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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하고픈, 반드시 암살하고픈…

등록 2006-02-09 00:00 수정 2020-05-03 04:24

이스라엘이 꼭 죽이려 했으나 실패했던 3인의 하마스 지도자들을 말한다
강경파로 꼽히는 마셜, 실용주의자 하니야, 야신의 주치의 출신 알자히르

▣ 박민희 기자/ 한겨레 국제부 minggu@hani.co.kr

하마스의 창설자이자 정신적 지도자였던 셰이크 아메드 야신은 2004년 3월22일 이스라엘의 미사일에 맞아 처참하게 살해됐다. 몸이 마비돼 휠체어에 의지하던 야신이 살해된 지 5주 만에 그의 후계자인 압델 아지즈 란티시도 다시 이스라엘군의 미사일 공격으로 숨졌다. 그 뒤, 2년도 안 돼 그들의 동료와 후계자들이 팔레스타인 정부를 이끌게 됐다.

칼리드 마셜의 영화같은 독극물 사건

란티시가 암살된 지 한 달 만에 하마스는 가자지구에서 비밀리에 지도자를 선출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스라엘의 암살을 우려해 지도자를 공개하지 않아왔다. 그렇지만 총선 승리 이후 정치국장 칼리드 마셜을 비롯해 이스마일 하니야, 마무드 알자하르 등 하마스 지도자들의 윤곽이 드러나고 있다. 이들 역시 거듭된 이스라엘의 암살 공격을 딛고 살아남았다.

현재 실질적인 하마스의 최고지도자로 꼽히는 것은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 머물면서 활동하고 있는 칼리드 마셜이다. 1956년생으로 알려진 하마스 정치국장 마셜은 물리 교사 출신으로 1990년대 요르단에서 하마스의 자금 조달을 담당하면서 아랍 국가들과 이란 정부 등과 관계를 다져온 것으로 알려졌다. 2002년 당시 사우디아라비아 압둘라 왕세자(현재는 국왕)와 만났다는 보도가 있으며, 2004년 11월 카이로에서 열린 고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장례식에 사우디 왕족들과 함께 나란히 참석하는 등 사우디 왕가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아라파트 정권과 파타의 실정을 날카롭게 비판해왔지만, 총선 승리가 확정된 1월26일 마무드 아바스 자치정부 수반에게 전화를 걸어 “연정 구성을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또 하마스가 집권하더라도 무장해제할 계획은 전혀 없다고 강조하면서 “하마스는 팔레스타인인들의 동의 아래 모든 파벌들의 무기를 하나로 모으고, 독립국가와 같은 군대를 창설해 팔레스타인인들을 침략에서 지킬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007 첩보 영화를 방불케 하는 암살 사건의 ‘희생자’로도 잘 알려졌다. 영국 <bbc> 등의 보도를 보면 1997년 9월25일 당시 요르단에서 살고 있던 마셜은 거리를 걷다가 두 명의 괴한의 습격을 받고 뭔가에 찔렸다. 그는 쓰러져 병원에 실려갔고, 귀에 특수한 독극물이 주입된 것이 발견됐다. 이스라엘 벤냐민 네타냐후 정부의 지시를 받은 모사드 멤버 10명이 캐나다 관광객으로 가장해 암살을 기도한 것으로 밝혀졌고, 요르단 당국은 모사드 요원 2명을 체포했다. 당시 중동 평화의 중재자를 자처하던 후세인 요르단 국왕은 이스라엘과의 평화 협상을 중단할 것이라고 위협하며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에게 해독제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네타냐후가 이를 거절하자 당시 미 클린턴 대통령이 개입해 이스라엘 정부를 압박해 마셜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요르단에 체포된 모사드 요원들은 이스라엘이 야신을 포함한 20명의 팔레스타인 수감자를 석방하기로 하고 맞교환돼 풀려났다.



