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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 취소! 박수가 터져나오다

등록 2006-07-06 00:00 수정 2020-05-02 04:24

고함과 삿대질 속에 총련과의 5·17 성명 백지화한 민단 임시중앙위 현장 … 일본 정부와 언론이 내분 확대 부추겨… ‘파친코 단속’의 카드로도 압박

▣ 도쿄=박중언 특파원 parkje@hani.co.kr

양대 재일동포 단체인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과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의 역사적 화해가 민단의 내분으로 한 달여 만에 사실상 좌절됐다. 과거의 적대 의식을 극복하고 동포 사회의 화합을 달성하겠다며 지난 5월17일 총련을 방문하고 공동성명을 채택해 화해의 첫발을 내디뎠던 민단 집행부는 내부 반발에 발목이 잡혀 주저앉고 말았다.

민단 내 반대파들의 격렬한 항의

총련과의 화해를 둘러싼 민단의 치열한 내분은 6월24일 열린 임시 중앙위원회에서 절정으로 치달았다. 지난 2월 당선된 하병옥 단장 등 집행부는 이날 회의를 통해 이번 사태를 일단락지으려 안간힘을 쏟았다.

반면, 반대파는 하 단장 축출 또는 무력화의 장으로 이 자리를 활용했다. 회의장인 도쿄 미나토구 민단 중앙본부 8층 강당은 고함과 고성, 욕설에 가까운 험한 말, 삿대질이 난무하는 난장판이나 다름없었다.

하 단장은 지방의 의견 수렴 없이 총련과의 전격 화해를 추진한 데 대해 여러 차례 고개를 숙여 사죄했다. 협상 창구였던 강영지 기획조정실장의 사임에 이어 부단장 5명도 전면 교체하는 등 집행부도 새롭게 구성하겠으니 이쯤에서 마무리짓게 해달라고 하소연했다.

그러나 강경한 지방본부 단장들의 집행부 성토는 시간이 지날수록 격렬함을 더해갔다. 이들은 총련과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한통련)은 민단을 파괴하려던 조직이라며 극도의 적개심을 나타내면서, 60년 역사를 지닌 ‘훌륭한 민단’을 사수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은 공동성명의 백지화와 단장 인책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일부 지방본부 단장들의 서명을 받아 단장 불신임 긴급동의를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회의가 시작된 지 5시간 가까이 흐른 뒤에도 사태가 진정되지 않자, 하 단장은 ‘마지막 승부수’를 던지고는 곧바로 폐회를 선언하도록 했다. 그것은 “공동성명은 실제 백지로 돌아간 것이나 같은 상태”라는 말이었다. 이를 사실상의 ‘항복 선언’으로 받아들인 반대파에선 박수가 터져나왔다. 하 단장을 몰아내지는 못했지만 무력화하는 데는 성공했다는 승리의 표시였다. 반대파의 선봉에 서온 한 지방단장은 “긴급동의도 받아들이지 않고 의사진행이 엉망”이라면서도 “공동성명이 백지화된 것은 유일한 성과”라고 주장했다.

하 단장은 공동성명을 철회한 것은 아니라고 밝히며 화해의 불씨만은 꺼트리지 않으려 애썼다. 6·15 민족대축전 공동 참가와 8·15 기념행사 공동 개최 등 총련과 약속한 사안들을 이미 이행할 수 없게 된 상황인데다 내분을 더 이상 악화시킬 수 없어 부득이하게 물러섰을 뿐 화해 의지에는 변함이 없다는 뜻이다. 공동성명을 크게 반겨온 오사카 본부의 한 간부는 “동포들의 환영을 받은 공동성명이 백지 철회된다면 민단의 신뢰는 어떻게 되겠는가”라며 이번 사태로 인해 동포들의 민단 이탈이 가속화하지 않을까 우려했다.

민단 집행부의 화해 노력이 이처럼 무기력하게 와해된 단서는 집행부가 제공한 측면이 있다. 의욕이 앞서 전격 화해 선언이 몰고 올 파장을 제대로 예측하지 못했다. 내부 정지 작업도 하지 않은 채 방해 공작만 의식해 은밀하게 추진한 것이 엄청난 후폭풍을 불러왔다. 밀실협상, 지나친 양보라는 결정적 공격의 빌미를 제공했다. 화해에 부정적인 일본 언론에 대한 대응책 등 사후 대처에서도 미숙함을 드러냈다. 6·15 행사가 임박했다는 시기적 촉박함도 집행부가 서두르게 한 원인이 됐다.

