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어나는 수요와 부족한 공급 속에 미국-이란 충돌하면 최악 시나리오… 조심스레 제3차 석유파동을 예견하며 1·2차 오일쇼크의 역사를 더듬어본다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자, 보십시오. 미국인들이 음료수로 즐겨 마시는 코카콜라 가격을 1배럴(158.9ℓ)로 환산하면 89달러에 이릅니다. 그런데 유한자원인 원유는 배럴당 20달러에도 못 미치고 있어요.”
1973년 10월6일 유대교 최고의 신성한 축제날인 속죄일에 시작된 ‘10월 전쟁’(제4차 중동전쟁)으로 배럴당 3달러 수준에 머물던 국제 유가가 11달러로 치솟은 ‘제1차 석유파동’ 당시 이란의 샤왕은 석유와 코카콜라 값의 비교를 통해 유가는 여전히 낮다는 사실을 강조했다고 <석유황제 야마니>(제프리 로빈슨 지음, 유경찬 옮김)는 전하고 있다.
두 개의 검은 물, 석유와 코카콜라
석유와 코카콜라의 비교가 경제학적 타당성을 띠는지는 모르겠으나, 둘 다 ‘검은 물’이라는 시각적 유사성과 미국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코카콜라의 상징성을 감안할 때 아랍권의 심금은 울렸을 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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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왕은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가 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는, 당시 비산유국들로선 모골이 송연해질 말까지 보탰다고 한다.
1차 석유파동이 진정된 뒤 완만한 흐름을 보이던 국제 유가가 또 한 번 치솟은 건 1979년 ‘이란혁명’으로 촉발된 ‘제2차 석유파동’ 때였다. 팔레비 왕조를 몰아내고 집권한 호메이니 정부가 미국에 대한 석유수출 금지 조처를 내리자 세계 석유시장은 다시 일대 혼란에 빠졌다. 1978년 초 1배럴에 13달러였던 원유값이 1980년 말에 오면 40달러를 웃돌게 된다. 당시 최고 기록은 1980년 11월24일의 42.25달러(두바이유 기준)였다. 이는 2000년대의 급등기 이전까지 최고 기록으로 남아 있었다.
국제 유가는 올 들어 1배럴에 60달러를 훌쩍 넘어섰지만, 이를 2차 석유파동 때보다 높다고 보기는 어렵다. 20년을 훨씬 넘는 동안의 경제 성장과 물가 상승을 감안하지 않은 채 명목치로 단순 비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국석유공사가 경제 성장과 물가 상승을 고려해 올해(4월18일) 기준으로 전환한 실질유가에서 2차 파동 때의 최고가(배럴당 42.25달러)는 89.89달러에 해당하는 것으로 계산됐다. 1차 파동 때의 최고가(10.98달러, 1973년), 걸프전 때의 최고가(37.04달러, 1990년 9월28일)의 실질유가는 각각 39.21달러, 52.17달러로 환산된다. 배럴당 60~70달러인 현재 수준이 아직 2차 파동 때의 가격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1차 파동이나 걸프전 때보다는 높은 셈이다. 그런데도 국제 유가 전망은 여전히 상승 쪽에 무게가 실려 있으며, 심지어 100달러 이상으로 치솟을 수 있다는 얘기도 공공연히 나온다. 이런 관측의 밑바탕에는 최근과 과거 1·2차 파동 때의 유가 흐름에 커다란 차이가 있다는 분석이 깔려 있다.
두 차례에 걸친 예전의 석유 위기 때와 지금의 유가 급등의 차이는 사태 촉발의 원인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고 에너지경제연구원 석유전략연구실의 이달석 실장은 설명한다. “1·2차 오일쇼크는 정치·군사적인 사태로 공급이 중단(또는 감축)된 데 따른 것이었다. 반면, 지금의 고유가는 수요의 급속한 상승과 공급 능력 부족이라는 경제적인 수급 문제에서 비롯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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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실장은 “1990년 걸프전 때도 그랬듯이 정치·군사·지정학적 요인에 따른 폭등은 몇 달 진행되다 안정세를 되찾아가는데, 경제적 수급이라는 구조적 요인에서 비롯된 지금 같은 유가 급등세는 오래 지속된다”고 설명한다. 국제 유가는 2003년 한 해 동안 12~13% 오른 데 이어 2004년 25.9%, 2005년엔 무려 46.4%나 치솟았다. 올해 들어서도 이미 20%가량 올랐다. 올 초 불거진 ‘이란 핵 위기’라는 국제정치적 요인으로 유가가 불안해진 측면도 있지만, 이미 그 이전부터 석유시장은 수급 불안을 겪어온 터였다.
