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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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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나 월드컵’의 딜레마

등록 2006-06-22 00:00 수정 2020-05-02 04:24

전후반 경기력 차가 커지고 역전과 중거리슛이 많은 건 기후 탓? … 테크니션의 드리볼링과 공격수의 개인기 즐기려면 태양 열기가 꺾여야

▣ 프랑크푸르트= 서형욱 문화방송 해설위원·엠파스 스포츠팀장

뜨겁다. 건조하다. 한국에서라면 웬만해선 맛볼 수 없는 사우나 같은 여름. 30도에 육박하는 기온이 20%대의 습도와 만나니 콧속이 바싹 마르고 입술은 부르튼다. 한국의 끈적한 무더위에 비하면 땀에 절어 불쾌한 기분은 덜하지만,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느껴지는 갈증과 꽉 틀어막힌 콧속은 아무래도 적응하기 쉽지 않다. 한가로이 그늘만 찾아 이동하는 내가 이럴진대 그라운드에서 온몸을 불사르는 선수들이야 어떻겠는가. 매 경기 전반과 후반의 경기력에 큰 차이가 발생하는 것, 그래서 역전 승부가 빈번하게 벌어지는 것도 이런 기후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측면 공격수들의 체력소모 커져

대회 둘쨋날. 파라과이를 1-0으로 격파한 잉글랜드 선수들의 표정이 밝지 않다. 경기 내내 유난히 지쳐 보이는 선수들의 표정 못지않게 이번 대회를 끝으로 지휘봉을 놓는 에릭손 감독과 그 옆에 앉아 열심히 견습 과정을 밟고 있는 ‘차기 감독’ 매클라렌 역시 잔뜩 찌푸린 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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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 역시 다 기후 탓이다. 승리의 기쁨으로는 극도의 목마름을 해갈할 수 없었던 게다. 결국 잉글랜드 축구협회는 다음날 대변인을 통해 가벼운 불평을 늘어놓게 된다. “물을 더 많이 준비해달라. 평소엔 20ℓ면 충분했는데 이번 경기에선 70ℓ 정도 마셨다. 그리고 선수들이 더 쉽게 물을 마실 수 있도록 그라운드 주변에 더 많은 물통을 구비해달라.” 잉글랜드 축구협회가 유난을 떤다고 느꼈을 팀이 많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 역시 첫 경기 뒤엔 전적으로 동조할 수밖에 없었을 거다. 작렬하는 태양과 매우 낮은 습도에서 90분 내내 최상의 경기력을 과시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절감했을 터이니. 역전 승부가 속출하는 과정에서도 밤 9시(한국시각 새벽 4시) 경기에서는 의외의 승부가 적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가 아닐까.

한 번 더 생각하면, 이번 대회에서 중거리 슛이 유난히 많은 것도 날씨 탓일지 모르겠다. 상대팀 선수들과 몸을 부대껴야 하는 페널티 박스 안쪽에서의 다툼은 달갑지 않은 일. 그러니 상대 선수와 경합하는 상황을 만들기 전에 공을 냅다 후려차는 편이 속시원한 선택일 수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이번 대회의 공인구인 ‘팀 가이스트’는 역대 공인구 가운데 가장 탄력이 좋다는 평을 듣는 공 아니던가. 더위에 지친 선수들의 발끝을 떠나 쉼 없이 쭉쭉 뻗어나가 상대팀 골망에 꽂히는 이 신생구의 위력에 골키퍼들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푸념을 늘어놓고야 만다. 하지만 빠르고 길게 공을 넘겨주는 선수들의 플레이는 동료들에게 환영받지 못할 때도 있다. 최후방에서 전방으로 한 번에 찔러주는 패스가 많이지면서 측면 플레이어들의 체력 소모가 커졌다. 빈 공간에 떨어진 공을 쫓기 위해 온 힘을 기울여 뛰어야 하는 측면 공격수들에게 땡볕 아래의 전력질주는 그야말로 끔찍한 일. 측면 공격수들의 날카로운 크로스가 상대팀 최종 수비수와 골키퍼 사이를 송곳처럼 찌르는 장면을 더 자주 보기 위해서는, 그리고 상대와의 경합을 마다않는 탁월한 테크니션들의 유려한 드리블링과 수비수들을 속아넘기는 공격수들의 개인기를 즐기기 위해서는 독일의 6월 오후를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이 잠시 열기를 가라앉혀주어야 한다. 현란한 개인기를 자랑하는 브라질 대표팀의 조별 예선 일정이 한낮의 열기와 한 번도 만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화려한 테크닉을 즐기려는 축구팬들에게는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겠다.

