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darkblue">‘에리코 교도소’ 습격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새 정부 왕따작전
아라파트 체제 무력화시킨 과거처럼 정치적 자살을 유인하는가 </font>
▣ 정인환 기자/ 한겨레 국제부 inhwan@hani.co.kr
충분히 예견돼온 일이었다. 지난 1월 말 팔레스타인 총선에서 하마스(이슬람 저항운동단체)가 압승을 거둔 순간부터 이런 일이 곧 터질 것으로 예상하는 이들이 많았다. 다만 그 시기가 언제일지가 관심거리였을 뿐이다.
3월14일 이스라엘이 ‘파옥’을 감행했다. 팔레스타인 땅 예리코 교도소에 수감된 아메드 사다트 등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PFLP) 관계자 5명의 신병을 확보한다는 구실이었다.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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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소 습격사태가 벌어진 뒤 팔레스타인의 모든 정파가 예외 없이 강경자세로 돌아섰다. 곳곳에서 분노한 시민들이 폭력시위에 나서고, 무장세력들은 외국인을 납치하기 시작했다. 테러범을 잡겠다고 나선 이스라엘군과 팔레스타인 무장세력 간의 총격전으로 사상자가 속출하는 사이 비난의 화살은 새 정부 구성에 힘을 쏟고 있는 하마스로 향하고 있다.
오슬로 협정 강요, 압력의 서막
‘중동 민주화’를 부르짖어온 미국과 유럽연합 등은 아랍 각국의 권위주의 정권과 함께 하마스의 집권에 당혹해했다. 팔레스타인 주민 45%가 하마스를 지지했지만, 그들의 ‘자기 결정권’엔 애초부터 관심이 없었다. 이스라엘의 봉쇄로 만신창이가 된 팔레스타인 경제를 그나마 지탱시켜온 ‘원조’를 중단하겠다는 위협이 이어졌다. 3가지 전제조건을 내걸었다. ‘폭력을 거부하라. 이스라엘을 인정하라. 오슬로협정이 기초한 중동평화 협상을 지지하라.’ 하마스에 대한 전방위 압력의 서막이었다.
이들 전제조건은 ‘정치적 자살’을 요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스라엘의 점령 아래에 있는 팔레스타인인들의 무장저항은 국제법이 보장하는 ‘저항권’의 하나로 포기할 수 없다. 이스라엘을 인정하는 것은 하마스라는 일개 정치조직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 모든 팔레스타인인이 결정해야 한다. 오슬로협정 체제는 이미 이스라엘에 의해 무너졌다.” 하마스의 반응은 단호했다.
이어 차기 총리로 지명된 이스마일 하니야를 중심으로 내각 구성과 집권 이후의 청사진 마련에 나섰다. 거국연정 구성협상은 난항을 계속했지만, 지난 3월12일엔 차기 ‘하마스 정부’의 정국 구상을 구체적으로 밝혔다. 점령에 저항하는 권리를 명시하되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고 했고, 독립국가 건설을 위해선 이스라엘과 휴전을 할 수도 있다고 했다. 기존 평화협정은 팔레스타인인들의 최소한의 요구도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지만, 이스라엘과 평화협상의 가능성을 분명히 열어뒀다. 이런 상황에서 예리코 사건이 터졌다.
팔레스타인과 협상을 거부하고 오슬로협정 체제를 무시해온 아리엘 샤론 총리가 집권을 앞두고 있을 땐 어느 누구도 ‘전제조건’을 내걸지 않았다. 지독한 이중 잣대다. 무엇을 위한 것일까? 카이로대 하산 나파 교수(정치학)는 최근 이집트 권위지인 주간 <알아람>에 보낸 기고문에서 “그들이 원하는 건 협상이 시작되기도 전 하마스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 해법의 내용과 형식에서 상당한 전략적 양보를 하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의 분석을 더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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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등에 업은 이스라엘은 하마스를 고립시키려 할 것이다. 평화협상 실패와 굶주림과 폭력 등 향후 팔레스타인인들이 겪게 될 고통의 책임을 하마스에 떠넘기려 들 것이다. 책임 전가에 성공한다면 이스라엘은 현 정책을 실행에 옮기는 데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게 된다. 지금 이스라엘은 새로운 ‘현상’(status quo)을 만들어내려 하고 있다.”
이스라엘 카디미당 지지율은 성큼 뛰어
이스라엘은 야세르 아라파트 체제를 무력화했고, 1967년 중동전쟁 이전의 영토를 가진 팔레스타인 주권국가 수립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평화협상 실패의 책임은 아라파트에 떠넘겼다. 하마스 집권의 정치적 배경이다. 그렇다고 팔레스타인인들은 하마스에 백지수표를 내준 건 아니다. 저항을 이어갈 것을 촉구한 것이다. 여기에는 그에 따른 희생도 감수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하마스도 이를 잘 알고 있다.
