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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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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기초과학의 기를 살리자

등록 2006-04-19 00:00 수정 2020-05-02 04:24

과학자들을 앵벌이로 만드는 현실에 환멸 느끼는 연구실 현장… 9조원에 이르는 대규모 연구개발사업의 ‘로또식’지원도 위험하다

▣ 대전=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과학기술부가 10년 대계(사업 착수일로부터 10년 이내 시제품 생산)로 운영하는 ‘21세기 프런티어 연구개발 사업’(아래 프런티어 사업)에는 ‘골드러시’의 꿈이 담겨 있다. 오는 2010년대 초반까지 기초 원천기술의 선진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22개 사업단에 100억원씩 연간 2200억원(기업부담률 14.6%)을 지원하고 있다. 이 프런티어 사업은 경영능력을 겸비한 전문가를 ‘사업단장’으로 선정해 ‘책임경영’을 요구하고 있다. 당연히 공학이나 기술적 응용이 가능한 ‘사업’이 아니라면 명함을 내밀 기회조차 봉쇄됐다. 이렇게 대형 국가 연구사업에 ‘로또식 지원’이 이뤄지면서 대다수 연구자의 자리는 갈수록 좁아질 수밖에 없다.

유전체연구실에 흐르는 절망

지난 4월11일 점심 시간에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유전체연구단의 작은 회의실에서는 기초과학에 대한 열띤 토론이 있었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은 유전체 연구자인 박홍석 유전체연구단장과 최도일 식물유전체연구센터 센터장, 허철구 책임연구원 등이었다.

‘인간 11번째 염색체 해독’ ‘침팬지 Y염색체 해독’ 등의 연구결과로 최근 3년 동안 <네이처>와 <사이언스> <셀> 등 이른바 NSC에 논문을 게재한 박 단장은 ‘세계 3대 저널이 주목한 한국인 과학자’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그만큼 탁월한 연구업적을 쌓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박 단장에게도 기초과학 연구자의 설움은 예외가 아니다.

“국내 유전체 연구의 80%를 우리 실험실에서 하고 있다. 어떤 유전체를 응용해야 할 것인지를 찾는 것이다. 우리 연구는 산업화로 직접 연결되지는 않기에 민간기업의 참여는 어려움이 따르지만 창의적인 바이오 산업 아이템을 창출하는 데 폭발적인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대규모 인프라를 구축하고 국가 전략사업으로 육성하려고 해마다 수천억원의 연구비를 지원하고 있다.” 박 단장은 일본 이화학연구소 선임연구원으로 있다 지난 2000년 9월 정부출연 연구기관으로 오자마자 ‘한국 유전체 연구센터’ 설립을 제안했다. 하지만 박 단장의 제안은 “유전체 정보가 산업화로 직결되지 않는다”는 한마디에 제대로 평가조차 받지 못했다.

올해 국내의 바이오 관련 연구비 규모는 7천억원으로 6년 전에 견줘 2배 이상 늘었다. 하지만 연구비 혜택을 받는 기초연구 집단의 수는 줄어든 것으로 파악된다. 이 대목에서 목소리가 높아진 허 연구원은 “앞으로 반도체를 대체할 산업으로 생명공학을 육성하고자 한다면 ‘바이오 고속도로’ 건설 의지를 확고히 하는 차원에서 ‘한국 유전체 연구센터’ 건립을 서둘러야 한다”면서 “국방정책에서 자주국방이 기본이듯 바이오에서 자체 대량의 데이터 생산 없이는 생명공학의 진정한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장밋빛 미래로 포장됐던 배아 줄기세포 연구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바로 지금 조급한 경제 성과주의의 위험한 도박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일부에선 “유전자 은행이 있는데 굳이 대규모 유전체 연구센터가 필요하냐”고 되묻기도 한다. 실제로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인간유전체연구실의 인간유전자은행은 지난 3월 문을 열어 국내 발굴 인간유전자와 미국 국립암연구소(NCI) 등지에서 들어온 인간전장·실험동물 유전자 등 11만여 종을 무상으로 보급한다. 하지만 현재 전세계에서 유전체 정보가 만들어지고 있는 생물만 해도 2천 종이 넘는다. 여기에서 한국이 생산하는 비중은 전체의 0.5%에 지나지 않는다. 얼마나 외국의 생물정보에 의존하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최 실장은 “언제까지 유전체 연구 후진국 신세여야 하냐”면서 이렇게 반문한다. “한국 고유의 유용생물을 이용한 연구도 매우 열악하다. 외국 연구소가 연간 수천억원씩 투자해 얻은 유용한 정보를 공짜로 주겠는가.”

피할 수 없는 연구비 수주 경쟁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는 데 국가적 유전체 연구 허브는 필수적이다. 현재 국내에서 유전체 염기서열을 분석하는 데 쓰이는 장비는 가격이 3억5천만원 수준인 ‘ABI 3730XL’로 정부 지원 연구기관의 7대를 비롯해 모두 21대가 있다. 그런데 미국 연방 에너지부가 설립한 대표적 국가 유전체 연구센터인 ‘조인트 게놈 연구소’(JGI) 등지에서는 ABI 3730XL보다 50배나 빠른 분석 장비를 쓰고 있다. 만일 국내 유전체 연구 지원의 허브가 있다면 기존 장비보다 2배 비싸더라도 50배의 효과를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미국과 유럽이 주도하는 유전체 연구에서 ‘아시아 연합’을 모색하더라도 국내 연구자들은 참여할 길이 마땅치 않다.

