난 지 석 달이 다 돼가는데도 아직 선거 패배에 대한 민주노동당의 평가작업은 진행형이다. “다음 지방선거 때까지는 결론이 날지 모르겠다.” 한 당직자의 우스갯소리만은 아니다. 지방선거 평가작업 과정은 민주노동당의 현주소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울산 북구를 잃은 10·26 재선거의 반성 차원에서 나온 당 혁신안도 아직 매듭짓지 못했다. 혁신안의 내용마저도 당의 조직과 인력 체계의 개편에 관한 내용이어서 쇄신을 바라는 당 안팎의 관심과는 한참 동떨어져 있다. 민주노동당은 지금 당의 의사결정 구조가 느린 것은 접어두고 국민들의 정치권에 대한 종합평가서 격인 선거 결과 검토·분석, 그에 따른 대안과 미래 비전 제시를 덮어둔 상태다.
민주노동당이 처한 위기의 징후들이다. 징후들은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여의도 민주노동당사 5층에 마련된 기자실은 텅 비었다. 당이 주도적으로 정국의 의제와 이슈를 만들어내지 못하면서 만들어진 풍경이다. 소수당의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그냥 넘기는 사람도 있지만, 당의 미래를 걱정하는 이들은 당에 “들썩거림이 사라졌다”고 말한다. 당원 게시판도 조용해졌다. 열정에서 나오는 토론과 논쟁이 잦아든 것이다.
당을 둘러싼 위기감이 하루아침에 찾아온 것도 아니다. 그래서 더욱 문제다. 위기가 관리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당은 지난해 10·26 재선거에서 울산 북구를 잃으면서 의석 수에서 민주당에 밀려 제4당이 됐다. 하지만 심리적으로 누려온 제3당의 지위마저 지방선거와 7·26 재·보궐 선거의 패배로 민주당에 내줬다. 1998년부터 지켜온 울산의 기초자치단체장 두 석도 날아갔다. 2002년에 견줘 지방의원 수가 늘었지만 투입 대비 산출을 따지자면 성적이 나아졌다고 보기 어렵다. 열린우리당의 완패로 민주노동당의 패배가 상대적으로 작아 보였을 뿐이다.
NL-PD 정파 대립의 굴레
위기의 지표인 정당 지지율은 하락하는 추세(표1 참조)다. 4·15 총선 이후 한때 18% 안팎에 달했던 지지율은 반토막이 났다. 지방선거 직후인 6월17일 당이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한길리서치에 맡겨 실시한 조사(전국 성인남녀 1천 명, 95% 신뢰수준에 ±3.1%)에서 정당 지지율은 6.7%까지 떨어졌다. 민주당은 7.3%로 나타났다. 총선 뒤 여론 조사상 처음으로 민주당에 뒤진 것이다. 심상정 의원은 “당 지지율이 한계 지지율에 와 있다”고 말했다. 탈출구 없이 현 상태가 지속된다면 예전처럼 국민 3~4%의 관심에 머무는 정당이 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들린다.
지지율이 한계 상황에 이른 원인은 뭘까? 구조적이고 복합적이다. 지도부의 리더십과 인물난, 조직의 난맥상뿐만 아니라 당이 취해온 노선의 문제까지 다양하게 지적되고 있다. 한 중앙 당직자는 “총체적 위기다. 난국이다. 지도부가 안 보인다”고 말했다. 위기 상황에서 지도부의 리더십 부재를 꼬집는 얘기일 뿐만 아니라, 리더십 부재가 위기를 악화시켰다는 인식은 정파를 떠나 당내에 지배적이다. 지방선거의 첫 번째 패인으로 꼽히는 “중앙당이 없었다”는 것도 결국 지도부의 리더십이 보이지 않았다는 말이다.
한 당직자는 “지도부가 정파끼리의 ‘황금분할’이라고 할 만큼 조직의 안정적 운영에만 신경쓰고 있다”고 말했다. 연초 지도부를 한 번 갈아엎은 것이 당을 과감하게 바꾸고 개혁하자는 뜻인데 지도부가 이것저것 재느라 그 구실을 못하고 있다는 불만이다. 김현우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위원은 “지도부의 시야는 문제다. 문성현·김선동 체제는 지난번 김혜경·김창현 체제 때보다 못하다”고 말했다.
리더십에 대한 비판은 한국 정치판의 지역감정처럼 입을 떼기도 불편한 자주파(NL)-평등파(PD)의 대립이 굴레로 작용하는 것을 무시할 수 없다. 윤영태 인터넷실장은 “좋게 얘기하면 독주 견제이지만 최고위원회가 당 대표의 발목을 잡는 것을 포함해 지도부가 리더십을 발휘할 수 없는 구조”라고 말했다. 당이 현안에 발빠른 대응을 하지 못하는 것도 상호 견제와 감시란 명분 아래 의사결정 과정과 구조가 한층 복잡해진 탓도 있다. 그리고 정파 간 대립과 긴장은 당내 정치의 과잉을 불러왔다. 대국민 정치가 그만큼 소홀해질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당의 위기가 외부가 아닌 내부에 있다는 진단과 경고는 설득력 있다. 정태영(75) 선생은 (후마니타스)에서 “많은 사람들이 진보운동은 정권의 탄압이나 냉전과 같이 외적인 요인들에 의해 좌절되었다고 말한다 … 더 중요한 측면은 진보운동이 현실에 기초를 튼튼히 둔 이념적 좌표를 세우는 데 실패하고, 조직에서 건전한 작풍을 만드는 데 실패하고, 당내 정파들의 조급한 헤게모니 투쟁 때문에 분열하고 결과적으로 대중으로부터 유리되었다는 사실”이라고 일갈했다.
