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편집장 6명이 뽑은 ‘결정적 장면’… 그 순간이 내겐 혁명이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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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로 도입한 DPT 시스템, 무모한 열정으로 성공 이끌어
▣ 고영재 94.1~95.3 재임
무릇 새 생명의 탄생에는 호된 진통이 따르는 법인가. <한겨레21> 창간호는 참담한 몰골이었다. 창간호 사진들은 진흙탕 속에서 짓이겨진 듯 시커멓게 찌들어 있었다. 독자들은 경악했다. 흥분한 독자들은 분노를 쏟아냈다. 그 분노에는 기대를 저버린 데 대한 배반감이 물씬 젖어 있었다.
▣ 고영재 94.1~95.3 재임
무릇 새 생명의 탄생에는 호된 진통이 따르는 법인가. <한겨레21> 창간호는 참담한 몰골이었다. 창간호 사진들은 진흙탕 속에서 짓이겨진 듯 시커멓게 찌들어 있었다. 독자들은 경악했다. 흥분한 독자들은 분노를 쏟아냈다. 그 분노에는 기대를 저버린 데 대한 배반감이 물씬 젖어 있었다.
‘막말’ 속에 애정을 담은 한 독자의 질타는 지금도 귓전에 선하다. 그러나 여기에는 차마 옮기지 못한다.
창간호를 떠올리면 전율이 느껴진다. 역시 지나친 욕심은 사고를 부르는 법인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사고였는지 모른다. <한겨레21> 창간팀은 준비된 것 없이 닻을 올렸다. 자본도, 능력도, 시장 지배력도 없었다. 시사주간지 경험자는 팀에 단 한 사람도 없을 정도였다. 시간도 우리 편이 아니었다. 예고된 일정과의 싸움에서 몇 주째 밀리고 있었다. 그해 초에 밝힌 독자와의 3월 창간 약속은 가슴을 짓눌러왔다. 그렇다고 무릎을 꿇을 수는 없었다. ‘전혀 다른’ <한겨레21> 만들기를 포기할 수 없었다.
무모한 도전이었다. 그러나 그 겁 모르는 도전정신이 새로운 시도를 채찍질했다. <한겨레21>은 탁상출판(DTP) 시스템을 국내 최초로 도입한 대중매체였다. 지금은 이미 상식이 됐지만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일이었다. 그 ‘진흙탕’ 사고도 충분한 실험과 검증을 거치지 않은 겁 없는 도전의 산물이었던 셈이다.
<한겨레21>의 열정과 실험정신은 시장에 잇단 충격을 던졌다. <한겨레21>이 채택한 대형 판형도 당시엔 파격이었지만 오늘은 시사주간지의 표준이 됐다. 초야에 묻혀 있던 삽화가를 공모해 전문 영역을 개척하는 효과를 거두기도 했다. 편집장의 편지 ‘만리재에서’도 의례적인 칼럼을 넘어 독자들과 교감하는 마당이 됐다.
<한겨레21>의 도전이 어찌 겉모양 다듬기에 그쳤겠는가. 파격과 발상의 전환을 통해 가보지 않은 길을 마다 않는 데 <한겨레21>의 최대 강점이 있었다. 그 밑바탕에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믿음과 시대의 위선에 맞서는 옹골찬 정신이 깔려 있었다. 디지털 시대의 빛은 물론 그림자에도 시선을 던지는 대중매체로도 기록될 만했다.
개척자의 매력은 신선함에 있다. 순백의 도화지를 색칠하는 고독한 예술가의 열정은 언제나 아름답다. 정보밀림 시대의 길잡이를 자임한 <한겨레21>의 소명은 아직 살아 있다. ‘언론재벌 신문’이나 ‘재벌언론 신문’도, 거대한 공룡으로 성장한 방송도 독자·시청자의 기대를 따르지 못하는 터다.
창간 당시의 ‘무모한 열정’은 두고두고 <한겨레21>의 앞길을 이끌어줄 에너지원이 되리라고 믿는다. 이는 독자들의 기대와 사랑에 보답하는 유일한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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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을 앞둔 혼란의 1997년, 경제에 경고음을 발사하다
▣ 곽병찬 97.3~96.6 재임
1997년은 연초부터 소란스러웠다. 한보사태를 시작으로 옛 여권이 붕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쌍용·진로 등 중견 재벌들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경제는 요동치고 있었다. 주가는 곤두박질치고, 경제위기설은 계속 터져나왔다.