하마스 집권 직후인 지난 1월29일 아비 디츠터 전 이스라엘 보안국장은 영국 <옵저버>와의 인터뷰에서 “하마스가 이스라엘인들을 살해하고 싶은 욕망 하나로 만들어진 단체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무장 저항단체에서 시작한 하마스는 부패한 자치정부가 방치한 빈민구제 사업을 통해 민심을 얻었다. 그리고 이제 집권을 앞둔 하마스는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건설의 꿈을 이루기 위한 수권정당으로서 새로운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중동 평화를 위해 이를 지원할 것인지, 막고 나설 것인지 국제사회는 신중히 결정해야 한다.
불도저를 동원해 교도소의 벽을 허물고 속옷 차림의 팔레스타인 수감자의 항복을 받아내는 활극 속에 에후드 올메르트 총리 권한대행이 이끄는 이스라엘 카디마당 지지율은 성큼 뛰었다. 이스라엘 <육군라디오>가 파옥 사태 이후 처음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카디마당은 당장 선거가 실시된다면 이스라엘 의회 120석 가운데 43석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1주일 전 조사에 비해 5석 늘어난 것이다. 응답자의 61%는 예리코 파옥 사태가 국가안보 관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고 평가했다고 일간 <하레츠>는 보도했다. 하마스 ‘왕따 작전’의 부수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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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태영과 인민전선, 그리고 사다트</font>
<한국방송> 용태영 기자를 팔레스타인 땅 가자지구에서 24시간 납치·억류한 단체는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PFLP·이하 인민전선)이다. 인민전선은 팔레스타인해방민주전선(DFLP·이하 민주전선)과 함께 팔레스타인 양대 좌파세력으로 꼽힌다.
조지 하바시가 1953년 창설한 아랍민족주의자운동(ANM)을 모태로 1967년 창립된 인민전선은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기반한 정파로 파타에 이어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이하 해방기구)에서 두 번째로 큰 정파로 꼽힌다. 인민전선에서 1969년 분화한 민주전선은 마오주의 성향을 가진 단체다. 파타와 인민전선에 이어 해방기구에서 세 번째로 큰 정파로 뽑히는 민주전선은 오슬로협정을 거부했지만, 2000년 7월 캠프 데이비드 협상에 대표단을 파견했다.
두 단체 모두 정치조직으로 2004년 11월 야세르 아라파트가 숨진 뒤 실시된 대선에서 좌파 연합후보를 내기 위한 협상을 벌이기도 했다. 당시 협상은 난항 끝에 결렬됐다. 인민전선은 무소속 무스타파 바그구티를 밀어 19.48%의 지지를 얻었고, 민주전선은 타이시르 칼리드를 독자 후보로 내 3.35%를 득표했다. 또 지난 1월 총선에서 인민전선은 4.2%의 득표율을 올리며 132석 가운데 3석을 확보했고, 민주전선은 2.8%의 지지율로 2석을 얻었다.
예리코 교도소 ‘파옥사태’를 불러온 레하밤 제에비 이스라엘 관광장관 암살사건은 2001년 10월21일 제2차 인티파다(알아크사 항쟁) 초기에 인민전선에 딸린 무장세력 ‘아부 알리 무스타파 여단’이 벌였다. 인민전선의 제에비 장관 암살은 이스라엘의 ‘표적 살해’에 대한 보복이었다. 하바시에 이어 인민전선을 이끌게 된 아부 알리 무스타파가 2001년 8월27일 이스라엘군의 헬리콥터 공격으로 살해됐다. 파옥사태의 초점인 아메드 사다트는 무스타파에 이어 인민전선 사무총장에 오른 인물이다.
제에비 장관 암살 뒤 이스라엘은 사다트가 은신해 있던 요르단강 서안 라말라의 자치정부 수반 집무실을 봉쇄하고 그를 넘길 것을 요구했다. 대치가 길어지면서 미국과 영국이 ‘라말라 협정’을 통해 사다트를 팔레스타인 교도소에 수감하기로 했다. 미·영은 이스라엘의 요구에 따라 팔레스타인 쪽이 그를 풀어주지 못하도록 감시단까지 파견했다. 이들 감시단은 3월14일 이스라엘의 파옥사건이 벌어지기 직전 현장에서 몸을 피했다.
사다트가 제에비 장관 암살에 연루됐다는 증거는 이제껏 나오지 않았다. 팔레스타인 고등법원은 이미 지난 2002년 6월3일 그의 석방을 결정했지만, ‘이스라엘의 공공연한 암살 위협’을 이유로 자치정부는 그를 석방시키지 않았다. 사다트는 지난 1월 총선에서 인민전선 후보로 옥중 출마해 자치의회 의원에 당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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