석유 메이저들은 어떻게 주도권을 잃었나
그렇다면 이런 수급 불안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에너지 낭비의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일까, 석유 자원의 유한성을 보여주는 필연적 흐름일까?
국제 석유시장은 1·2차 석유파동의 불안기를 거쳐 1980년대 후반부터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가 2000년대 들어 다시 불안정 국면에 빠지는 과정에서 질적인 구조 변화를 겪었다. 석유시장의 주도권이 생산자(판매자) 중심에서 소비자(구매자) 중심으로 옮아갔다가 다시 생산자 쪽에 힘이 실리는 분위기를 타고 있다. 이같은 석유가격 결정의 ‘권력이동’은 정치·군사적 이슈와 경제적 요인이 뒤섞여 작용하면서 복잡하게 전개돼왔다.
1970년 이전까지 석유시장의 지배자는 메이저(스탠더드 오일 등 서방의 거대 석유자본)들이었다. 주로 미국과 영국에 뿌리를 둔 이들 메이저는 세계 석유산업의 상·하류 부문을 총괄 지배했다. 이 시기의 석유가격은 시장 대신 메이저들의 협의체에서 일방적으로 결정됐고, 석유 가격은 오로지 산유국 정부와 메이저의 수익 분배를 위한 잣대 구실만 했을 뿐이다.
메이저 지배의 석유 질서에 금이 가기 시작한 건 1960년대 후반. 1992년 논픽션 부문에서 퓰리처상을 받은 <황금의 샘>(대니얼 예긴 지음, 김태유 옮김)에서 이 시기를 서술한 대목을 보자. “미국은 베트남 전쟁의 실패로 수년에 걸쳐 돈은 돈대로 들이고, 인기마저 떨어져 진창에 빠진 신세가 됐다. 동시에 세계 곳곳에서 반미주의가 풍미하게 됐고, 이는 제국주의·신식민주의·경제적 착취에 대한 비판과 연계됐다. 또 영국은 경제 불황에 빠져 있었다. 2차 세계대전 뒤 세계 질서를 주도해온 미·영 두 나라의 정치적 힘의 퇴조는 석유질서의 정치적 기반 역시 약해졌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미국과 영국의 정치적 힘을 배경 삼아 석유질서를 주도해온 석유 메이저들이 결정적으로 주도권을 잃게 되는 계기는 1차 석유파동이었다. 한국석유공사 석유정보처의 구자권 해외조사팀장은 “이때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세계 석유시장은 석유수출국기구(OPEC)를 중심으로 한 판매자 중심으로 변했다”고 설명했다. “이 시기 석유 가격은 OPEC가 일방적으로 설정하는 공식 판매가였다. 원유 생산량은 여기에 맞춰 조절됐다.” 1차 석유파동 전까지만 해도 가격 담합 기구였던 OPEC의 구실이 질적으로 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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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EC는 1차 석유파동 이전에도 생산량 조절을 통한 가격 통제를 시도한 적이 있었지만, 메이저들의 기세와 산유국들의 단결 부족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던 터였다. 1차 석유파동을 촉발시킨 4차 중동전쟁은 아랍권을 똘똘 뭉치게 함으로써 석유시장의 주도권을 이동시켰다. <석유황제 야마니>에 기록돼 있는 여러 증언들을 보면, 1차 석유파동 직전 아랍권에선 온건파으로 분류되는 사우디아라비아 쪽의 잇단 요청에도 미국은 이스라엘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계속함으써 사태를 악화했다. 최대 산유국이자 친미 노선을 걸은 사우디아라비아 역시 석유 수출 금지 행렬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는 막다른 골목으로 몰린 것이다. 1차 석유파동 직전 공교롭게도 미국의 닉슨 행정부는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궁지에 몰려 있어 중동 석유시장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는 분석이 여기에 덧붙는다.
미국과 중국, 석유를 빨아들이는 블랙홀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 세계 경제 상황은 OPEC에 한층 힘을 실어줬다. 대부분의 산업국가들이 석유에 바탕을 둔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룸에 따라 석유 수요가 크게 늘어났던 것이다. 자본주의 진영의 석유 수요는 1960년대 하루 약1900만 배럴에서 1차 석유파동 직전 해인 1972년에는 두 배를 웃도는 4400만 배럴로 급증했다.
