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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력 없으면 패스도 안 와요”

등록 2006-06-14 00:00 수정 2020-05-03 04:24

강해야만 살아남는 프랑스 축구사관학교 FC메스에서 한국 꿈나무들을 만나다…4년 만에 1군까지 올라온 강진욱 선수는 휴가까지 반납하고 연습에 땀 흘리는데

▣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강, 트레 비엥. 비트, 비트!”(진욱이, 매우 좋아. 더 빨리, 빨리!)

강진욱(19·FC메스) 선수가 날린 슛이 상대 골키퍼의 손을 맞고 나오자 프랑스 FC메스 18살팀 감독 프랑수아의 격앙된 목소리가 훈련장을 가득 메웠다. 감독의 고함에 정신을 차린 진욱이가 공을 잡은 상대 선수를 향해 과감히 몸을 날리고, 두 선수는 둔탁한 소리를 내며 파란 잔디 위로 뒤엉켜 쓰러진다. 젊은 육체들이 맞부딪쳐 나오는 열기로 운동장은 실전 같은 긴장감으로 팽팽하게 달아오르는데, “괜찮냐”며 서로의 몸을 일으켜줄 새도 없이 그라운드 좌우를 넘나드는 빠른 패스 로 경기는 다시 혼돈 속으로 빨려들었다.

대한축구협회의 ‘유소년 육성 프로젝트’

5월24일 오후 5시30분, 프랑스 소설가 알퐁스 도데의 의 무대가 된 알자스로렌 지역의 옛 도시 메스를 연고로 한 FC메스의 청소년 기술센터에서 한국 축구의 희망은 조금씩 영글어가고 있었다.

평범한 축구팬들에게 FC메스는 ‘반지의 제왕’ 안정환 선수가 잠시 몸담았던 프랑스 리그의 2류팀 정도로 알려졌을 뿐이지만, 청소년 축구 지도자들에게 이곳은 수년 전부터 한국 축구의 미래를 짊어질 대들보를 양성하는 사관학교로 관심을 모아왔다. 진욱이는 2002년 10월 대한축구협회의 ‘유소년 육성 프로젝트’의 하나로 어경준(18?FC메스 2군), 양동현(19?울?현대) 등 다른 4명의 소년과 함께 이곳 프랑스 땅을 찾았다. 진욱이와 동현이는 아시아 ‘U-17’(만 17살 이하) 대회를 우승하고 2003년 8월 핀란드 라티에서 열린 U-17 세계선수권대회에 참가했던 한국 축구의 미래들이다. 진욱이보다 한 살 어린 경준이는 개인기가 뛰어난 스트라이커로 FC메스 구단의 관심을 받으며 2군 경기에 자주 나서 실력을 가다듬고 있다.

진욱이는 “이곳 축구는 매우 거칠다”며 입을 열었다. “힘들었던 점이요? 일단 말이 안 통하니까 힘들죠. 여기 애들은 실력을 인정하기 전까지는 시합 중에 절대 패스 안 하거든요. 몸싸움도 장난이 아니에요. 한마디로 강해야 살아남아요.” 진욱이는 수비형 미드필더?공격?미드필더??湧?모두 소화할 수 있는 멀티플레이어지만 “김남일, 이호 선배의 자리가 제일 편하다”고 말했다.

2002년부터 4년 남짓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진욱이는 이전보다 더 단단한 선수로 변해 있었다. 진욱이는 아침에 일어나 오후 2시에 수업을 마치고, 밥을 먹고, 3시30분부터 훈련을 시작해 숙소로 돌아와 프랑스어 책과 마주하는 지루하고 반복적인 시간들을 이겨냈다. 시간의 퇴적과 함께 진욱이의 신분은 정규 시합에 출전도 할 수 없었던 연습생에서, FC메스의 17~18살 정식 선수로, 2005년부터는 공식 계약을 맺은 2군 선수가 됐다. 2006년 1월20일 진욱이는 마침내 1군으로 정식 승격돼 올랭피크 마르세유를 상대로 벌인 프랑스 FA컵 32강 원정경기에 선발 출장해 1군 데뷔전을 치렀다. 비록 경기는 2-0으로 졌지만 문전 앞에서 동료의 머리를 향해 올린 결정적인 크로스를 하나 만들어 팀내에서 가장 높은 평점(5.5점)을 받았다. 진욱이는 이어 5월14일 파리 생제르맹을 상대로 벌인 2005~2006 시즌 마지막 경기에 풀타임 출장해 팀이 1-0 승리를 이끄는 데 기여했다. 진욱이는 현재 FC메스로부터 “3년 계약을 맺자”는 제안을 받아둔 상태다.

