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액 절도’에도 솜털같은 형량 받고 유유히 걸어다니는 기업주들
죄의식 없는 비자금 조성과 분식회계에 법원은 왜 그렇게 관대한가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우리 사회에서 빈부격차와 더불어 또 하나의 양극화는 ‘법적 처벌의 양극화’다. 쉽게 말해 ‘유전무죄 무전유죄’다. 이용훈 대법원장이 최근 두산그룹 박용호·박용성·박용만 총수 일가 비자금 사건에 대한 집행유예 판결을 강도 높게 비판한 뒤 ‘기업범죄’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이 다시 여론의 재판대에 올랐다. 대형 기업범죄 사건이 터질 때마다 각종 특별법을 제정해 형량을 높이고 있지만,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의 말처럼 “법 앞의 평등은 만인이 아니라 ‘만 명’에게만 해당”되는 관행은 여전하다. 생활고에 시달려 빈집에 들어가 2천만원을 훔친 힘없는 절도범은 징역형(실형)을 살고, 회삿돈 200억∼300억원을 빼돌린 ‘거액 절도범’은 다들 집행유예로 풀려나고 있다.
‘장부 수사’ 막노동했던 수사관도 허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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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기업범죄에 적용되는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범죄액 5억원 이상)은 일반 범죄에 비해 더 무겁게 ‘가중’ 처벌하라고 만든 법이다. 그런데 정작 이 죄를 지은 경제사범들이 무거운 처벌을 받는 경우는 드물다. 2004년 1심 법원에 이 죄목으로 기소된 1483명 중 실형을 받은 사람은 707명밖에 되지 않았다. 집행유예로 풀려난 사람이 581명, 벌금 등 재산형을 선고받은 사람은 37명이었다(상자기사 참조).
기업범죄에 대한 법원의 가벼운 처벌을 놓고 일반 국민들 못지않게 검찰·경찰 수사관들도 울분을 터뜨리고 있다. “죽도록 고생해서 잡았는데, 나중에 집행유예로 풀려나 태연히 걸어다니는 모습을 보면 허탈하다”는 것이다. 서울지방경찰청의 한 수사관은 “예전에는 ‘비장’(비자금 장부)만 찾으면 됐는데, 이제는 기업들도 머리가 좋아져 비자금 장부를 거의 다 없애버렸다. 재건축 비리와 관련해 건설업체 장부 수십 개를 들여다봤는데 돈 빼내는(비자금 조성) 방법이 모두 달라서 범죄 단서를 잡는 데 정말 애먹었다. 돈이 권력인지, 수십억원을 횡령한 기업인이 집행유예로 풀려나는 것을 보면 한숨만 나온다”고 말했다.
사실 기업범죄는 사건이 복잡하고 전문적인데다 매우 지능적이라서 일반 형사범죄에 비해 수사가 매우 어렵다. 회계부정 사건은 자료를 분석하는 데만 수개월이 걸린다. IBM에 대한 반독점 소송의 경우 관련 기록이 무려 5천만 쪽에 달하고 종결되기까지 거의 10년이 걸렸다. 서울지방경찰청의 한 수사관은 “기업범죄 수사는 막노동이다. 장부를 뒤지고 엄청난 양의 서류 작업이 필요하다. 진득하게 앉아서 눈 빠지게 죽어라고 서류를 들여다봐야 한다. 법원 판결에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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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기업범죄의 미온적 처벌 관행은 근본적으로 법원의 보수적인 판결 탓이지만, 기업범죄는 일반 형사사건에 비해 여러모로 다른 점이 많다. 무엇보다 기업범죄는 일상적인 업무 활동에서 발생하는 터라 대체로 일반 형사범에 비해 죄의식이 희박하다. 이윤 추구 과정에서 기업의 신뢰도 하락을 막거나 원활한 자금차입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분식회계를 했다고 합리화하는 것인데, 이는 “기업의 이익을 위한 것일뿐 사적 이익을 위해 범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다”는 선처 요구로 이어진다. 비자금도 ‘기업 이익’을 위한 뇌물 로비에 쓰려고 불가피하게 만들었을 뿐이라고 주장하고, 범죄가 들통난 뒤에는 “피해를 돈으로 회복시키겠다”는 정상 참작 조건이 제시된다.
