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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바 롯데 라커룸의 ‘폭탄 선언’

등록 2006-08-10 00:00 수정 2020-05-03 04:24

통산 400호 홈런 쏘아올린 이승엽의 도쿄돔 신화는 어떻게 시작됐나…“돈 보다 수비” 모두가 우려했던 요미우리행 결단은 최고의 승부수

▣ 김동훈 기자 한겨레 스포츠부 기자 cano@hani.co.kr

요미우리 자이언츠 팬들은 경기가 끝난 뒤에도 한참 동안 자리를 뜨지 않았다. 온갖 격려하는 피켓을 흔들었고, 또렷한 한국말로 ‘이승엽’을 연호했다.

8월의 첫날, 이승엽은 한-일 통산 400호와 401호 홈런으로 열대야에 찌든 한국 팬들을 짜릿하게 만들었다. 이승엽은 경기가 끝난 뒤 “한국에서 324개를 때리고 일본에서 77개를 때렸는데 일본 언론이나 팬들이 한국에서의 기록을 인정해주느냐는 문제가 마음에 걸렸다”고 솔직히 털어놨다.

하지만 도쿄의 밤은 뜨거웠다. 5만5천 석 수용 규모의 도쿄돔에는 4만4146명이 몰려들었고, 일본 언론은 다음날 이승엽의 400호 홈런을 대서특필하며 축하해줬다. 20대에 400호 홈런을 넘긴 오 사다하루(66·왕정치·소프트뱅크 감독)와 알렉스 로드리게스(31·뉴욕 양키스)에 비유하며 극찬했다.

내년 연봉 5억엔 이상 제시할 듯

이날 경기는 요미우리의 상대가 ‘숙명의 라이벌’ 한신 타이거스였기 때문에 더욱 극적이었다. 간토 지방을 대표하는 도쿄의 요미우리와 간사이 지방의 대표 도시 오사카를 연고로 하는 한신의 맞대결은 묘한 지역감정까지 맞물려 있다. 두 팀의 대결은 자이언츠와 타이거스의 영문 앞글자를 따 ‘G-T전’이라고도 불린다.

이날 요미우리 팬들에게 이승엽이 안겨준 감동은 남다르다. 1회 말 한-일 통산 400호 홈런에 이어 9회 말 극적인 끝내기 홈런이 터지자, 점잖게 지켜보던 내야석 관중까지 일제히 일어나 만세를 부르고 한국에서 온 ‘외국인 선수’에게 열광적인 박수를 보냈다. 반면, 이승엽에게 홈런 두 방을 맞고 무너진 센트럴리그 최고의 좌완투수이자 한신 에이스 이가와 게이는 분한 마음에 손까지 부르르 떨면서 라커룸 벽을 내리쳤다.

이승엽은 올 시즌 한신에 유난히 강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지난 4월21일 도쿄돔에서 열린 한신과의 경기에서 연장 11회 말 마무리 구보타 도모유키를 상대로 끝내기 역전 투런홈런을 터뜨렸다. 지난 2일 경기에서도 6회 역전 결승 아치를 그렸다. 이승엽은 이제 요미우리와 한신 팬 모두의 뇌리 속에 지울 수 없는 존재로 각인됐다. 이미 내년 시즌을 준비하고 있는 요미우리는 올해로 계약이 끝나는 이승엽에게 연봉 5억엔(50억원) 이상을 제시할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승엽을 놓칠 경우 극성스런 요미우리 팬들의 거센 비난에 직면할 것은 불보듯 뻔하다. 이승엽은 명실공히 도쿄돔의 정상에 우뚝 선 것이다.

그러나 8개월 전 도쿄돔의 풍경은 정반대였다. 지난해 11월13일 코나미컵 아시아시리즈가 끝난 뒤 당시 지바롯데 마린스 소속이던 이승엽은 답답한 마음을 애써 짓누르고 있었다. 이 대회에서 타격이 신통치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이승엽은 경기가 끝난 뒤 한국 기자들에게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이날은 이승엽이 롯데와의 2년 계약이 끝나는 날이다. 구단과 무관하게 이뤄진 기자회견인 탓에 인터뷰는 라커룸에서 경기장으로 통하는 좁은 복도에서 선 채로 이뤄졌다.

이 자리에서 이승엽은 ‘폭탄 선언’을 했다. “오늘로서 시즌이 모두 끝나 발표하게 됐다. 2년 전 (협상 실패의) 시행착오를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전담 에이전트를 선임했다.” 그의 말투는 비장했다. 그는 “돈보다 수비가 더 중요하다”며 더는 보비 밸런타인 롯데 감독의 플래툰 시스템(주전 경쟁)의 희생양이 되지 않겠다는 뜻을 강하게 내비쳤다. 이승엽은 머지않아 롯데와의 결별을 선언했다.

