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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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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는 여전히 살아있다

등록 2006-02-22 00:00 수정 2020-05-03 04:24

초등학교로 바뀐 지 10년, 개정운동의 주역 김남식·이치석 선생을 만나다
애국조회와 국기에 대한 맹세, 상명하복의 일제 교육 시스템은 바뀌지 않아

▣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2006년 2월 한국의 국가주의는 어떤 정체성을 갖는가. 2002년 전국을 물들인 월드컵 붉은색 티셔츠, 2004년 일본 시마네현의 독도 편입에 대한 애국주의 열풍, 2005년 황우석 사태로 한 ‘황빠’들의 촛불 시위, 그리고 최근 국기에 대한 맹세 폐지를 둘러싼 논란까지. 이들은 한국 국가주의의 징후적 사건들이다.

10년 전 국가주의의 간판을 내린 작지만 괄목할 만한 사건이 있었다. 1996년 3월 ‘국민학교’라는 이름이 폐지된 것이다. 국민학교 명칭 개정운동의 시작부터 끝까지 헌신한 사람은 국가주의를 거부한 교사들이었다. 김남식(88) 선생과 이치석(52) 선생. 그러나 이들은 “국가주의 간판을 내린 지 10년이 지났지만, 학교 현장은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고 말한다. 김씨는 일제시대인 1939년부터 교단에 섰다가 해고와 임용을 반복한 끝에 1985년 정년퇴직했다. 김씨를 개인적 스승으로 모시며 평전을 집필하고 있는 이씨 또한 2004년 퇴직해 학교사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이들에게 한국 교육의 역사를 들으면, 2006년의 국가주의를 해독할 수 있을까. 그들을 2월14일 서울 수유리 4·19공원 앞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함석헌 선생의 말에 충격 받다

두 분은 어떻게 인연을 맺었나.

이치석=5·16 군사 쿠데타로 투옥과 파면을 당한 교사들이 만나는 ‘응암동 모임’이 있었다. 응암동의 한 중국집에서 10년 넘게 이어진 비밀모임이었는데, 한 선생의 소개로 그곳에서 가서 김 선생님을 처음 만났다.

김남식=1961년이었나. 교원노조(4·19 교원노조라고 불렸다)를 만드는 데 관여했는데, 서울 무악초등학교에서 체포됐다. 토요일 오후였다. 3학년 대 6학년 배구시합이 끝나자마자 끌려갔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반년을 살았던 것 같다.(김남식씨는 아래뻘인 이치석씨에게 존댓말을 했다.)

국민학교라는 이름이 문제라고 느낀 사람이 별로 없었을 것 같다.

이치석=1986년 <민중교육> 사건에 연루된 선생님들을 중심으로 민주실천교육협의회 창립식을 할 때였다. 5월15일 흥사단 강당에서 열린 창립식 축사에서 고 함석헌 선생이 민주화 운동에 대한 단 한마디의 언급도 없이 “국민학교란 이름을 두고 어떻게 민족·민주교육을 하겠다는 것이냐?”고 하셨다. 충격을 받았다. 알고 보니 그건 함 선생의 지론이었다.

김남식=함 선생은 예전부터 그런 말씀을 자주 하셨다. 2차 대전이 끝난 뒤 일본도 국민학교를 소학교로 바꿨는데, 어찌 우리는 국민학교란 이름을 아직 쓰고 있느냐며 정말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하시던 기억이 난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함 선생의 말을 흘려들었는데, 이 선생이 나서 운동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이치석=국민학교 명칭 개정운동에 뜻을 모은 것은 1991년 가을부터다. 사실 그즈음 전교조에 찾아가 이 문제를 두 차례나 제안했다가 거부당했다. 오히려 ‘국민교육’이란 게 좋은 것 아니냐는 반응도 있었다. 굳이 말하자면 과거의 진실에 대한 조직의 이해가 부족했다고나 할까. 1993년 봄부터 국민학교 명칭 개정을 위한 국회 청원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이를 처음 결정할 때 모인 사람은 단 네 명이었고, 전혀 가망이 없어 보였으나 성패 여부는 따지지 말자고 했다. 그해 6월26일에 <한겨레>에 첫 보도가 났고, 5181명의 이름으로 10월26일 국회에 청원했다. 일흔을 넘긴 김남식 선생의 의지가 큰 힘이 됐다.