알자히르, 폭격에도 살아남다

후세인 국왕의 후계자인 압둘라 요르단 국왕이 미국과 이스라엘의 압력을 받고 암만의 하마스 사무소를 폐쇄하자, 마셜은 시리아로 망명했다. 마셜은 하마스 내 강경파로 꼽히고 있다.
하마스는 이번 총선에서 다양한 성향의 후보들을 영입해 ‘변화와 개혁’이란 이름으로 참여했다. 이 후보 명부에서 1순위에 올라 있는 것이 이스마일 하니야(42)다. 그는 팔레스타인 내에서 하마스 선거운동을 지휘했으며, 언론에 하마스의 입장을 대변하는 등 하마스의 ‘얼굴’로 알려졌다. 하마스가 팔레스타인 내각을 구성하게 되면 자치정부의 총리 1순위로 거론되고 있다.
가자지구의 알샤티 난민촌에서 태어난 하니야는 가자의 이슬람대학에서 이슬람문학을 전공했으며, 대학 졸업 뒤 3년 동안 이스라엘 감옥에 구금됐다가 레바논으로 추방됐다. 1년 뒤 돌아와 이슬람대학 학장이 됐고, 1997년 야신이 이스라엘 감옥에서 석방된 뒤엔 야신의 비서실장이 됐다. 팔레스타인의 ‘2차 인티파다’ 동안 야신을 보좌하면서 하마스 지도부 안에서 자리를 굳혔으며, 야신과 란티시 등 여러 인물들이 암살되는 동안 살아남아 총선 승리를 이끌었다. 그 역시 이스라엘에 대한 무력투쟁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밝혔지만, 유럽·미국·러시아·유엔 등에 무조건적인 대화를 요구하는 등 유연한 노선을 추구하는 실용주의자라는 평을 받고 있다.
하마스의 3대 지도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마무드 알자하르는 하마스의 공동 창립자 중 한 명이다. 1945년 팔레스타인인 아버지와 이집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카이로대 의대를 졸업하고 카이로 아인샴스대학에서 외과의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팔레스타인의학협회 창설을 돕고 가자 이슬람대학을 창립하기도 했다.
1988년 하마스 설립을 주도하면서 지도자 중 한 명이 되었으며, 대변인이자 야신의 주치의 역할도 해왔다. 2004년 야신이 암살되자 알자하르가 후계자라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2003년 9월 이스라엘 F-16 전투기들이 그의 집에 대규모 폭격을 퍼부었다. 그는 약간의 부상을 입고 살아났지만 그의 아들과 경호원이 숨졌고 그의 딸을 포함한 20여 명이 다쳤다. 그의 집을 비롯해 주변의 집 10여 채와 사원이 파괴됐다.


이슬람주의 단체의 원조 격으로 비교적 온건한 노선을 채택하고 있는 이집트 무슬림형제단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하마스가 1987년 팔레스타인인들의 ‘1차 인티파다’ 기간에 결성되자, 초기에 이스라엘은 하마스가 야세르 아라파트의 강력한 세력을 견제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이들을 지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군의 공격으로 수많은 팔레스타인 민간인들이 살해되는 상황에서 하마스는 점점 더 무력 저항을 강화해갔으며, 결국 88년 “이스라엘 파괴”를 강령에 명시하고 이스라엘 민간인에 대한 자살폭탄 공격을 시작했다. 1994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립 뒤 10년 동안 파타가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아무런 변화와 희망도 가져다주지 못했으며, 삶의 곳곳을 짓누르는 이스라엘의 점령 정책이 전혀 나아지지 않고 ‘분리장벽’으로 상징되는 억압이 점점 높고 길게 팔레스타인 구석구석을 가로막는 현실이 결국 하마스 지도자들에게 ‘승리’를 안겨주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키워준 호랑이

파타가 오랫동안 야세르 아라파트 개인의 카리스마에 의존해온 데 비해 하마스는 개인의 면면보다는 그들이 공유하는 이슬람적 가치와 이스라엘에 대한 끈질긴 저항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결속해왔다. 하마스 지도자들을 암살함으로써 하마스를 무력화하겠다는 이스라엘의 전략이나 ‘중동 민주화’를 통해 이슬람주의에 대항하는 ‘민주적 정권’들을 만들어내겠다는 미국의 전략은 계속 빗나가고 있다. 이스라엘의 하마스 지도자 암살은 이스라엘의 점령으로 고통받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순교자’와 ‘희생자’ 하마스의 이미지를 더욱 각인시켰을 뿐이다.
</b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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