2차 석유파동 뒤 북해, 러시아 등 OPEC 바깥 지역의 석유 공급이 크게 늘어나는데 1986년 유가 폭락으로 OPEC의 힘은 크게 떨어지지만, 2000년대 들어 다시 시장지배력을 키워가고 있다. 2000년대 ‘고유가 시대’는 1970년대부터 80년대 중반의 ‘OPEC 지배 시대’와 공통점 둘과 뚜렷한 차이점 한 가지를 보이고 있다.
강도의 차이점은 있어도 시장의 주도권이 산유국들 손에 쥐어져 있다는 사실과, 석유 수요가 늘고 있다는 점에선 양쪽 시기가 비슷한 특징을 띤다. OPEC 지배 시대의 연평균 석유 수요는 5.3%, 2000년대엔 2.8%에 이른다. 구매자 중심이었던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저유가 시대의 수요 증가는 연 0.8%에 지나지 않았다.
최근의 고유가 시대를 이끈 수요 증가는 2004년부터 나타난 본격적인 세계 경기 회복세에서 비롯된 바 컸다. 그 중심에는 바로 미국과 중국이 있다. 미국은 경기 회복세를 보였을 뿐 아니라 전통적인 에너지 다소비국이다. 하루 8천만 배럴인 전세계 석유소비량 중 4분의 1인 2천만 배럴 이상이 미국에서 소비된다. 석유 소비 2위국인 중국의 하루 소비량은 670만 배럴에 이르러 두 나라를 합친 소비 비중은 30%를 훨씬 웃돈다. 석유공사 해외조사팀에 따르면, 중국의 경우 2004년 10%의 경제 성장을 이루는 동안 석유 수요는 15% 늘었다. 구자권 팀장은 “통상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의 절반 또는 3분의 2 정도 석유 수요가 늘어나는데, 중국은 거꾸로 돼 있다”고 설명했다. 석유를 흔전만전 써대는 미국과, 에너지 다소비형 성장 가도로 내달리는 중국이 석유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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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 쪽과 달리 공급 측면에서 볼 때 2000년대의 고유가 시대는 1970~80년대 중반의 OPEC 지배 시대와 뚜렷한 차이를 띤다. OPEC 지배 시대에는 석유 생산설비 투자의 증가로 공급 역량이 꾸준히 확충된 반면, 최근의 고유가 시대에 들어선 공급 능력이 극히 제약돼 있다. 에너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2002년 이전 OPEC의 잉여생산 능력은 하루 600만~700만 배럴이었다가 2004년 이후엔 100만 배럴로 뚝 떨어졌다. 전체 공급 역량(하루 3100만 배럴)의 5%를 밑돈다. 1970년대 이 비율이 10~15%에 이르렀던 것과 대조적이다. OPEC의 잉여생산 능력은 석유시장의 공급 능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잣대로, 생산시설을 최대한 가동하면 추가로 공급할 수 있는 석유량을 뜻한다. 지금의 석유 공급이 대단히 불안정한 기반 위에 서 있는 셈이다.
환상을 깨버린 ‘구경제의 복수’
이처럼 공급 기반이 취약해진 요인으로 석유공사는 1980년대 중반 이후의 저유가 추세에서 수익률이 상대적으로 높은 정보기술(IT) 등 ‘신경제’ 산업으로 투자가 집중되면서 전통 산업인 석유 부문에 대한 투자가 부진해진 점을 주요인으로 꼽고 있다. 1980년대 후반 이후 14~15년 동안 10~20달러의 안정 시기를 거치면서 ‘유가는 늘 이렇게 안정적일 것’이라는 환상을 갖게 한 것이다. 구자권 팀장은 이를 ‘구경제의 복수’(revenge of old economy)로 일컫는다고 소개했다.
석유산업에 대한 투자 부진은 환경 문제 탓에 정유설비가 선진국을 중심으로 각 지역에서 거부된 데서 비롯된 바도 컸다. 여기에 2003년의 미국-이라크 전쟁에 따른 유전시설 파괴, 베네수엘라 국영석유회사 파업에 따른 해고 사태 등도 석유 공급 능력을 떨어뜨린 요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환경 규제 강화 추세 등을 감안할 때 공급 능력의 병목 현상은 쉽게 해소되기 어려울 것으로 석유공사는 분석하고 있다.