기업범죄는 적발하기도 어렵지만, 범죄를 확인하더라도 형량 결정에 중요한 요인인 ‘범죄 고의성’를 입증하는 건 더욱 힘들다. 비리 기업주들은 한결같이 “고의적으로 범죄를 계획한 게 아니라 이윤 추구 과정에서 어찌어찌하다 보니 범죄 행위가 발생했다”며 “기업주가 구속되고 회사가 망하면 수많은 종업원이 길거리에 나앉게 된다”고 위협하기도 한다. 기업이 권력과 전문성을 이용해 조직적으로 범죄를 은폐할 뿐 아니라 온갖 논리를 동원해 정당화하기도 한다. “종업원들의 일자리 안정과 주주에 대한 적당한 배당을 위해서는 회사가 돈을 벌어야 하고, 그러다 보니 범법 행위까지 저지르게 됐을 뿐 고의적으로 비리를 저지른 것은 아니다”거나 “내가 가진 재산이 얼마인데, 도주할 까닭이 있겠느냐”고 주장한다.
고의성 입증이 어렵다 보니 이런 주장은 실제로 받아들여져, 법원이 관용을 베푸는 명분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동안 수많은 기업주의 비리가 드러났음에도 분식회계는 “죄가 아니라 관행”이라는 생각이 여전히 퍼져 있는 건 이런 ‘관용적인 판결’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서울 마포경찰서의 한 수사관은 “기업체 수사를 하다 보면 세금 포탈은 하나도 죄가 안 되다고 생각하는 분위기가 있다. 관행화돼 있기 때문이다. 다른 기업들도 그렇게 하고 있고, 솔직히 그렇게 해야 돈을 번다고 말하는 기업주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조직범죄, 웬만해선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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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범죄는 주로 ‘폭력성’을 띠지 않는데다 직접적인 피해자가 적다는 이유로 일반 형사범보다 관대하게 처벌되는 경향도 있다. 사실 기업범죄의 경우 피해자는 광범위하고 또 분산된다. 기업이 세금을 포탈했을 때 피해자는 국민이라고 할 수 있는데, 국민의 납세액이 증가되기 때문이다. 가격담합의 경우에는 수많은 사람한테 피해가 분산돼 자신이 제품 가격을 부당하게 더 많이 지불했다는 사실을 쉽게 인식하기 어렵다. 서울중앙지검 수사·조사과에 오랫동안 근무했던 한 사무관은 “기업범죄는 피해가 광범위한데도 직접적인 피해가 적다는 이유로 전통적인 형사범죄보다 관대하게 처벌되고 있다”며 “아무리 무거운 벌금형을 부과해도 기업이 그 비용을 다른 쪽에 전가하면 그만이다”라고 말했다.
기업범죄는 죄를 저지른 ‘사람’에게는 자유형(실형·집행유예)이나 벌금형을, ‘법인’ 자체에 대해서는 벌금형을 가하는 양벌 규정을 두고 있다. 그런데 재산형(벌금·과징금)은 기업범죄를 다스리는 혹독한 처벌이 될 수 있을까? 사실 금전적 처벌은 기업이 ‘사업에 필요한 비용’으로 간주해 회삿돈으로 처리해버리면 그만이다. 또 주주의 이익배당을 줄이거나 종업원들의 임금을 삭감하거나 제품 가격을 인상하는 방법으로 그 비용을 떠넘겨버릴 수도 있다. 이처럼 벌금형은 아무리 액수가 크더라도 별다른 부담이 되지 못한다. 특히 벌금을 안 내고 버티는 사람은 지명수배나 노역장 유치에 처할 수 있지만, 법인이 안 내면 또 다른 재산형을 부과하는 것 외에 별다른 방법이 없다.