▣ 곽병찬 97.3~96.6 재임
1997년은 연초부터 소란스러웠다. 한보사태를 시작으로 옛 여권이 붕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쌍용·진로 등 중견 재벌들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경제는 요동치고 있었다. 주가는 곤두박질치고, 경제위기설은 계속 터져나왔다.
게다가 1997년은 대통령 선거가 있던 해였다. 해방 뒤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았던 여야 간 수평적 정권교체의 가능성이 가장 높게 점쳐지던 선거였다. 경제에선 파국적인 경고음이 잇따르고, 정치 분야에선 수평적 정권교체의 가능성에 고무돼 있는 등 한류와 난류가 희한하게 겹쳐 있는 시기였다.
문제는 경제였다. 선거는 각자 희망하는 바가 있겠지만, 희망과 기사는 달라야 했다. 반면 경제는 국민 전체의 문제였고, 주관적인 기준과 시각에 따라 선택과 분석이 가능한 영역이었다. 그 저류엔 기자와 편집자의 희망이 흐르는 게 오히려 당연했다.
1996년 김영삼 정권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강행했다. 기업과 학계, 금융 쪽에선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지만, 김영삼 정권의 집착은 컸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 등 가입 조건을 맞추기 위해 환율을 1달러당 800원대로 묶었다. 원화 가치가 높다 보니 수출은 줄고 수입은 늘었다. 노태우 정부 때부터 계속된 경상수지 적자 구조는 더욱 심화됐다. 환율 절하 요인이 커지는데도 환율은 묶여 있고, 우리 기업의 대외 경쟁력이 급속히 떨어졌다.
수출 의존도가 높은 기업들이 골병 들고, 어음부도율과 중소기업 부도율이 역대 기록을 깨기 시작했다. 기업이 무너지니, 금융기관의 부실도 급속히 증가했다. 제2금융권에선 무자비하게 여신을 회수했고, 제1금융권에선 신규대출을 꺼리기 시작했다. 기업 부도는 걷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정부는 금융기관의 입을 막았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경제 파탄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론은 갈팡질팡했다. 대통령 선거라는 특수한 상황은 언론의 판단을 흐렸다. 특히 조선·중앙·동아 등 ‘반김대중’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던 언론들은 곤두박질치는 경제의 실상을 전하려 하지 않았다. 그저 재경부 발표에 의존했다. 경제위기를 전하는 목소리에 대해선 ‘대통령 선거를 위해 국민경제를 희생시킨다’고 비난했다. 학계도 모호했다.
<한겨레21>의 고민은 컸다. 경제팀을 맡고 있던 곽정수 기자의 고민은 더 컸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든 경고음을 내는 게 언론의 사명. 4월 초, “한국경제 새 판 짜자”라는 제언 아래 재벌에 수혈보다는 수술을 강조하는 진단 기사를 내보냈다. 재벌을 구조조정해야 할 때 강제로 지원하다 보니 금융부실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던 상황이었다. 6월엔 1996년 12월보다 꼭 두 배나 증가한 1금융 부실채권을 중심으로 금융위기를 진단했다.
10월 말 들어서는 금융 위기가 구체화되고 있는데도, 어떤 언론도 이를 제대로 전하지 않았다. 대부분 여권에 부담이 될 만한 기사는 애써 외면했던 게 당시의 상황이었다. 국민경제는 여권의 승리를 위해 희생되고 있던 터였다.
이런 상황에서 <한겨레21>은 10월 말 “강경식 경제팀 부도”라는 타이틀 아래 특집기사를, 다음주엔 “환란, 금융기관 대폭발 온다”, 다음주엔 “천문학적 금융부실, 50조원” 등의 특집을 잇따라 냈다. DJ를 위해 홀딱 벗고 뛴다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그러나 선거가 끝나고 바로 김영삼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에 경제주권을 내주고 항복 선언을 했다. 기업과 금융기관은 무더기로 도산하고, 실업자는 쏟아져나왔다.
아쉬움도 많다. 어쨌든 구제금융 사태를 막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생 시사주간지 <한겨레21>의 영향력도 문제였지만, 당시 편집진을 이끌던 자의 역량 부족 탓이 컷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자부심과 낭패감이 엇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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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분쟁과 이주노동자 특종을 만든 정문태·김재오씨와의 만남
▣ 오귀환 95.3~97.3 재임
역사는 사람이 만든다. 1994년 여름 해외 취재를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방콕에서 잠시 그를 만났다. 정문태, 분쟁 지역을 소리 없이 누비고 다녔을 그는 그러나 막상 꽃미남형에 대단히 수줍어하는 사내였다.