김 선생님은 지금도 일제 식민지 교육을 반성하며 넝마를 줍는다고 들었다.

김남식=처음에는 간디가 제일의 봉사는 변기 청소라는 말을 한 적도 있어 나도 그런 일을 해보자고 해서 시작했다. 그러던 중 내가 왜정 때 학생들에게 일본말 쓰기를 시킨 것에 대해 벌을 받는 의미로 청소를 이어나가고 있다. 1939년 초등학교에 첫 발령을 받았는데, 일주일에 한 시간짜리 조선어 수업 말고는 우리말을 쓰지 않도록 하고 있었다. 주번 교사는 아침마다 4명의 주번에게 각각 ‘국어 상용’이라고 쓰인 손바닥만 한 크기의 패를 줬다. 주번은 우리말을 쓰는 친구를 발견하면 그 패를 그에게 건넸다. 운동장 구석에서라도 우리말을 쓰면 그 패를 받아야 한다. 그 패를 받은 아이가 다른 아이에게 하교 시간까지 못 넘기면, 최종적으로 교무실에 그 패를 들고 가야 한다. 늦게나마 ‘내가 교사로서 참 나쁜 짓을 했구나’ ‘민족반역자였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명칭 변경, 쥐꼬리만 자른 셈

이치석=김 선생님께서는 정년퇴임식에서 그런 고백을 하셨다. 일본은 1937년 중일전쟁에 들어가고 이듬해 ‘황국신민’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한다. 1938년부터는 우리말을 못 쓰게 했다. 김 선생님이 첫 부임을 하던 때의 시대적 배경이 그렇다.

여하튼 1941년 일제가 만든 국민학교가 1996년 폐지됐다. 그리고 10년이 지났다. 지금 보니 어떤가.

이치석=국민학교는 명칭의 문제가 아니다. ‘국민학교제’라는 일본식 8년제 의무교육제도의 이름이다. 국민학교 시스템은 여전히 그대로다. 지금 생각해보면, 쥐 뒤꼬리만 자른 게 아니었을까.

국민학교 시스템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말은 일제 국가주의가 2006년의 학교에 살아 있다는 말인가.

이치석=물론 상당히 달라진 부분도 있다. 애국조회와 국기에 대한 맹세가 아직 남아 있지 않나. 지금도 규모가 크고 화려한 교장실은 옛날과 똑같고, 상명하복의 군대를 연상시킨다. 내가 본 외국의 학교 교장실은 매우 작고 소박했다. 물론 진짜 문제는 가시적인 교장실 풍경이 아니다. 일제시대 전쟁 폭력이 판을 치던 시대에 칸막이 교실에서 적과 아군을 이분법적으로 가르던 일방적이고 상대주의적인 국민교육의 가치관이 아직도 여러 가지 변형된 병원체로서 학교 현장을 지배하고 있다. 국민학교라는 이름만 없어진 건 아닐까.

일제시대 애국조회는 어떻게 진행됐나. 김 선생님이 생생하게 기억할 것 같은데.

김남식=월요일이면 애국조회를 했다. ‘우리는 대일본제국의 신민입니다. 우리들은 마음을 합하여 천황 폐하께 충의를 다합니다. 우리들은 인고단련하고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되겠습니다.’ (그는 이어 일본말로도 황국신민서사를 낭독했다.) 이렇게 외우고 히노마루에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동쪽을 향해 동방요배라는 것을 했다. 도쿄의 황궁이 있는 동쪽에 절하는 것이다.

이치석=우리는 국민학교보다 국민이란 말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고 싶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국가주의 학교 명칭을 고친 뒤에도, 그 역사적 의미에 대해서 무관심한 학교 현장을 보고 무척 실망했다. 만약 교육부나 교육자들이 진지한 관심을 가졌다면, 이미 애국조회나 국기에 대한 맹세(일제 때는 황국신민서사)도 없어져야 했다.

<한겨레21>이 국기에 대한 맹세를 없애자고 주장을 하자, 사회적인 파란이 일었다. 그러나 네티즌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존치론이 우세하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

이치석=과거에 대한 망각, 국가주의 교육의 사회적 학습효과 때문이 아닐까? 국민학교라는 이름을 바꾸자고 했을 때, 반대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는 정이 들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돈이 든다는 것이었다. 국기 맹세를 폐지하자는 데 대한 반대 여론도 마찬가지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교육이 무엇인가? 정이니 돈이니 따져선 안 되는 중요한 영역이다.