그래도 지방단위 화해 움직임은 확산

반대 세력은 △집행부의 독단적 결정 △탈북자지원센터 활동 유보 △한·일 납치 피해자 연대가 활발한 시기에 총련과 손잡은 판단 실수 등을 문제 삼으면서 공세의 수위를 높여나갔다. 집행부에 불만을 나타낸 간부들 가운데선 적절한 선에서 사태가 수습되기를 기대한 사람들이 많았으나, 단장 선거에서 진 반대파와 화해에 거부감을 가진 강경파들이 강공을 주도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됐다.

반대 세력에 힘을 실어줌으로써 내분 확대를 결정적으로 부추긴 것이 일본 정부와 언론이다. 북한의 납치 문제 해결을 절체절명의 과제로 삼고 있는 이들은 총련과의 화해를 통한 민단의 ‘납치 전선’ 이탈을 막기 위해 방해 책동을 서슴지 않았다. 언론들은 민단 반대 세력의 움직임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노골적인 민단 지도부 ‘때리기’에 나섰다. 민단이 총련에 놀아나고 있다는 식으로 비난하는가 하면, 인도적 사안인 납치 문제를 외면해 일본 사회의 큰 불신에 직면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공안당국을 비롯한 정부 기관들의 압박은 한층 강력한 효과를 발휘했다. 파친코 경영이나 자영업이 대부분인 민단 동포들에게 경찰과 세무당국의 한마디는 생존의 위협이나 다름없다. 정치색이 가장 덜한 상공인 단체인 민단 상공회의소의 집행부가 지난 23일 공동성명 백지 철회라는 강도 높은 요구를 내놓은 게 대표적인 사례다. 상공회의소 간부는 “일본 당국이 민단의 파친코 등을 대상으로 단속을 심하게 하고 있다는 소문과 함께 그런 움직임이 감지됐다”며 “일본 사회에서 사업을 해나가야 하는 동포들로선 부담이 매우 크다”고 털어놓았다. 게다가 일본의 경찰 책임자는 의회에서 총련이 파괴활동방지법 대상 단체임을 거론하며 “민단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해 민단 관계자들을 바짝 긴장시켰다.

남북 화해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가운데서도 대립의 섬으로 남아 있던 두 단체 지도부의 화해가 사실상 무산된 데 대해 재일동포들은 안타까운 마음을 금하지 못하고 있다. 정갑수 코리아엔지오센터 대표는 “두 단체 중앙본부의 화해로 동포 사회의 화합이 더욱 활기를 띨 것으로 기대했는데 몹시 실망스럽다”며 아쉬움을 나타냈다. 그러나 이번 사태가 동포 사회에 끼치는 부정적 영향은 그리 크지는 않을 것이란 게 대체적인 관측이다. 정 대표는 “지방 단위의 화해 움직임은 확산 추세여서 속도가 조금 떨어질 수는 있어도 큰 흐름은 흔들림 없이 지속될 것”이라며 “별다른 우려는 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총련 쪽에서도 비교적 담담한 반응을 보였다. 지금 약속 위반이라고 다그치면 그나마 ‘대화가 되는’ 민단 집행부가 더욱 궁지에 몰릴 게 분명하므로, 내부가 정비되기를 기대하면서 지켜보겠다는 방침이다. 총련 관계자는 “5·17 공동성명이 철회되지 않고 살아 있다는 데 주목하고 있다”며 “절대 사문화화지 않는다는 게 총련의 방침”이라고 강조했다.

총련 “5·17 공동성명은 살아있다”

과감한 화해 결단을 내린 민단 새 집행부는 내부 반대파와 일본 정부·언론의 협공에 무릎을 꿇었다. 총련과의 화해는커녕 내부의 대립만 키우는 등 잃은 게 적지 않다. 그렇지만 이번 사태는 냉전 의식에 사로잡힌 일부 민단 간부들의 총련·한통련에 대한 뿌리 깊은 적대감이 화해의 최대 장애물이란 점을 확인시켜줬다. 이와 함께 재일동포들의 화합을 바란다면서도 실제로는 노골적 방해를 일삼는 일본의 이중성을 깨닫게 하는 ‘수확’도 거뒀다.

한겨레 저널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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