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교민 축구동호회 연습경기에 낀 길윤형 기자가 후반전에서 축출된 사연… 유럽 교포들을 묶어주는 축구공, 파리화랑과 주영대사배 오픈 축구대회를 아십니까
▣ 말메종·뉴몰든=글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 기자님 좀 같이 올라갑시다.”
이미 탈진 단계에 들어선 기자를 향해 ‘센터백’ 구준원(33)씨가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힘없이 고개를 끄떡이며 4백 수비라인을 정렬시키기 위해 앞으로 발길을 떼지만 턱까지 차오른 숨을 고르기가 쉽진 않다. 미드필드에서 이어지던 세밀한 공방은 이내 상대팀의 승리로 끝나고, 흐물해진 버터를 예리하게 자르고 들어오는 칼날 같은 ‘킬’ 패스 한 방에 우리 팀 4백 라인은 타이타닉 밑바닥에 물 새듯 금세 허점을 드러낸다.
“전반에 고생하셨으니 후반엔 쉬심이…”
패스를 받은 상대팀 오른쪽 윙포워드 한민택(34) 신부의 날카로운 침투가 이어진다. ‘저걸 따라붙어 크로스를 저지해야 하는데!’ 생각은 이영표지만 몸뚱아리는 어쩔 수 없는 길윤형이다. 경기 초반부터 왼쪽 ‘윙백’ 역할에 충실하겠다며 시키지도 않은 오버래핑에 가담해 체력을 고갈시킨 탓에 경기 시작 10분 이후로 다리는 벌써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물론 두어 번 연결된 패스를 제대로 받아내지 못하자, 더 이상 패스조차 들어오지 않는다.
22명의 선수들이 빠르게 공격에서 수비로, 수비에서 다시 공격으로 전환하는 다이내믹 속에서 약간은 ‘왕따’가 된 듯한 느낌이 머리를 스치는 사이 미드필드의 혼전 속에서 튕겨져나온 공이 간만에 기자를 향한다. 기세 좋게 공을 받아들고 패스할 곳을 찾았지만 이리떼같이 달려드는 상대 공격수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세네갈전에서 설기현 역주행하는 기세로 우리 편 골문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전반에 고생하셨으니, 후반에는 좀 쉬심이….” 5월27일 프랑스 파리 근교 뤼알 말메종의 스타 드 파크 구장에서 벌어진 프랑스 교민·유학생들의 축구 동호회 ‘파리 화랑’의 연습 경기 후반전에서 기자는 마침내 축출되고 말았다.
‘파리 화랑’의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최장원(48)씨는 “해외에 흩어진 한인들을 이어주는 양대 축은 축구와 교회”라고 말했다. 파리 화랑은 최씨 등 파리와 그 주변에 사는 유학생·교포·입양아 등이 주축이 돼 1998년에 만든 축구 동호회로 매주 토요일 아침에 공을 차며 우애를 다진다. 지난 5월8일 제6회 ‘파리 화랑 축구대회’가 열렸고, 지금은 7월28일부터 4일 동안 경기도 파주 국가대표 훈련장에서 열리는 3회 ‘세계 한민족 체육대회’ 참석을 위해 맹연습 중이다. 매주 꾸준히 30명 정도가 모이는데 이날 모인 사람은 22명이었다.
“2002년에 얼마나 좋았는지 아세요? 여기 사람들이 우리 쳐다보며 엄지를 치켜들며 박수를 쳐주는데 너무 신나더라고요.” 최씨가 말했다. 파리 교민 사회도 이웃 나라 독일에서 열린 월드컵 인플루엔자에 전염돼 심한 몸살을 앓고 있었다. 그렇지만 걱정이 없진 않다. “지난 월드컵 때 우리가 16강에서 이탈리아를 꺾었잖아요. 그때 이탈리아 교민들과 여행객들 장난 아니었다니까요.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물병 세례 받고 구타당하는 사람도 많았고요. 프랑스전 승전을 기원하지만, 뒷감당이 어려워서.” 파리 교민들은 버스를 대절해 50명쯤 독일로 단체 응원을 갈 예정이다. 파리 화랑에서도 다섯 명이 이 여행에 동참한다.
한국이 프랑스를 이기면 어쩌지?