이곳으로 유학 온 어린 선수들을 지도하기 위해 파견된 대한축구협회 이승희 코치는 “진욱이는 정말 성실한 선수”라고 말했다. “뭔가 하겠다는 의지가 강하죠. 무지 성실합니다. 집에, 요즘 애들이 많이 하는 인터넷도 없어요. 운동량이 많고 체력도 좋죠.” 선수로서 대성하기 위해 꼭 필요한 ‘근성’도 남 못지않은 편이다.

왜 유소년 축구에 투자하는가

지난 3월쯤의 일이다. 두 달 전 1군으로 올라온 진욱이가 연습 경기를 하고 있었다. 진욱이와 거친 몸싸움을 벌이던 토고 국가대표 셰리프 투레 마망이 진욱이의 발목을 향해 거친 태클을 날렸다. 몸을 일으킨 진욱이의 보복이 시작됐다. 투레가 공을 받자 진욱이도 보란 듯이 거친 태클을 걸었다. 흥분해 달려드는 투레의 얼굴을 주먹으로 강하게 내리쳤다. “물론 나중에 제가 먼저 미안하다고 말했죠. 그런데 이곳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거든요.”

현재 FC메스에는 진욱이의 뒤를 잇는 ‘유소년 육성 프로젝트’ 3기생 조영철(16?울?학성고), 설재문(15?용?대성고), 조범석(15?용?신갈고) 등 3명이 굵은 땀방울을 흘리고 있다. 영철이는 발재간이 좋은 재간둥이고, 재문이는 또래보다 슈팅 능력이 좋아 폭발력 있는 축구를 한다. 둘 다 골을 넣는 스트라이커다. 범석이는 미드필더로 보통 한 발만 쓰는 유럽 선수들과 달리 양발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게 특징이다. 재문이와 범석이는 2007년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U-17 세계선수권대회에 출전하는 국가대표로 선발되기도 했다. 훈련장에 나선 아이들은 31번에서 33번까지 나란히 번호가 매겨진 옷을 입고 “매일 이런 잔디 구장에서 연습하니까 좋다”며 웃었다. 재문이는 “숙소 옆 웨이트트레이닝센터가 마음에 든다”고 말했고, 범석이는 “외국 애들과 실력을 겨뤄보니 자신감이 솟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들은 “외국 축구 유학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현지 애들과 빨리 친해지는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현지 아이들과 친해지지 않으면 패스를 많이 받을 수 없고, 그러면 축구가 안 늘어요. 외국 애들에게 말도 먼저 걸고, 장난도 치고 해야 좋죠.” 셋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영철이가 제법 어른스럽게 말한다. 아이들은 프랑스 말에 아직 서툴렀지만, 코치가 지시하는 내용 정도는 이해하는 듯했다. 감독 주변에 모여 훈련 내용에 대한 설명을 들은 아이들은 운동장을 한 바퀴 돌며 몸을 풀 여유도 없이 바로 실전 연습 경기에 투입됐다. 이들은 6월30일로 교육 기간이 끝나 한국으로 돌아가거나, 구단 쪽과 협상을 거쳐 이곳에 남을 예정이다.

프랑스는 히딩크 감독도 인정했듯 세계에서 유소년 육성 시스템이 가장 잘돼 있는 나라로 꼽힌다. 이 가운데서도 FC메스는 낭트?쇼쇼·오셰흐?함께 프랑스 내에서도 유소년 축구가 잘 정비돼 있기로 유명하다. 그 명성만큼 세계 여러 나라에서 인재들이 모여들고 있다. FC메스 15살 팀에서 뛰고 있는 흑인 소년 야닉(15)은 15살 독일 대표로 뽑힌 스트라이커다. 이날 연습 경기에서도 빠른 몸놀림으로 상대방 수비를 괴롭히는 장면을 자주 만들어냈다. 16살 팀의 티보 부르주아(16)도 프랑스 국가대표다. 국제축구연맹(FIFA)의 공식 에이전트로 활동하고 있는 프랑스축구유학원의 김정하(44) 대표는 “티보는 비슷한 나이대에서 유럽에서 가장 주목받는 선수”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수비 선수였지만, 공격으로 포지션을 변경한 뒤 소나기골을 잇달아 터뜨려 코치진들을 기쁘게 만들었다. 이 코치도 “슛이 좋고 몸이 탄탄해 앞으로 프랑스 축구를 이끌어나갈 재목으로 손색이 없다”고 말했다.

이씨는 “FC메스가 유소년 축구에 많은 투자를 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고 말했다. FC메스는 수많은 축구 지망생들 가운데서 옥석을 골라내 선수로 다듬은 뒤 다른 구단에 비싼 값에 팔아먹는 선수 사관학교 같은 곳이다. 우리의 2006년 월드컵 첫 상대인 토고 대표팀의 축구 영웅 아데바요르가 이곳에서 AS모나코를 거쳐 영국의 아스널로 진출했고, 박지성의 동료로 우리에게도 이름이 낯익은 루이 사아(맨체스터 유나이티드)도 이곳 유소년 축구 선수 출신이다. 최근 아스널에서 스페인의 비야르 레알로 이적한 로베르 피레도 이곳을 거쳐 유럽의 빅리그로 진출했다.