늘어나는 수요, 부족한 공급 역량에 아랍권을 중심으로 한 산유국들의 ‘자원 민족주의’ 강화 움직임을 감안할 때 고유가 흐름은 쉽게 꺾이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여기에 이란 핵 위기가 군사적 충돌로 전쟁으로 이어지고, 주요 석유 수송로인 호르무즈해협(걸프만과 오만만을 연결하는)이 봉쇄되는 지경에 이르면 3차 석유파동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란 관측으로 이어진다. 이달석 실장은 “미-이란 사이의 긴장 관계가 유지된다는 전제 아래 유가는 하반기에 65달러 안팎, 연평균 60~65달러로 예상하고 있다”면서 “군사적 충돌로 이란의 수출이 중단되는 극단적인 상황에선 110달러까지 오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는 호르무즈해협을 통한 석유 수출이 세계 전체 석유 수출 물량의 35%를 차지하고 있는 현실적 여건에 바탕을 둔 관측이다. 세계 석유 수출에서 이란의 비중은 사우디아라비아(17%)에 이어 2위인 6%에 이르고, 중동권 전체의 수출 비중은 38%(2003년 기준)에 이른다.
두 차례에 걸친 예전의 석유파동이 한국 경제에 끼친 영향은 각각 달랐다. 1차 파동 때는 다른 나라에 견줘 큰 영향을 받지 않아 1974년과 1975년 각각 8.0%, 7.1%의 성장을 이뤘다. 반면, 2차 석유파동 초기인 1979년 6.4%였던 성장률이 이듬해엔 마이너스 5.7%로 뒷걸음질쳤다. 이는 국내 정치적인 요인에서 비롯된 바도 없지 않지만, 1차 석유파동 뒤 경제 체질 개선이 이뤄지지 않았고 중화학공업 중심으로 산업구조가 바뀐 탓에 석유 위기의 파장을 고스란히 받았기 때문이다. 1980년대 후반 이후 저유가 시대를 거치는 동안 우리 경제의 체질은 얼마나 개선됐을까? 석유시장의 불안정에 대한 준비는 제대로 갖춰져 있는 것일까?
석유시장 불안정, 준비는 돼 있는가
회사 앞 구멍가게 ‘씽씽슈퍼’에선 1.5ℓ짜리 페트병의 코카콜라가 1300원에 팔리고 있다. 이를 1배럴(158.9ℓ)로 환산하면 20만6570원, 220.8달러(5월11일 원·달러 환율=935.6원 기준)로 계산된다. 두바이유 기준 국제 원유가의 3배를 웃도는 수준이다. 코카콜라가 비싼 것일까, 석유가 아직도 싼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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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가 국제유가의 잣대로 삼고 있는 두바이유는 중동의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을 구성하는 7개 토호국 가운데 하나인 두바이에서 생산되는 원유다. 영국 북해산 브렌트유, 미국의 서부텍사스유(WTI)와 함께 세계 3대 유종으로 꼽힌다. 중동 지역을 대표하는 기준 유종이기 때문에 흔히 중동산 두바이유로 불린다.
3대 유종이 국제 원유시장의 기준으로 자리잡은 이유는 생산량이 많고, 특정 생산자가 생산을 독점하지 않아 가격이 투명하게 형성되기 때문이다. 두바이유는 유황 함량이 많고 질이 떨어져 통상 브렌트유보다 3달러, 서부텍사스유보다 5달러 안팎 낮게 책정된다.
미국의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거래되는 텍사스유나 영국 런던의 국제석유거래소(IPE)에서 거래되는 브렌트유가 주로 선물거래로 이루어지는 것과 달리 두바이유는 중동권과 싱가포르에서 현물로 거래된다. 사우디아라비아·쿠웨이트 등 중동 국가의 원유 가격 역시 두바이유의 가격에 따라 움직인다.
두바이유 현물가격은 한국 시각으로 보통 오후 6시께 결정되기 때문에 각각 새벽 2시30분과 4시30분께 결정되는 브렌트유와 텍사스유에 견줘 하루 늦게 시장에 반영된다. 우리나라는 원유 수입의 70~80%를 중동 지역에 의존하고 있어 두바이유의 가격은 국내 경제에 큰 영향을 끼친다.
원유는 미국석유협회(API)가 정한 기준에 따라 비중 33도 이상이면 경질유(輕質油), 30~33도까지는 중질유(中質油), 30도 미만은 중질유(重質油)로 나뉜다. 두바이유는 비중 31도의 경질유, 브렌트유는 38도로 경질유다. 비중 40도의 초경질유 WTI는 중질유(中質油)도, 중질유(重質油)도 아니지만, 국내 언론에선 흔히 ‘서부텍사스산중질유’로 일컫는다. 화학 용어로 ‘중간 생성물’을 뜻하는 WTI의 ‘I’(Intermediate)를 잘못 번역한 것이라고 한국석유공사는 설명한다. 이는 그동안 몇 차례 지적됐음에도 오래 쓰이며 굳어져 잘 고쳐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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