김남식=(국기에 대한 맹세는) 당연히 폐지돼야 한다.

지금의 교육은 국가만 있을 뿐

이치석=국가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게 학교 시스템이다. 지금 학교 시스템의 골격은 일제 때 그대로다. 학교는 국가주의 잔재라기보다는 시스템 그 자체다. 오히려 학교 교육을 받은 우리들이 국가주의 교육 시스템을 통과한 잔재라고나 할까. 황우석에 열광하는 네티즌도 국가주의 교육과 긴밀한 연관이 있다. 황우석이 국민을 먹여살린다는 경제논리는 일제시대의 ‘일등국가론’과 무관치 않다.

그렇다면 유럽은 어떤가. 그들 역시 근대국가를 형성하고 국민교육을 하지 않았나.

이치석=국가는 전쟁 수행 기관이었다. 전쟁 수행은 국가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서구에서 국가주의의 절정은 1차 대전이었다. 학교는 그 국가주의 시스템 속에 존재했다. 많은 교사들이 전쟁에 자원했다. 아이들은 군사훈련을 받았다. 지금 학교 제도에도 전쟁의 영향이 남아 있다. 캠핑이나 보이스카우트도 전쟁문화와 관련이 있다. 그러나 서구는 전쟁 직후부터 이런 국가주의의 속성을 반성해왔다. 프랑스 교원노조는 전쟁을 비판했으며, 전쟁이 끝난 뒤 지성인들은 국가주의적 맹목성을 반성하면서 많은 부분을 수정해나갔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지 못했다. 국가주의 교육은 일제를 통해 이식됐으며, 분단 상황에서 반공의 이름으로 지속됐다.

냉전이 해체되고 반공이 무의미해졌지만 도덕 교과서엔 개인이 없다.

이치석=전체주의는 개인을 억압하고 집단을 강조한다. 현재의 학교는 과거를 망각하고 있다. 교사들조차 일제가 남겨놓은 유산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개인(individual)은 분할될 수 없는 존재, 즉 전체 그 자체다. 올바른 개인으로 성장시키는 게 교육의 목적이 돼야 한다. 지금의 교육은 주체인 나와 타자를 인식시키지 않는다. 국가만 있을 뿐이다.



국민, 메이지 유신의 발명품

일왕에 대한 충성을 강요한 교육칙어를 1895년 고종이 모방

국민이라는 단어는 메이지 유신 때 영어인 네이션(nation)을 옮긴 말이다. 이것이 한국의 공문서에 처음 등장한 것은 1895년 12월 고종 황제가 발표한 교육입국조서에서였다. “교육의 실제는 덕육, 체육, 지육에 있다 하여 새 교육의 대강령 3조를 전국민에게 내렸다… 아! 내가 가르치지 아니하면 국가는 튼튼해지기가 심히 어렵다. 세계의 형세를 보건대 부강하며 독립하여 응시하는 모든 나라는 다 국민의 지식이 개명하였다.”
그러나 이치석씨는 “5년 전 메이지의 교육칙어를 모방한 것”이라고 말한다. 교육칙어는 일왕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을 도덕의 근원으로 내세웠다. 바로 학교에서 만드는 ‘국민’의 내용이다.
‘국민교육회’ 등 항일운동 차원의 자주적인 국민교육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중일전쟁을 기점으로 국민교육은 식민지 친일교육으로 귀결되고 만다. 일본은 1938년 보통학교를 심상소학교로 바꾸고, 1941년에는 학제 개편과 함께 국민학교령을 발표한다. 대동아공영권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전시 체제에 맞는 정신무장을 강조하기 위해 학제를 개편한 것이다. 쉽게 말해 전시 교육개혁이다. 학교는 점차 군사훈련소가 되어간다.
국민이라는 단어는 해방 뒤에도 강조된다. 195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인민이라는 용어와 함께 통용됐고, 북한에서 자주 쓴다는 이유로 ‘인민’이라는 이름은 사장됐다. 북한은 인민학교라는 이름을 썼다. 남북한의 학교 교육은 군사주의 경향으로 흘렀다. 이치석씨는 “한국의 국민은 구한말의 국민, 식민지 친일 국민, 분단 시대의 반공 국민으로 세 가지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며 “아직 국민국가의 피플(people)로 변모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 참고: 이치석, <전쟁과 학교>, 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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