어쩌면 이들에게 바이오 산업의 허브 구실을 할 한국 유전체 연구센터는 발등의 불이 아닌지도 모른다. 당장 연구실 운영 비용을 충당하려면 발품을 팔아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 1996년부터 시행된 ‘연구과제중심 운영제도’(PBS·Project Base System)는 과학자를 ‘앵벌이’로 만들었다. PBS가 연구책임자를 과제 수주에 급급하게 만들고 연구원을 비정규직으로 내몰았기 때문이다. 한국생명공학연구원의 경우 PBS 도입 초기인 1996년 정부출연금 대비 인건비 비율이 18%에서 지난해 38%로 높아졌지만 연구비 수주 경쟁을 피할 수는 없다. 박 단장도 유전체 연구센터에 속한 연구원 20여 명의 인건비를 충당하려면 동시에 대여섯 개의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

이런 현실에도 정부의 대규모 연구개발(R&D) 사업 기조는 크게 바뀌지 않고 있다. 특정 연구책임자로 인해 막대한 정부 예산을 투입한 연구가 뿌리째 흔들릴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음에도 창의적 기초과학 연구자들의 기가 살아날 조짐을 보이지 않는다. 박 단장은 정부 R&D 예산을 정보기술 위주로 당장의 산업적 효과만을 꾀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야말로 근시안적이라고 믿는다. “미생물이나 식물 등의 유전체 연구는 곧바로 산업화를 이룰 수 있다. 은행잎 추출물로 만든 혈액순환 촉진제 ‘징코민’도 기초과학에서 나왔다. 산업화의 요행수를 바랄 게 아니라 미래를 위한 주춧돌을 차곡차곡 쌓아야 한다.”

그동안 정부의 대형 R&D 사업은 실용화를 전제로 이뤄졌다. 하지만 산업화로 이어지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의 대형 R&D 사업 성과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막대한 예산을 투입한 위성개발 사업도 상용화로 인한 가치 창출에는 미흡한 것으로 나타났다. 예컨대 다목적 실용위성(아리랑) 1호 개발사업은 기반기술 확보에는 성과를 올렸지만 관련 기업의 사업성을 확대하는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애당초 경제적 파급 효과를 제대로 검증하지 못하고 낙관적 기대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터진 황우석 사태는 R&D 사업에 대한 평가의 강도를 높이는 주요 계기로 작용했다.

올해 국가 R&D 사업 예산은 9조원에 이른다. 문제는 사상 최대의 R&D 예산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시스템이 부실하다는 것이다. 예컨대 차세대 성장동력 사업의 경우 2003년 시행 뒤 중간 점검과 평가가 거의 이뤄지지 않았고 부처 간 정책 조율 없이 사업이 추진되다 보니 중복 투자도 적지 않다는 지적이다. 국가 R&D 사업을 통합적으로 평가·관리하는 시스템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부실한 시스템이 황우석 사태의 원인이라는 데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다. 과학기술부 조사평가과 백일섭 사무관은 “사업단의 실적을 면밀히 파악할 수 있는 표준성과 지표를 적용해 평가를 이룰 것이다. 각 부처별로 연구수행 여부를 평가하는 잣대도 이전보다 강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특단의 조처는 기초과학에서 찾아야

최근 대규모 연구사업의 책임연구자들은 여러 가지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국가 R&D 사업에 대한 사업평가나 연구수행 평가 등에 객관성이나 공정성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요구하는 자료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문제는 과학논문인용색인(SCI) 게재 논문 수를 따져서 연구 집단을 선정하던 관행이 평가 단계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데 있다. 한 프런티어 사업에 참여하는 연구원은 “연구수행 평가 때 관련 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데 그다지 변별력이 없다”고 말했다. “연구 분야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관련 학술지에 논문을 제출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몇 차례의 수정 과정을 거치면 대부분 수록된다.”

그렇다면 기초과학은 대규모 연구사업의 예외여야만 할까. 적어도 합리적 선택과 집중이라는 명제에서 한 걸음 물러서지 않는다면 박홍석 단장이 소원하는 ‘한국 유전체 연구센터’ 같은 기초과학의 산실이 자리잡기 어렵다. 국가 산업 경쟁력 확보를 위한 기초과학의 결실을 얻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기에 경제적 효율성이 낮다는 지적을 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대규모 연구사업이 한계에 봉착한다면 특단의 조처를 기초과학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한국 유전체 연구센터도 창의적 연구가 가능한 소재와 정보를 제공해 위력을 발휘할 것이라는 게 박 단장의 판단이다. 과학기술 정책은 작은 시냇물이 흐르는 정책이 아니라 도도히 흐르는 큰 강물과 같이 긴 안목에서 정책을 펼쳐야 할 것이다.

한겨레 저널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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