네덜란드 출신 용장들, 적지에서의 환희

독일과 네덜란드는 숙적이다. 축구판에서도 다르지 않아 두 팀 간의 승부는 ‘유럽의 한-일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치열하다. 언젠가 두 나라의 대표팀이 맞붙었을 때 독일 공격수 펠러와 네덜란드 수비수 라이카르트가 서로의 얼굴에 타액을 명중시키려다 빨간색 카드를 받았던 장면은 상징적인 대목이다.

그래서일까. 독일월드컵에 참가한 네덜란드 출신 감독이 이끄는 팀들의 성적이 빼어나다. 승리는 물론 명승부를 엮어내며 팬들을 매혹한다. 그 중심에는 네덜란드 감독들의 탁월한 용병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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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거론해야 할 것은 역시 대한민국과 오스트레일리아다. 우리와 깊은 인연을 간직한 감독들이 이끄는 두 팀은 감독의 두뇌가 얼마나 극적인 승부를 연출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명징한 사례다. 대한민국의 아드보카트 감독은 난적 토고와의 경기를 앞두고 후반을 대비했다. 상대의 허를 찌르듯 그간 연습해온 포백 대신 스리백 수비를 내세웠고, 모두가 선발로 예상했던 김남일과 안정환을 벤치에 앉혔다. 수비진의 실수로 0-1로 뒤진 채 전반을 마쳤지만, 아드보카트가 준비한 후반전 카드는 아직 주머니 속에 남아 있는 상황. 이천수에게 맡긴 프리킥이 불을 뿜자 아드보카트의 첫 번째 카드인 안정환이 드라마를 완성한다. 박지성이 수비수를 달고 반대편으로 움직이자 그 뒤에 남겨진 공간에서 안정환은 역사적인 중거리포를 성공시켰다. 안정환, 조재진, 이천수, 박지성 등 공격수 4명을 동시에 가동한 아드보카트의 구상이 먹혀든 것이다.

오스트레일리아의 히딩크 감독도 아드보카트 못지않다. 일본에 어이없이 선제골을 내준 그는 후반 들어 장신의 케네디를 최전방에 투입했고, 그는 히딩크의 기대에 부응하며 일본 수비를 허물기 시작했다. 하지만 역전극의 마무리는 히딩크가 추가 투입한 두 선수의 몫이었다. 부상에서 갓 회복한 팀 케이힐은 동점골과 역전골을 터뜨렸고, 알로이지는 추가골을 집어넣으며 3-1로 점수 차를 벌렸다.

네덜란드 대표팀을 이끄는 마르코 바스턴의 승리가 상대적으로 평범한 성과라면 트리니다드토바고의 감독 레오 베인하커르의 경우는 어떨까. 이번 대회에서 최약체로 분류된 트리니다드토바고는 1승은 고사하고 단 1골도 넣기 쉽지 않을 거라는 전망 앞에 이견을 달지 않았던 팀. 한때 유럽 챔피언스리그 득점왕에 오르기도 했던 드와이트 요크만이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뿐이었다. 하지만 트리니다드토바고에는 왕년에 레알 마드리드, 아약스, 네덜란드 대표팀 등을 이끌었던 명장 베인하커르가 있었다.

스웨덴, 베인하커르의 책략에 말려들다

베인하커르는 이날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20세기 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대표 공격수로 이름을 날렸던 요크의 보직을 과감히 중앙 수비형 미드필더로 바꾸었다. 그리고 요크는 중원에서 상대 선수에게 무수한 태클을 시도하는, 낯설지만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며 팀 수비를 이끌었다. 그 덕분에 트리니다드토바고는 수비수 한 명이 퇴장당하는 악재에도 불구하고 0-0 무실점을 지켰고 승점 1점을 따냈다. 베인하커르의 책략에 말려든 스웨덴은 라르손, 이브라히모비치, 융베리 등의 스타를 앞세우고도 이변의 희생양이 된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고,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한 이들은 이튿날 회복 훈련 도중 팀 동료들끼리 주먹다짐을 벌이는 ‘자학성’ 뒤풀이로 무너져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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