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쪽 집필에 모두 참여한 학자가 말하는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논란
언론이 조장한 극단적 대결구도는 역사에 대한 실증적 이해를 오도한다
▣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1979년 10·26 직전에 출간된 <해방전후사의 인식>(이하 <해전사>)의 역사관을 문제 삼은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이하 <재인식>)이 2006년 2월 간행돼 화제다. <해전사> 마지막 권이 출간된 것은 1989년인데, 그로부터 16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한국 현대사 학계도 많은 연구업적을 생산해냈다. <재인식>은 이러한 연구성과를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다.
일제시대 탐구는 <재인식>의 성과
<재인식>의 편집위원들이 <해전사>와 단절을 꾀하려는 것이 흥미 있다. 식민지 시대에 대한 인식이 전체의 2분의 1(전체 2권 가운데 1권)에 달할 정도로 일제시대에 천착하고 있는 <재인식>은 식민 시기와 해방 뒤를 ‘단절’이 아닌 ‘연속’선상에서 파악하고 있다. “역사에 단절은 없다”는 명제에 필자는 동의한다. 수정주의자로서 우리 학계의 한국전쟁 연구에 큰 영향을 준 브루스 커밍스도 <한국전쟁의 기원>(전체 2권·1981~90)에서 해방 뒤 혁명적 상황을 해방 전 적색농민조합의 존재와 연결시켰다. 1980년대 대학가를 풍미한 <해전사>에 직·간접적 영향을 받았을 <재인식>의 필자들이 어떻게 <해전사>와 단절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재인식>이 일제시대에 많은 분량을 할애한 것은 해방전후사를 새롭게 인식하는 데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해전사>는 1권을 제외하고는 해방 뒤를 주로 천착하고 있으므로 명실상부한 해방전후사가 아니라 ‘해방후사의 인식’(전체 논문 58편 가운데 8편)에 그친 감이 있다. <재인식>은 193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를 다루어 그 지평을 넓혔다. <해전사>의 연구 범위가 해방 8년사에 치중된 것에 대한 문제제기일 수 있다. 책 제목을 <한국 현대사의 재인식>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당할지 모르겠지만, 편집자들이 책 제목을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이라고 붙인 것은 <해전사>의 영향력과 위상을 의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과연 <해전사>의 영향력이 그렇게 심대했을까? 한 권의 책이 과연 세상을 386이 주도하게끔 바꾸었을까? 우선 386들이 대학 다닐 때 <해전사>를 필독서로 여겼을 가능성은 높다. 그렇지만 그들의 역사관이 꼭 <해전사>의 영향으로 형성됐다고 판단한다면 그것도 너무 단선론적이고 결정론적인 역사인식이다. <재인식>의 편집자들이 일원론적 결정론에 맞서 다층적·다원론적인 역사 해석을 한다고 하면서 말이다. 필자를 포함한 <재인식>의 필진들은 <해전사>의 다층적 역사 해석을 좌파 편향이라고 단정하기보다 좀더 겸허히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해전사> 시리즈 가운데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1권에 대해 필자는 <해전사> 4권 513쪽에서 “좌파적 이념이 아닌 민족주의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한국 현대사 연구에서 좌파적 편향이 있었다면 그것은 1981년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이 출간되고, 커밍스와 콜코 부부 등 수정주의자들의 업적이 번역된 1982년 <한국 현대사의 재조명>과 1983년 <분단전후의 현대사> 이후에나 가능했다. 1985년부터 간행된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2권(1985), 3권(1987), 4~6권(1989)에는 민중운동과 혁명에 대한 서술이 많이 나오므로 좌파 편향으로 간주될 여지는 있다. 그렇지만 모든 글이 그렇지는 않으며, 특히 2~4권에는 당시의 연구업적과 자료 공개에 기반해 실증을 꾀한 글들이 적지 않다.
<재인식> 편집위원이 주장하는 것처럼 <해전사>가 ‘민족’과 ‘혁명’ 두 개의 코드로 집필됐다고 단정하는 것은 <재인식>을 ‘뉴라이트의 이념서’로 간주하는 것과 같이 무리일 수 있다. <재인식> 필진에 뉴라이트나 교과서 포럼에 참여한 학자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서너 분만 빼고는 정치적 해석을 경계하는 순수하게 학문적인 글을 쓴 것으로 안다. 대다수 필자들은 학문적 글을 통해 해방전후사, 한국 현대사의 수준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고 싶어서 원고 사용을 허락했을 것이며, 그런 점을 <재인식> 출간의 의의로 두어야 마땅할 것 같다.