하루 1천 번의 스윙으로 단점 극복

이승엽은 곧이어 ‘한국 선수들의 무덤’ 요미우리로 전격 이적했다. 요미우리는 조성민, 정민태, 정민철, 선수가 줄줄이 쓴잔을 마신 곳이다. 롯데의 타격 인스트럭터로 자신의 재기를 도운 ‘스승’ 김성근 감독의 만류도 소용없었다. 연봉조차 2억엔(20억원)에서 1억6천만엔(16억원)으로 깎이는 것도 감수했다. 한국 무대에서 홈런 라이벌이던 타이론 우즈(주니치 드래건스)의 연봉이 5억엔(50억원)인 것에 비하면 자존심마저 팽개친 결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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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엽은 지난해 하루 1천 번의 스윙과 삭발 투혼으로 각오를 다졌다. 들쭉날쭉한 출장 속에서도 30홈런을 날렸고, 일본시리즈 네 경기에서 생소한 센트럴리그 투수들을 상대로 3개의 홈런과 6타점으로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롯데에서 이승엽의 미래는 여전히 불투명했고, 그는 요미우리 이적이라는 모험수를 뒀다.

이승엽의 선택은 옳았다. 이승엽은 하라 다쓰노리 감독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았다. 하라 감독은 시범경기 부진에도 불구하고 이승엽에게 4번 타자라는 중책을 맡겼다. 요미우리 역사상 70번째, 외국인 선수로는 1981년 로이 화이트, 1987년 워런 크로마티에 이어 19년 만에 맡겨진 중책이다. 요미우리에서 4번 타자가 어떤 자리인가. 나가시마 시게오(25번째) → 오 사다하루(28번째) → 장훈(39번째) → 하라 다쓰노리(48번째) → 마쓰이 히데키(62번째)로 이어지는 요미우리 4번 타자는 일본 프로야구의 역사 그 자체다.

하라 감독은 이승엽이 5월 말 잠시 슬럼프 기미를 보일 때도, 팀 성적이 곤두박질칠 때도 변함없이 이승엽을 1루수 겸 4번 타자로 기용했다. 이승엽은 올 시즌 작은 부상으로 딱 한 경기만 결장했다. 롯데 시절 2년 동안 밸런타인 감독의 ‘눈칫밥’을 먹으며 무던히도 마음고생을 했던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이승엽은 지난 2년간 자신을 괴롭혔던 집요한 몸쪽 승부와 포크볼 같은 떨어지는 변화구에 몰라보게 적응했다. 타석에서 좋은 공을 기다릴 줄 아는 여유가 생겼다. 선구안도 놀라울 정도로 좋아졌다. 상대 투수의 가운데 몰리는 실투성 공에만 편중됐던 홈런도 몸쪽, 바깥쪽, 가운데 가릴 것 없이 부챗살로 고르게 퍼졌다. 올 시즌 34개의 홈런을 분석하면 오른쪽이 17개, 왼쪽이 6개, 가운데가 11개였다. 구종도 직구(18개), 슬라이더(6개), 포크볼을 비롯한 체인지업(5개), 커브(4개) 등 골고루다.

이승엽은 2일 현재 센트럴리그와 퍼시픽리그를 통틀어 홈런 1위를 질주하고 있다. 2위 타이론 우즈(25개)와도 무려 9개 차이다. 홈런왕은 이미 예약해놓았고, 시즌 50호 홈런까지 넘보고 있다. 현재 2.8경기당 1개의 아치를 그리고 있어, 산술적으로는 52개까지 가능하다. 오 사다하루가 가지고 있는 일본 프로야구 한 시즌 최다 홈런(55개)에 근접하는 수치다. 시즌 막판 몰아치기에 성공한다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한 시즌 최다 홈런(56개)을 일본 무대에서 깨뜨리는 엄청난 사건이 일어날 수도 있다.

500호 홈런, 메이저리그에서 쏠까

올해로 요미우리와 계약이 끝나는 이승엽은 이제 일본 무대를 넘어 메이저리그를 넘보고 있다. 그의 바람대로 통산 300호 홈런은 한국에서, 400호 홈런은 일본에서, 500호 홈런은 ‘꿈의 무대’ 미국에서 쏘아올릴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이승엽은 오는 18일 서른 번째 생일을 맞는다. 앞으로 10년간 선수생활을 더 한다면, 오 사다하루(868개)와 행크 아론(755개)의 통산 최다 홈런 기록에도 당당히 도전장을 내밀 만하다. 상상만으로도 즐거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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