“축구가 객지에서 외롭게 생활하는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 같아요.” 축구단의 코치 이원준(39)씨가 말했다. 그는 중학교 3학년 때 프랑스로 이민와 이곳에 정착한 지 20년이 넘는다. “제가 비행기 타던 날이 다른 아이들 연합고사 보는 날이었거든요.” 그는 이곳에서 고등학교·대학교를 마쳤고, 28살의 늦은 나이에 김포 17사단 번개부대에서 군 생활을 했다. “의정부에 있는 ‘306보충대’에서 입대를 했죠. 아, 참 적응이 안 되더라고요.” “어, 형도 거기야?” 한국 남자 3명만 모이면 시작되는 군대 얘기로 잠시 무리가 시끄러워진다. 그는 1998년 월드컵은 말년 병장 때 군대 막사에서 봤다고 말했다.
축구 열풍은 프랑스 교민 사회에만 국한된 일일까. 런던 교민들의 축구 사랑도 이에 뒤지지 않는다. 런던에서 교외선을 타고 30분쯤 나가면 닿는 소도시 뉴몰든에는 한국 사람들이 모여사는 작은 한인타운이 형성돼 있다. 뉴몰든은 2차 세계대전 때 미군기지 사령부가 있었고, 이후 일본 회사들이 주변에 세워져 일본 사람들이 정착하기 시작했다. 한국인들이 모여든 것은 1990년대 초·중반부터다. 이곳은 영국에서도 학군이 좋기로 유명해 한국 학생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이들을 위해 한국 상점들이 하나둘씩 자리잡아갔다. 영국 전체 교민 3만5천여 명 가운데 2만여 명이 이 근처에 몰려사는데, 이는 뉴몰든 전체 인구의 10%에 해당한다. 거리를 걷다 보니 미장원 ‘Agassy’(아가씨)·만나상회·서울한의원·대영여행사·소주방 ‘고추사랑’ 등의 한국 간판이 눈에 띄었고, 심지어 근처 맥도널드에서는 한국말이 통했다. “빅맥 두 개 주세요.” “세트로 안 하실래요?” 박영재(45) 재영축구협회장은 “이곳에서도 축구는 한인들을 한데 묶는 끈”이라고 말했다.
재영대한체육회가 만들어진 것은 2002년 8월로, 영국에서는 유학생·교민·축구 유학생들로 구성된 수십 개의 팀이 주말마다 모여 경기를 한다. 박 회장은 “영국에 70여 개의 한인 교회가 있는데 교회마다 하나씩 축구팀이 있다고 보면 맞다”고 말했다.
파리 교민들의 자랑이 파리 화랑이라면, 영국 교민들의 자랑은 올해로 4회째를 맞는 ‘주영대사배 오픈 축구대회’다. 지난 5월13일 레인스 공원의 부시 풋볼 그라운드에서 열린 4회 주영대사배 축구대회에서는 18개 팀으로 나뉜 1천여 명의 한인들이 모여 공을 찼다. 축구팀들은 대부분 지역 한인교회의 이름을 걸고 대회에 참가했는데, 우승은 리젠트FC, 준우승은 한빛교회, 3위는 본머스 한인교회가 차지했다.
영국 70개 한인교회마다 축구팀 하나씩
“이제 후반전 시작해야죠.” 박창용 ‘파리 화랑’ 총무가 입을 열었다. 후반에는 지친 기자를 대신해 류우종 사진팀 기자가 전격 투입됐다. 키가 작은 편인 류 기자는 (기자가 보기에) ‘주책 없이’(!) 공격진에 포함돼 열심히 공을 쫓아다녔는데 실제 공을 만진 것은 몇 번 안 돼 보였다. 류 기자의 헛발질이 계속되는 사이 디자인 전공을 위해 파리에 왔다는 김원기(26)씨가 빠른 발을 이용해 연속골을 성공시켰고, 중앙 미드필더로 나선 허광욱(49) 목사도 안정된 실력을 선보이며 ‘노익장’을 과시했다.
빌 생클리 전 리버풀FC 감독은 “어떤 사람들은 축구가 생사가 걸린 문제라고 하지만, 난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실망감을 감출 수 없다. 축구는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다”라고 말했다. 축구가 생사가 걸린 문제인지 알 수 없지만 축구에 사람들을 한데 잡아끄는 마법이 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힘들다. 격렬한 운동에 달아오른 몸을 식히고 웃고 떠들며 파리의 차이나타운으로 몰려가 7유로짜리 베트남 쌀국수 한 그릇씩 먹고 각자의 길로 흩어져 일상으로 돌아갔다. 파리 화랑의 축구 사랑은 지치지 않고 계속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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