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쪽의 돌발요구는 없었으나 분야별 뚜렷한 입장차 확인한 1차 본협상… 농업·개성공단·자동차·의약품 분야는 막판까지 난제로 남을 공산 커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1차 본협상이 6월9일 끝났다. 농업·자동차·의약·섬유·금융서비스 등 총 17개 분과별로 진행된 이번 협상에서 분야별 쟁점은 예상대로 뚜렷하게 드러났다. 양쪽은 지난 5월19일에 이미 교환된 상대국의 협정문 초안을 각각 읽어보고 소감과 의문점을 묻고, 대답한 뒤 의견을 조율하는 형태로 협상을 진행했다. 일부 주요 쟁점에서 상당한 견해차를 보였지만 우려했던 돌발 쟁점은 등장하지 않았다.
협상이 열리기 전까지 상대 쪽이 협정문 초안에서 숨겨뒀던 돌발 요구를 내놓을 가능성 때문에 긴장했으나, 막상 협상 뚜껑을 열어보니 대체로 예상했던 내용과 수준이었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개성공단문제가 협상 무산시킬 수도
양국은 이번 1차 협상에서 통신·전자상거래, 경쟁, 노동 등 몇개 분과에서 통합협정문을 작성했다. 통합협정문이란 의견이 접근된 조항은 단일 문안으로 써넣고 합의가 안 되거나 덜 된 조항은 양쪽 의견을 함께 적거나 조항 전체 또는 일부를 공란으로 비워두는 방식으로 만든 합의문이다. 그러나 각 협정문의 합의 정도를 보면, 어떤 것은 조항 전체가 유보로 괄호 쳐져 있거나 어떤 것은 핵심 용어 하나가 괄호 쳐져 있는 식이다. 노동분과의 경우 통합협정문을 만들기는 했으나 미결 상태로 괄호 처리된 것이 많다. 이번 협상에서 괄호 처리된 이견들은 앞으로 계속 협상이 진행될 예정이다. 사실 1차 협상에서 양쪽은 굳이 통합협정문 작성에 무리하게 매달리지 말고 쟁점별로 계속 논의해나가자고 했다.
이에 따라 상품별로 (관세) 양허안과 서비스·투자의 유보안(개방 예외 리스트)이 교환될 2차 협상부터 주고받기를 통한 본격 절충이 시작될 것으로 보인다. 우리 쪽 김종훈 수석대표가 “건설적인 분위기 속에 순조롭게 진행됐다”고 말했지만, 앞으로 협상 타결을 낙관하기는 어렵다. 예상대로 서비스·자동차·의약품·섬유·무역구제 분야는 어느 조항보다도 양쪽의 이해관계가 엇갈려 난항을 예고했다. 특히 농업 개방과 개성공단 물품의 ‘한국산’ 인정 같은 최대 현안에 대해서는 양국 모두 비타협적인 자세를 굽히지 않았다. 쟁점 가운데 가장 정치성이 강한 개성공단 문제는 어느 한쪽이 기존 입장만 계속 고수할 경우 FTA 협상 전체를 무산시키는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오고 있다. 농업 분야 역시 한국으로서는 정치적 폭발성이 강하고 미국으로서는 협정 타결안에 대한 의회 비준에 직결되는 사안인 만큼 해법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1차 협상에서 대체로 농업·자동차·의약품 분야에서는 미국이 공세를 편 반면, 한국은 섬유·무역구제 등에서 미국에 개방 공세를 폈다. 사실 자동차와 의약품 분야는 한국의 세제 및 국민건강보험제도 자체를 건드리는 대형 쟁점이다. 그래서 자동차의 경우에는 이틀로 예정됐던 회의를 하룻만에 끝내는 등 굳이 의견 접근을 시도하지도 않았다.
우선 농업 분야의 경우 우리 쪽이 세이프가드(농산물 특별 긴급수입제한) 도입과 기존 저율관세할당수입제도(TRQ·수입초과 물량에 높은 관세를 물리는 제도) 유지를 주장했으나, 양국은 도저히 의견 접근이 불가능하다는 데 ‘합의’하고 통합협정문 작성을 포기했다. 동식물검역(SPS) 분야도 통합협정문 작성에 실패했다.
공기업 개방은 조율 진척
개성공단 문제의 경우 우리 쪽은 개성공단 생산물에 대해 ‘역외가공’ 방식의 원산지 특례 도입을 요구했다. 한국 상품의 원·부자재가 부가가치 기준으로 투입 비용의 60% 이상 사용됐을 때는 개성공단 등 역외에서 만들어졌다 해도 미국에 수출할 때 한국산으로 인정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개성은 한-미 FTA 범위 밖으로 본다”며 한국산 인정을 거부했다. 이에 따라 개성공단 역외가공 조항은 협정문에 괄호로 처리해 향후 계속 논의하기로 했다.