기업범죄는 ‘조직범죄’와 유사한 특징을 갖는다. 하지만 기업의 이윤추구 과정에서 저질러진 범죄일 경우 책임을 해당 ‘기업’에 물을 것인지, 경영자에게 물을 것인지 확정하기 어려운 문제도 발생한다. 특히 재벌기업에서는 더욱 모호해지기 십상이다. 검찰의 기업범죄담당 수사관은 “기업범죄는 대부분 어떤 식으로든 오너와 관련돼 있다”며 “범죄가 경영자에 의해 저질러진다 해도 기업 활동의 일환으로 나타나는 게 대부분이라서 과연 형사책임을 누구에게 부담지울 것인지가 명확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재벌기업을 보면 총수 일가에 의사결정 권한이 집중되는 지배구조에서 기업 재산을 오너 일가 앞으로 빼돌리는 비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기업 총수가 실질적인 의사결정권자임에도 ‘대표이사 등 책임을 부담할 법적 지위에 있지 않다’는 이유로 처벌 대상에서 빠지곤 한다. 지난 20년간 한 번도 개정된 적이 없는 상법의 특별배임죄는 범죄 행위 주체를 ‘실질적으로’ 회사를 대표하고 포괄적으로 대리하고 있는지가 아니라, ‘적법한 절차에 따라’ 그 직위를 획득하고 있는지 여부에 따라 판단한다. 총수가 구조조정본부나 기획조정실의 도움을 받아 지배주주로서 실질적인 지배권을 행사하더라도 등기부에 이사로 등재되지 않으면 회사법상 전혀 책임을 지지 않게 된다.
기업범죄는 임원을 비롯해 기업 내 구성원들이 ‘조직적’으로 범죄에 가담하는 형태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웬만해서는 범죄가 드러나지 않고 기업의 내부 사정이 바깥에 공개되는 것도 아니다. 기업 내부에서도 부서 간 칸막이가 심화되고 있고, 문제가 터지면 발설을 막기 위해 해고 위협 같은 압력이 끊임없이 가해진다. 따라서 범죄 단서를 잡거나 입증하려면 ‘내부고발자’가 꼭 필요하다. 그래서 수사기관도 주로 ‘비공식적인 정보원’을 활용하고 있다. 경찰의 한 수사관은 “내부고발자는 범죄에 가담했다가 나중에 물먹고 팽당하는 등 원한이 생겨 고발하는 사례가 대부분이다. 일이 잘못돼 원수 사이가 되지 않는 한 절대로 범죄를 불지 않는다”며 “기업 내부에서 범죄를 진술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우리 수사관들의 노하우고, 끊임없이 머리싸움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특정범죄신고자 등 보호법’과 ‘부패방지법’에 특정 강력범죄와 공직자 부패를 내부 고발하는 사람은 면책할 수 있도록 하고 있지만, 기업범죄 내부고발자에 대한 면책이나 해당 기업의 보복행위 금지를 규정하고 있는 조항은 없다.
기업범죄 전담팀 구성한 미 연방 법무부
갈수록 다양해지고 늘어나는 기업범죄에 대응하려면 기업범죄 전문 수사기구를 창설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미국은 2001년 사상 최대의 회계부정 사건인 ‘엔론 사태’가 발생하자 연방 법무부 최초로 기업범죄 전담팀(Corporate Fraud Task Force)을 구성하고, 기업범죄 처벌을 강화하는 사베인-옥슬리(Sarbanes-Oxley)법을 제정했다. 영국에도 법무총장 산하 독립관청으로 중요경제범죄수사청(SFO)이 설치돼 있다. 서울지방경찰청은 최근 수사관 직무교육 프로그램에 회계장부, 조세, 민사법을 새로 포함시켰다. 그러나 법원의 솜방망이 처벌 관행이 사라지지 않는 한 수사관들은 여전히 죽도록 고생만 하고 나중에 허탈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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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엔론 사태, 내부 고발로 간신히 해결 |
기업범죄에서 내부고발자가 왜 필요한지는 대규모 회계부정 사건이 터졌던 미국 엔론사와 월드컴 사례에서 볼 수 있다. 2001년 세계 최대 에너지 기업인 미국 엔론사는 이중장부 작성을 통해 4년간 15억달러 상당의 분식회계를 해온 사실이 드러나 결국 파산하고 말았다. 엔론 사태 당시 이 회사의 재무담당이사 파스토우는 징역 160년형을 구형받았다. 그러나 엔론사 최고경영자 제프리 스킬링의 혐의는 밝혀내지 못해 수사는 답보 상태를 면치 못했다. 그러자 검찰은 파스토우에게 160년형을 10년으로 감경해줄 테니 대신 제프 스킬링과 기업 총수 케네스 레이의 범죄 공모 사실을 증언해달라고 요구했고, 파스토우는 이에 동의했다. 마침내 2년여의 수사 끝에 검찰은 다른 두 사람도 기소할 수 있었다.