▣ 오귀환 95.3~97.3 재임
역사는 사람이 만든다. 1994년 여름 해외 취재를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방콕에서 잠시 그를 만났다. 정문태, 분쟁 지역을 소리 없이 누비고 다녔을 그는 그러나 막상 꽃미남형에 대단히 수줍어하는 사내였다.
세상 미디어의 정규군이 오랫동안 버려온 인간의 땅을 혼자 누벼온 그는 나에게 말문을 열고 그 땅, 그 인간들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무대로 킬링필드 이전에 벌어졌던 대규모 폭탄 투하에 의한 미국판 킬링필드 이야기’ ‘에티오피아의 한국전 참전부대 탁유부대원 노인들의 이야기’ ‘동남아 일대에서 한국 여권이 3천달러에 팔리는 돈벌이 범죄 대상이 돼 있다는 이야기’…. 하나하나 세상에 알릴 만한 특종감이 줄줄이 터져나왔다. 그 모든 이야기는 곧 <한겨레21>의 차별성 있고 품격 높은 국제뉴스면을 장식하게 된다. 바로 천하에 둘도 없는 ‘국제분쟁 전문기자’를 사실상 한국에서 처음으로 보유하게 된 것이다.
또 하나의 주인공은 김재오씨. 작은 키에 안경 너머 빛나면서도 선한 눈을 가진 그는 그러나 절대로 굴복하지 않는 ‘투사’다. 처음 날 찾아오자마자 그는 한국과 한국인이 외면하거나 눈감아온 양심의 문제를 들이밀기 시작했다.
“한국에 비싼 커미션을 주고 온 외국인 노동자들이 산재를 입어 손과 발이 잘린 뒤 보상 한 푼 없이 쫓겨나가고 있다.” 그는 문화방송의 <!느낌표>가 외국인 노동자 문제를 대대적으로 다루기 10여 년 전에 이미 외국인 산재노동자의 문제를 온몸으로 껴안고 있었다. 다시 그는 옌볜 조선족 동포들의 산재와 한국인에게 당한 사기 피해 문제를 들고 찾아와 내 양심을 흔들었다. 그는 마침내 북녘 동포의 기아 문제까지도 처음 세상에 본격적으로 알리는 기회를 내게 안겨줬다. 이 모든 이야기는 하나같이 세상을 뒤흔들 만한 것들이었다. 오랫동안 그와 만나면서 나는 문득 그가 ‘살아 있는 성인’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겨레21>의 ‘매거진 혁명’은 그런 분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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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엽제전우회 난입 사건, 안에선 협상하고 밖에선 난리치고
▣ 김종구 98.6~2001.3 재임
지난 2000년 6월 말, 베트남 참전 고엽제전우회 회원들이 한겨레신문사에 처들어올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경찰은 안절부절했다.
▣ 김종구 98.6~2001.3 재임
지난 2000년 6월 말, 베트남 참전 고엽제전우회 회원들이 한겨레신문사에 처들어올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경찰은 안절부절했다.
“절대로 흥분하시면 안 됩니다. 그들이 어떻게 나오더라도 그냥 참으세요.” 그때만 해도 경찰의 이런 걱정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동안 기자 생활을 하면서 나름대로 험한 꼴을 적지 않게 겪어왔다는 자만심이 작동한 탓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큰 착각이었음을 깨닫는 데는 별로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6월27일 오후, 한겨레신문사 5층 회의실에서는 ‘담판 협상’이 시작됐다. 신문사 건물은 이미 고엽제전우회원 2천여 명에게 완전히 포위된 상태였다. 군복 차림으로 들이닥친 협상 대표들은 거의 ‘점령군’ 수준이었다. 그들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막상 접해보니 ‘상상 이상’이었다. 이들의 입에서는 ‘기상천외한’ 험한 말들이 쏟아져나왔다.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래도 시간이 흐르면서 대화가 조금씩 진척되기 시작했다. 어렵사리 최종 협상 문안도 마련됐다. 하지만 협상에 골몰하느라 우리나 고엽제전우회 쪽 협상 대표들 모두 바깥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동안 신문사 건물은 곳곳이 박살이 나고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협상 문안 결재를 받기 위해 사장실에 들어가니 회사 고위 간부들이 모두 침통한 표정으로 모여 있었다. 이미 협상문이고 뭐고 간에 물건너간 상황이었다. 