“아데바요르는 이곳의 영웅이었다”

진욱이는 “아데바요르는 FC메스의 영웅이었다”고 말했다. “키가 큰데도 기술이 좋았어요. 여기 있으면서 골을 굉장히 많이 넣었죠. 아데바요르가 2부에 있던 FC메스를 1부로 올려놓고 AS모나코로 이적했거든요.” FC메스는 아데바요르를 300만유로에 AS모나코에 팔면서 이면 계약을 맺어 AS모나코가 올해 1월 아데바요르를 아스널에 1천만유로에 재매각할 때 이적료의 30%를 챙겼다. 이 밖에 토고 대표팀의 골키퍼 아가사도 이곳에서 뛰면서 명문팀 입단을 노리고 있다. 진욱이도 이제 실력이 돈으로 평가되는 달콤 살벌한 유럽 축구시장에 이름 한 줄을 올린 셈이다.

“일단은 프랑스 리그에서 최고의 선수로 인정받고 싶어요. 그러려면 파리 생제르맹이나 올랭피크 리옹 같은 팀으로 이적을 해야겠죠. 그 다음에는 모든 축구인들의 꿈인 스페인 리그로 진출해보려고요.” 진욱이는 6월18일까지 1군 선수들에게 주어진 휴가를 반납하고 매일같이 구단 연습장에서 기량을 닦고 있다. 늦으면 3년, 조금 더 빠르다면 1~2년쯤 지나 한국 사람들에게 아직 낯선 이름의 진욱이가 영국과 스페인의 유명 구단으로 이적했다는 소식이 전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때쯤이면 세계 무대에서 검증받은 걸출한 수비형 미드필더가 국가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상대 공격수들을 무력화하는 아름다운 광경을 지켜보며 기쁜 탄성을 지르는 붉은 악마들을 마주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섯살부터 슛, 슛, 슛!

유소년 시스템은 프랑스 축구의 시작… 12살부터는 엘리트 코스

지난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열린 컨페더레이션스컵 대회에서 한국을 5-0으로 꺾은 로저 르메르 감독은 “프랑스 축구의 힘의 원천은 어디냐”는 한국 기자들의 질문에 “체계적으로 짜인 유소년 축구 육성 시스템”이라고 답했다. 물론, 그의 프랑스는 2002년 월드컵에서 캡틴 지단의 부상 악재가 겹치며 예선 탈락하고 말았지만, 프랑스 유소년 축구 육성 시스템이 세계 최고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초등학교 3~4학년 때 학교 축구부에 입단하면서 공을 접하게 되는 우리나라와 달리 프랑스 어린이들은 만 5살 반부터 집 근처 프로구단이 운영하는 유소년 팀에 들어가 축구를 시작한다. 만 11살까지는 그저 즐기는 ‘놀이’ 축구고 12살부터 엘리트 축구로 구분된다. 팀은 나이별로 세분되는데, 재능이 없는 선수는 그 다음 나이대 팀에 선발이 안 되는 방식으로 자동 퇴출된다. 프랑스 축구협회는 나이대마다 아이들이 일주일에 받아야 하는 훈련 시간과 구단이 선수들에게 지급하는 용돈 등을 규정해두고 있다.
그리고 주말마다 프로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실전 경기에 나선다. 프랑스는 전국을 6개 지역으로 나눠 8~9월부터 다음해 5월까지 리그전을 벌인다. 이 대회를 나티오노(Nationaux)라 부른다. 매해 6월, 각 지역 1위 6개 팀과 2위 가운데 성적이 가장 좋은 2팀 등 8팀을 뽑아 연령대별 나티오노 우승팀을 가린다. 지난해 프랑스 15살, 16살 나티오노 우승팀은 FC메스였다.
강진욱 선수의 경우 2002~2003년 첫해에는 FC메스의 16살 팀에 연습생으로 들어가 나티오노 경기에 뛰지 못했지만, 17~18살 때는 선수 등록증을 받아 경기에 참여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해 ‘어른’이 된 강 선수는 2005년 FC메스와 우리나라의 2군 계약이라 부를 수 있는 CFA(Chompiona France Amateur) 계약을 맺었고, 올해 정식 1군 계약을 앞두고 있다. 이승희 대한체육협회 유소년 전임지도자는 “지금까지는 축구선수가 되기 위해 프랑스에서 거쳐야 하는 정통 코스를 밟아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축구협회는 제2의 강진욱을 만들기 위해 올해에도 프랑스 FC메스와 김동현 선수가 뛰고 있는 포르투갈의 FC브라가 등 2곳에 각각 3명씩 6명의 유망주들을 유학 보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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