이승만은 차선에 불과했다
1980년대의 진보적 저작들이 통일지향적이며 민중지향적이었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당시엔 민족과 통일에 가치를 두는 흐름이 대세였다. 탈냉전기인 지금의 시각에서는 그런 움직임들이 어색해 보일 수 있다. 그렇지만 세계화한 상황에서도 여전히 민족국가는 중요할 수 있으며, 통일은 우리 민족의 지상 과제로 머물러 있다.
일제시대 민중과 여성의 일상생활을 조망한 <재인식>의 글들은 언젠가는 짚고 넘어가야 할 과제임은 분명하므로 시의적절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유종호 교수가 <나의 해방전후>(2004)에서 일제시대 당시 일본 헌병을 보지 못하고 자랐으며 드라마에서 그려지는 일본 순사의 탄압이 사실이 아니라고 해서 일본이 통치하는 한국이 ‘사람 살 만한 낙원’은 아니었을 것이다. 단지 우리가 일제 통치의 간악성을 과장한 면은 있지만 일부 선각자들이 끝까지 타협하지 않았던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마땅함과 동시에 일부 지도자와 지식인들이 일제에 협력한 것에 면죄부를 줄 수는 없을 것이다. 조선어학회가 일제의 도움을 받았던 사실 때문에 환산 이윤재 선생과 한징 선생 등 함흥 형무소에서 순국하신 분들이 욕될 수는 없다. 일제시대도 사람 사는 세상일 수밖에 없었겠지만 한반도에서 못 살고 만주로 이주해버린 사람들이나 강제 징용당한 사람들의 이산에 의한 디아스포라를 결코 경시할 수는 없다. 친일-반일의 양분법은 문제가 있지만 과거를 청산하려는 사람들이 생활하기 위해 일제에 협조한 것을 단죄할 수는 없을 것이며 생계형 친일까지 들춰내어 반일 정신을 드높이고자 함도 아닐 것이다. 단지 사료를 수집해 진실을 규명한 토대에서 친일파가 득세했던 상황을 반성해 소모적 논쟁을 접고 국민통합을 기하고자 함일 것이다.
소련과 스탈린이 분단과 전쟁을 획책했다 해서 미국의 38선 획정을 면책할 수는 없으며, 김일성의 개전 책임을 간과할 수도 없다. 북한이 당시 지주 등 300만 명을 내몰고 일제 잔재를 쉽게 청산했다 해서 대한민국이 친일 청산을 완벽하게 하지 못했음을 합리화할 수는 없다. 물론 당시 공산주의자와 대치하려면 국민통합이 필요했으며 친일파에게도 사면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을 이해할 순 있다. 그러나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이나 반민특위의 와해 등은 <재인식> 편집위원인 김일영 교수도 인정하듯이 어디까지나 차선에 불과했다. 차선이 선택된 상황에서 최선책에 대한 갈구를 단순히 이상주의이며 비현실적인 구상으로 치부하는 것은 현실에 너무 영합하는 것은 아닐까?
‘과거사 정국’은 통과의례
현재 386이 ‘대한민국에서 정의가 득세하지 못했다’고 평가한다고 해서 대한민국을 실패한 역사라고 규정한다고 해석하는 것은 확대해석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현재의 ‘과거사 정국’을 너무 정치적으로 해석하기보다는 하나의 통과의례로 받아들이는 여유가 필요할 것이다.
이승만은 우리나라를 세운 ‘국부’임이 분명하다. 또한 그의 건국 노선과 박정희의 부국 노선이 오늘날 우리가 있게 한 기반을 제공했다는 것을 부인할 순 없다. 그러나 그들의 과거와 권위주의적 통치 양태를 냉정하게 평가하는 일은 결코 그들이 이룩한 성공신화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므로 그런 우려는 지나친 기우이거나 조바심일 가능성이 높다. 과거의 역사를 돌아보고 반성하는 것은 비판적 사회과학자나 역사학자의 본령이다. 현재 언론기관에서 조성한 극단적 대결 구도는 양쪽 진영 모두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제 논의의 장에 나와서 같이 토론하면서 학문적 발전을 통한 진정한 재인식과 업그레이드를 기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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