그때서야 전우회 쪽 협상 대표들도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슬그머니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일부는 “바깥의 지휘부가 통제를 제대로 못해 일을 망쳤다”고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회사가 추정한 피해 규모는 거의 1억원 수준. 그렇다고 경제적·사회적 약자인 베트남 참전군인들에게서 배상을 받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오히려 그쪽에서는 경찰이 형사처벌 대상자로 지목한 책임자들에 대해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탄원서를 내달라고 간청하는 형편이었다. 몇 차례의 만남 끝에 시위 재발 방지 약속을 받아낸 대신 손해배상은 포기하기로 했다. 탄원서도 선선히 써주었다. 최학래 당시 사장은 “피해 복구는 전적으로 <한겨레21>에서 책임지라. 베트남에 병원을 짓기 위해 모금한 돈(당시 9천만원 남짓)이라도 내놓든가”라고 말하기도 했다. 물론 농담이었지만 속이 편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쨌든 <한겨레21>이 사태 발생의 원인을 제공한 셈이니 말이다. 당시에 갖가지 재산상의 피해를 입은 한겨레 식구들에게는 지금도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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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감 직전 여중생 죽음 알리며 월드컵에 취한 우리를 반성하다
▣ 정영무 2001.3~2003.2 재임
온 나라가 월드컵으로 환호하던 2002년 초여름 경기도 양주에서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6월13일 아침 동네 앞 길을 걷던 두 여중생이 미군 궤도차량에 깔려 숨진 것이다.
그날은 마침 지방선거일이라 사건은 너무도 간략히 보도됐다. 미군은 공무 중에 일어난 사고라며 현장을 통제하고 일방적으로 자체 조사를 벌였다. 두 소녀는 이틀 뒤인 6월15일 학교에서 장례를 치르고 한 줌의 재가 됐다.
17일 마감을 하던 중에 신문 지역면 귀퉁이에 실려 있는 이 기사가 눈에 밟혔다. 이미 제작된 <한겨레21>의 ‘표지이야기’는 새천년민주당에 조종을 울리는 기사였다. 표지를 확 바꿔버릴까 싶었지만 그러기엔 시한이 너무 촉박했다. 솔직히 우리 자신도 월드컵 열기에 취해 정신이 좀 오락가락했다고 고백해야겠다. 마감 직전에 채워넣는 ‘만리재에서’에 이 사건을 한 줄 담았다.
사고 경위를 전하고, “미군이 없었다면 이들은 떠나지 않았을 것이요, 미군이 안전에 주의했다면 그 자리는 없었을 것이요, 사고에 대한 처벌만 엄정히 했더라도 비극은 되풀이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썼다. 그리고 “두 소녀의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월드컵 16강 진출과 바꿔 되돌릴 수 있다면 기꺼이 바꾸겠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되어 16강 진출에 기뻐한 이상으로, 하나되어 두 영혼을 애도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다음날 우리는 두 넋이 헛되지 않도록 하자는 데 뜻을 모았다. <한겨레21> 사회팀의 안영춘, 김소희, 손원제, 정인환 기자는 현장을 재검증하고, 사건 처리 과정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한-미 간의 불평등 문제를 지속적으로 이슈화했다. 그해 송년호는 두 소녀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사건은 파장이 점점 커져 세대를 뛰어넘는 촛불시위를 낳았다. 한-미 관계에 큰 변화를 가져오고 그해 말 대통령 선거에도 영향을 미쳤다. 물론 많은 과제가 남아 있으며 우리가 제 몫을 다했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밀알 구실은 한 듯하다. <한겨레21>에만 있는 뜨거운 가슴이 하나로 모아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 정영무 2001.3~2003.2 재임
온 나라가 월드컵으로 환호하던 2002년 초여름 경기도 양주에서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6월13일 아침 동네 앞 길을 걷던 두 여중생이 미군 궤도차량에 깔려 숨진 것이다.
그날은 마침 지방선거일이라 사건은 너무도 간략히 보도됐다. 미군은 공무 중에 일어난 사고라며 현장을 통제하고 일방적으로 자체 조사를 벌였다. 두 소녀는 이틀 뒤인 6월15일 학교에서 장례를 치르고 한 줌의 재가 됐다.