2002년 통신기업인 월드컴은 지출을 설비투자로 과대계상해서 38억달러의 순이익을 부풀린 사실이 드러났다. 미 연방검찰은 월드컴 최고경영자인 버너드 에버스의 회계부정을 2년 가까이 조사했지만 결정적인 단서를 잡지 못했다. 회계장부 조작이 워낙 정교했기 때문이다. 버너드는 자신이 범죄에 연루된 사실을 드러낼 만한 어떤 서류도 남기지 않았다. 이메일 대화를 이용하지도 않고, 어떤 대화 내용도 서류로 남기지 못하도록 용의주도하게 행동했다. 그러나 이 회사의 최고재무책임자인 설리번의 진술로 버너드는 꼼짝없이 분식회계 혐의로 조사받게 됐다. 설리번은 자신에게 부과된 혐의대로 기소되면 165년형을 선고받을 처지에 놓이자 감형을 조건으로 버너드의 유죄를 입증할 증언에 나섰다. 버너드 전 회장은 지난해 7월 미국 연방법원에서 징역 25년형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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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순절도는 교도소, 횡령은 집행유예? |
법원·검찰의 사법통계에서 ‘기업범죄’ 항목은 따로 없다. 일반 형사범과 비교해 판결 동향과 범죄 추이를 유추해볼 수 있을 뿐이다. 경제사범 또는 기업범죄의 발생 추이를 보면, 재판에 회부된 사건의 경우 ‘절도와 강도의 죄’는 1995년 1만6천여건, 1998년 2만1천건에서 2004년에는 1만4천건으로 크게 줄었다. 반면 ‘횡령과 배임의 죄’는 1998년 4500여건에서 2004년 5400여건으로 급증했다. ‘조세범처벌법’ 사범도 1995년 194건에서 2003년 877건, 2004년 1607명으로 대폭 늘었다.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사범 역시 1995년 549건에서 2004년 1558건으로 크게 늘었다.
재판을 받은 피고인 중 실형(징역형)과 집행유예 비율은 어떨까? 2004년에 ‘절도와 강도의 죄’는 재판에 회부된 총 1만4094명에서 실형 5천517명, 집행유예 6천100명, 재산형 1천207명으로 실형과 집행유예가 엇비슷하다. 반면 ‘조세범처벌법’ 위반으로 재판받은 1380명 중에서 실형은 248명에 불과하고, 집행유예는 710명, 재산형은 326명이었다. ‘상법’ 위반사범도 총 130명에서 실형은 10명이고, 집행유예가 42명, 재산형은 56명으로 나타났다.
죄명별로 집행유예율 추이를 보면, ‘절도와 강도의 죄’는 1999년 자유형(실형+집행유예) 중 집행유예가 6천801명으로 56.2%였는데 2001년에는 50.3%, 2003년에는 52.4%로 줄었다. 반면, ‘횡령과 배임의 죄’는 1999년에 집행유예자가 1084명으로 53.8%였는데, 2002년에는 1812명으로 59.2%, 2003년에는 56.8%로 늘었다. 단순 절도·강도범은 교도소로 보내고, 횡령 등 범죄를 저지른 기업범죄 피고인은 집행유예로 풀려나는 비중이 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검찰쪽을 보면 ‘경제사범’을 정식 재판에 넘기기보다 (관대하게?)벌금 기소하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 1998년 기소된 경제사범 총 7만2천명 가운데 정식재판에 회부된 사람은 2만3천명, 벌금 기소는 4만8천건이었다. 그러나 2004년에는 경제사범 7만4천명 중 재판 회부는 1만4천명에 불과하고, 대다수(5만9천명)는 벌금으로 기소됐다. 재판 회부가 절반으로 줄어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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