반면 미국 쪽은 자동차 배기량 기준 자동차 세제를 변경하라고 강하게 요구했다. 배기량을 기준으로 한 한국의 자동차 관련 세제는 대형 위주인 외국산을 차별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우리 쪽은 애초에 “자동차 세제가 지방 세수와 직결돼 있어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했으나, 이번 1차 협상에서 “기존의 배기량 기준 대신 가격 기준 등의 대안을 검토할 수 있다”며 수용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미국은 또 의약품 분야에서도 웬디 커틀러 미국 대표가 직접 협상에 참석하는 등 한국을 강하게 압박했다. 미국은 좋은 의약품에 대한 환자들의 접근성을 확보해야 하고, 급성 전염병이 퍼졌을 때 국가가 특허권을 강제로 파기하고 복제약 생산을 허용하는 ‘강제실시권’을 제한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의약품은 한-미 간에 오래된 통상 이슈로, 미국의 요구를 들어주면 약값이 오르고 건강보험 재정이 악화될 우려가 높다. 이에 대해 우리 쪽은 “국민건강보험제도의 재정 건전성이 유지돼야 하는 것이 우리 정부의 중요한 관심사다. 따라서 이에 상응하는 이해가 있어야 수용 가능한 해결책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맞섰다.
섬유는 애초 자유무역협정이 체결되면 한국에 가장 큰 수출 증대 혜택을 줄 것으로 기대됐던 분야다. 그러나 미국이 자국 취약 분야인 섬유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원사 기준’이라는 엄격한 원산지 규정을 도입하고 ‘특별 긴급 수입제한 조처’ 규정까지 넣겠다는 태도를 보여 전망이 불투명해졌다. 김종훈 수석대표는 “섬유는 우리가 엄청나게 중시하는 분야다. 미국이 다른 어떤 상품보다 섬유·의류 관세를 높게 책정하고 있는데, 우리는 미국 시장에 대한 시장 접근 개선을 강조했고 미국은 섬유에서 긴급 수입제한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했다”고 말했다.
철도·수도·가스 등 공기업 개방 문제는 당초 뜨거운 쟁점이 될 것으로 예상됐으나 우려와 달리 의견 조율이 꽤 진척된 분야다. 우리 쪽은 공공 분야는 통상적으로 FTA 협상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들어 개방 대상에서 제외하고, 공공성이 강한 공교육과 건강보험 분야도 협상에서 배제할 것을 주장했다. 이와 관련해 김종훈 수석대표는 “양국 모두 ‘정부가 독점을 지정할 수 있는 권한을 이 협정이 방해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조항을 두었기 때문에 쉽게 합의됐다. 양쪽이 필요에 따라 어떤 사업을 독점 또는 공기업 형태로 운영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고 말했다.
국내법·제도 변화, 숨겨진 쟁점
금융과 투자 분야의 경우 정부는 외환위기가 다시 발생하면 국외 송금 등을 제한할 수 있는 긴급제한 조처를 미국에 요구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를 들어주지 않고, 오히려 우리나라에 없는 신종 파생금융상품 등 ‘신금융서비스’를 허용해달라고 요구했다. 외환거래를 수반하는 신금융서비스는 환투기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어 자칫 국내 환율과 금융시장의 불안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김종훈 수석대표는 “금융 서비스 분과는 시간에 쫓겨 통합협정문을 못 만들었으나 2차 협상 이전까지 작성키로 했다. 미국 쪽 입장을 확인했기 때문에 돌아가 관계부처 간 대책회의 등을 통해 우리 입장을 정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특히 양국은 ‘이행의무 부과금지’에 합의했는데, 이에 따라 다국적 기업들이 고용 승계나 한국 부품 일정 비율 사용 같은 규제를 피해갈 수 있는 길을 열어줬다. 한편 미국은 수출업체를 지원하는 한국의 관세환급 제도(수출 목적으로 산 원료는 수출될 때 관세를 되돌려주는 것)를 대미 수출품에 한해서는 적용하지 말도록 요구했다. 무역구제 분야 협상 테이블에는 김종훈 수석대표가 직접 참석해 미국의 반덤핑 및 상계관세의 남발을 막을 장치를 요구했으나 미국은 듣기만 하고 외면했다.
1차 협상 결과 농업·개성공단·자동차·의약품 분야는 막판까지 난제로 남을 공산이 커졌다. 김종훈 수석대표는 “처음부터 어렵겠다고 본 쟁점들은 그대로 남아 있다”면서 “우리도 원하는 게 있고 미국도 원하는 게 있으니 양쪽 입장이 구체화하면 서로 주고받을 게 정리될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상당수 분야에서 미국 쪽이 “숨겨진 진짜 장벽”이라고 부르는 규제 및 관행 철폐를 벼르고 있는데, 이는 한국의 국내법과 제도 변화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협상 기간 내내 ‘숨겨진’ 쟁점이 될 전망이다. 한-미 양국은 7월10~14일 서울에서 2차 협상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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