17일 마감을 하던 중에 신문 지역면 귀퉁이에 실려 있는 이 기사가 눈에 밟혔다. 이미 제작된 <한겨레21>의 ‘표지이야기’는 새천년민주당에 조종을 울리는 기사였다. 표지를 확 바꿔버릴까 싶었지만 그러기엔 시한이 너무 촉박했다. 솔직히 우리 자신도 월드컵 열기에 취해 정신이 좀 오락가락했다고 고백해야겠다. 마감 직전에 채워넣는 ‘만리재에서’에 이 사건을 한 줄 담았다.
사고 경위를 전하고, “미군이 없었다면 이들은 떠나지 않았을 것이요, 미군이 안전에 주의했다면 그 자리는 없었을 것이요, 사고에 대한 처벌만 엄정히 했더라도 비극은 되풀이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썼다. 그리고 “두 소녀의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월드컵 16강 진출과 바꿔 되돌릴 수 있다면 기꺼이 바꾸겠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되어 16강 진출에 기뻐한 이상으로, 하나되어 두 영혼을 애도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다음날 우리는 두 넋이 헛되지 않도록 하자는 데 뜻을 모았다. <한겨레21> 사회팀의 안영춘, 김소희, 손원제, 정인환 기자는 현장을 재검증하고, 사건 처리 과정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한-미 간의 불평등 문제를 지속적으로 이슈화했다. 그해 송년호는 두 소녀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사건은 파장이 점점 커져 세대를 뛰어넘는 촛불시위를 낳았다. 한-미 관계에 큰 변화를 가져오고 그해 말 대통령 선거에도 영향을 미쳤다. 물론 많은 과제가 남아 있으며 우리가 제 몫을 다했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밀알 구실은 한 듯하다. <한겨레21>에만 있는 뜨거운 가슴이 하나로 모아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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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달간의 ‘작업’끝에 성사시킨 주·월간지 최초 단독 인터뷰
▣ 배경록 2003. 3~ 2005. 3 재임
<한겨레21>과 노무현 대통령의 단독 인터뷰는 노 대통령 취임 한 돌을 맞는 2004년 2월28일 이뤄졌다. 입만 열면 기사가 되고, 여러 형식의 기자회견과 인터뷰를 수시로 하는 대통령과의 인터뷰가 뭐 그리 특별할 것도 없어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현직 대통령이 시사 주·월간지와 단독 인터뷰를 하기는 <한겨레21>이 처음이었다는 점에서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18년간 장기 집권한 박정희 전 대통령도, 군사쿠데타의 명분 축적에 혈안이 되었던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도, 오랜 정치활동으로 언론을 잘 안다는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도 재임 시절 시사 주·월간지와는 단독 인터뷰를 하지 않았다니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시사 주·월간지가 여론시장에서 푸대접을 받고 있는 현실을 씁쓸해하면서.
당시의 인터뷰는 노 대통령 취임 한 돌이라는 계기 외에 <한겨레21>이 창간 10돌을 맞았다는 점도 한몫했다. 그러나 이제야 털어놓는 얘기지만 노 대통령과의 인터뷰는 이미 3년여 전부터 준비되고 있었다. 1999년 추석 특집호 표지기사로 실린 ‘차세대 지도자 선호도 여론조사’에서 부산시장 출마 뒤 백의종군하던 노무현 전 의원이 1위에 오른 것이다. 당시 노 전 의원은 소감을 묻는 <한겨레21> 편집진에게 “혹시 대통령 자리에 오르게 되면 <한겨레21>과 첫 인터뷰를 하겠다”는 얘기를 건넸고(설마 내가 대통령이 되랴 싶어 농담처럼 한 얘기로 추정된다), 잊혀졌던 그 얘기는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한겨레21> 편집진의 입길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얘기를 전해들은 편집장 입장에서 노 대통령이 약속을 지키는 사람인지 시험해보고 싶은 오기 같은 것이 발동했다. 취임 한 돌과 창간 10돌을 인터뷰 요청의 명분으로 내걸면서 이면에서는 그날의 발언을 전하며 청와대 참모들과 노 대통령 측근 인사들을 설득했다. 두 달여의 집요한 작업(?) 끝에 인터뷰는 성사됐다. 하지만 과연 노 대통령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인터뷰에 응했는지는 지금도 확인할 길이 없어 아쉽다.