당은 내부에선 분열적이면서도 외부로는 폐쇄적이기도 하다. 당직·공직 후보 선출권이 당원에게만 주어진 상황에서 일반 대중이 참여할 틈이 없다. 정치권에서 대선후보의 방식으로 국민참여경선제를 넘어 ‘오픈 프라이머리’까지 검토하며 대중참여의 공간을 넓히는 것과 대조된다. 대중과 당의 거리감이 큰 요인이기도 하다.
두가지 성역, 민주노총과 북한
위기는 더 근본적으로 당의 잠재적 지지층에게서 대안정당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데서 찾을 수도 있다. 한길리서치 조사에서 ‘진보적’ 정치 성향을 지닌 응답자의 13.7%만이 민주노동당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진보층에서도 대안정당으로 선택받지 못하는 것이다. 지방선거에선 열린우리당 지지층의 표도 끌어오지 못했다. 무능한 참여정부와 집권여당에 등돌린 진보 성향의 표심이 민주노동당으로 쏠릴 것이란 낙관적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당이 적극적으로 대안정당으로서 모습을 갖추지 못한다면 반사효과를 누릴 수 없다는 현실을 확인했다. 아울러 서민 정당을 표방하면서 저소득 계층을 끌어오지 못하는 것도 당이 풀어야 할 난제다.

민주노동당엔 두 가지 성역이 있다. 민주노총과 북한이다. 당의 언어를 제약하는 단어들이다. 특히 민주노총과의 관계 설정 문제는 대중정당으로서 정치적 입지를 좁히고 있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가 2005년 10월 실시한 전화조사(전국 성인남녀 700명·신뢰수준 95%에 표본오차 3.7%)에서 국민들은 민주노동당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노조에 치우친 활동’(26.8%)을 꼽았다. 당의 토양이자 최대 지분을 가진 민주노총이 이제 걸림돌로 작용하는 것이 아픈 현실이다. 이창우 부산시당 사무처장은 “민주노총은 대기업·정규직 중심의 노동운동으로 고립되고 공격받았다. 그 와중에 도덕적으로 지탄받을 만한 사건들이 터지면서 민주노총에 대한 실망감이 당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며 “민주노총 등 조합 운동세력의 그늘에서 벗어나 그야말로 계급운동으로 한 단계 도약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당의 현 상황을 조금 색다르게 분석하는 이들도 있다. 바로 거품론이다. 심상정 의원은 “4·15 이후 당 지지율을 어떻게 끌어올릴 것인가라는 정치공학적 접근으로 10만 당원, 2012년 집권론 등 거품 신화에 집착하는 행태를 보여왔다”고 말했다. 최근 상황은 거품이 빠지는 과정이라는 얘기다.
위기의 돌파구는? “당이 한 번 흔들려야 한다.” 민주노동당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또 다른 말이다. 현재 추진되고 논의되는 수준의 시스템 정비로는 당면한 위기를 타파할 수 없다는 절실함에서 나오는 탄식들이다. 뭔가 충격요법을 바라는 것이다. ‘혁신’을 향해 돌진할 수 있는 “돈키호테들이 필요하다”(장석준 진보정치연구소 연구위원)는 얘기도 나온다.
그러나 좀처럼 계기가 없다. 한 보좌관은 “선거 뒤 평가 투쟁을 놓친 것은 결정적”이라고 말했다. 민주노동당은 정치권의 주요 이슈에서 소외돼 있다. 정계 개편이나 개헌의 주체도 대상도 아니다. 대선후보를 중심으로 한 이슈에도 끼지 못하고 있다.
2단계 도약 위한 새로운 에너지를
구체적인 해법은 백인백색이다. 눈에 띄는 것은 ‘대선후보 조기 가시화론’과 ‘내적 성장론’ 정도다. 대선후보 간 경쟁을 빨리 붙여 그들을 중심으로 당의 진로를 모색하고 선택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리더십 부재도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해결할 수 있다는 논리다. 꼭 대척점에 서 있다곤 할 수 없지만 당이 어디로 가야 할지 진로를 재정비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시각도 있다. 문제는 이런 해법의 차이에 대한 논쟁마저도 좀처럼 불붙지 않는다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1단계 성장은 이뤘다. 어찌 됐든 진보정당의 창당과 원내 10석을 만들어냈다. 그러면서 1단계 연료는 다 소진했다. 이제는 원내 교섭단체 구성이든 집권여당이든 2단계 도약을 위한 새로운 에너지가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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