△2004년2월28일 청와대에서 이뤄진 노무현 대통령인터뷰. 대통령 인터뷰는 주.월감지를 통틀어 최초였다
알려진 대로 노 대통령이 워낙 달변이라 준비한 많은 질문들을 미처 던지지 못한 일, 휴무인 토요일에 인터뷰가 잡히는 바람에 직원들을 출근시키지 않기 위해 이례적으로 관저에서 인터뷰를 하게 된 점, 인터뷰를 마친 뒤 한겨레신문사의 고희범 사장과 신연숙 미디어사업본부장도 초청해 함께 점심식사를 하며 편안한 대화를 나눴던 일 등이 기억에 남는다. 또한 인터뷰 뒤 “대북송금 정당성 인정해야 한다” “열린우리당 중단 없이 지지한다” 등의 노 대통령 발언이 여러 신문·방송에 보도되며 이슈화된 점도 뿌듯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어렵사리 이뤄진 현직 대통령과의 인터뷰였지만, 앞으로는 <한겨레21>이 원하면 미국, 중국, 러시아 등 세계 어느 나라 정상들과도 인터뷰를 할 수 있는 세계적인 유력 매체로 거듭나기를 기대해본다.
▣ 배경록 2003. 3~ 2005. 3 재임
<한겨레21>과 노무현 대통령의 단독 인터뷰는 노 대통령 취임 한 돌을 맞는 2004년 2월28일 이뤄졌다. 입만 열면 기사가 되고, 여러 형식의 기자회견과 인터뷰를 수시로 하는 대통령과의 인터뷰가 뭐 그리 특별할 것도 없어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현직 대통령이 시사 주·월간지와 단독 인터뷰를 하기는 <한겨레21>이 처음이었다는 점에서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18년간 장기 집권한 박정희 전 대통령도, 군사쿠데타의 명분 축적에 혈안이 되었던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도, 오랜 정치활동으로 언론을 잘 안다는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도 재임 시절 시사 주·월간지와는 단독 인터뷰를 하지 않았다니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시사 주·월간지가 여론시장에서 푸대접을 받고 있는 현실을 씁쓸해하면서.
당시의 인터뷰는 노 대통령 취임 한 돌이라는 계기 외에 <한겨레21>이 창간 10돌을 맞았다는 점도 한몫했다. 그러나 이제야 털어놓는 얘기지만 노 대통령과의 인터뷰는 이미 3년여 전부터 준비되고 있었다. 1999년 추석 특집호 표지기사로 실린 ‘차세대 지도자 선호도 여론조사’에서 부산시장 출마 뒤 백의종군하던 노무현 전 의원이 1위에 오른 것이다. 당시 노 전 의원은 소감을 묻는 <한겨레21> 편집진에게 “혹시 대통령 자리에 오르게 되면 <한겨레21>과 첫 인터뷰를 하겠다”는 얘기를 건넸고(설마 내가 대통령이 되랴 싶어 농담처럼 한 얘기로 추정된다), 잊혀졌던 그 얘기는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한겨레21> 편집진의 입길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얘기를 전해들은 편집장 입장에서 노 대통령이 약속을 지키는 사람인지 시험해보고 싶은 오기 같은 것이 발동했다. 취임 한 돌과 창간 10돌을 인터뷰 요청의 명분으로 내걸면서 이면에서는 그날의 발언을 전하며 청와대 참모들과 노 대통령 측근 인사들을 설득했다. 두 달여의 집요한 작업(?) 끝에 인터뷰는 성사됐다. 하지만 과연 노 대통령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인터뷰에 응했는지는 지금도 확인할 길이 없어 아쉽다.
△2004년2월28일 청와대에서 이뤄진 노무현 대통령인터뷰. 대통령 인터뷰는 주.월감지를 통틀어 최초였다
알려진 대로 노 대통령이 워낙 달변이라 준비한 많은 질문들을 미처 던지지 못한 일, 휴무인 토요일에 인터뷰가 잡히는 바람에 직원들을 출근시키지 않기 위해 이례적으로 관저에서 인터뷰를 하게 된 점, 인터뷰를 마친 뒤 한겨레신문사의 고희범 사장과 신연숙 미디어사업본부장도 초청해 함께 점심식사를 하며 편안한 대화를 나눴던 일 등이 기억에 남는다. 또한 인터뷰 뒤 “대북송금 정당성 인정해야 한다” “열린우리당 중단 없이 지지한다” 등의 노 대통령 발언이 여러 신문·방송에 보도되며 이슈화된 점도 뿌듯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어렵사리 이뤄진 현직 대통령과의 인터뷰였지만, 앞으로는 <한겨레21>이 원하면 미국, 중국, 러시아 등 세계 어느 나라 정상들과도 인터뷰를 할 수 있는 세계적인 유력 매체로 거듭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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