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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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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 모진 겨울이 시작됐다

등록 2006-01-20 00:00 수정 2020-05-03 04:24

재난 현장에 양철 슬레이트와 담요를 전달하고 온 여행가 김남희씨의 르포
절망 속에도 먼저 웃으며 인사하고 대접하려는 이들, 거기서 찾은 희망의 씨앗

▣ 발라코트(파키스탄)= 글·사진 김남희 여행가 www.skywaywalker.com

지난해 10월8일 아침 8시50분 파키스탄 북서 국경지역과 카슈미르를 강타한 진도 7.8의 강진은 8만 명에 이르는 사망자와 7만 명의 부상자, 400만 명의 이재민을 남겼다. 지진은 파키스탄 북서 지역의 지형을 5~6m씩 올려놓아 지도를 바꿀 정도였다. 텔레비전을 통해 들려오는 지진피해 지역의 소식은 처참했다. 당시 이 지역에 급파됐던 대부분의 긴급 구호팀이 철수한 현재, 여름용 텐트에서 겨울을 맞는 사람들의 이야기 너머로는 구호물자들이 이슬라마바드의 암시장에서 비싼 가격에 거래된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었다. 지금 파키스탄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구입한 텐트와 담요는 쓸모없어지고…

우연치 않게 대한불교 조계종 능인선원에서 지진 구호단이 꾸려진다는 소식을 들었다. 곧바로 구호단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는지”를 물었더니, 고맙게도 나를 단원으로 받아주겠다는 연락이 왔다. 구호단의 단장을 맡은 탄경 스님은 첫 만남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문화와 종교에 대한 존중이 없이는 이 활동을 시작해서는 안 된다. 돕고자 하는 마음 자체가 이미 부처의 마음이다. 그러니 종교색을 드러낼 필요가 없다. 휴머니즘보다 위대한 종교는 없다”고. 그 말씀이 내 마음에 빛처럼 날아와 꽂혔다. 능인선원에서는 한 달의 모금 기간 동안 성금 9500만원과 약품과 물품 5천만원 등 모두 1억5천만원의 성금과 물품을 모았다.

어느새 파키스탄으로 떠날 날이 시시각각 다가왔다. 능인선원의 NGO ‘YBA(Young Buddha Association) 글로벌 호프’팀은 이재민에게 가장 시급한 물품인 겨울용 텐트와 담요, 매트리스를 직접 나눠주기로 했다. 내 안에 두려운 마음이 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유난히 추위에 약한 내가 맡겨진 일을 잘해낼 수 있을지, 조직 속에서 활동하기보다는 독립군 스타일에 익숙한 내가 팀과 융화를 이룰 수 있을지, 생전 처음 해보는 봉사 활동을 감당할 체력이 되는지, 처참한 환경에서 희망보다는 절망을 먼저 키우게 되는 건 아닌지…. 이런저런 두려움을 애써 누르며 지난해 12월17일(선발대는 14일 출발) 두려운 길을 따라나섰다.

우리 일행의 베이스 캠프는 만세라에 자리를 잡았다. 구호단의 활동은 쉽지 않았다. 국제구호 경험이 전혀 없는 민간단체의 첫 활동이기에 쉽지는 않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우리는 처음부터 난관에 부닥쳐야 했다. 주문했던 텐트의 불량률이 무려 60%에 육박했고, 꼼꼼한 품질 비교 끝에 구입한 담요는 샘플과 전혀 다른 질의 물건이 배달됐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우리가 준비한 텐트로는 추위와 폭설을 버텨낼 수 없다는 거였다. 결국 주문한 텐트를 전량 반품했고, 이들에게 가장 필요하다는 ‘셸터’를 짓기 위한 양철 슬레이트(CGI·Corrugated Galbanized Ironsheet) 배분에 매진하는 것으로 활동 방향을 틀었다.

실제 구호활동에 들어가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우선 민관 합동 조직인 ‘국가인간발달위원회’(NCHD·National Commission for Human Development) 만세라 지부의 협조로 활동할 지역을 결정했다. 발라코트에서 1시간가량 더 들어간 산간 마을 카와이(Kawai). 해발고도 1450m, 3544명의 이재민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마을을 둘러보니 지진에 무너지지 않은 건물은 단 한 채도 없었다. 이곳의 치안유지와 구호물품 배급을 담당하는 군부대와 상의해 교육과 의료, 셸터 제공의 활동을 동시다발적으로 펼치기로 합의했다.

이번 지진의 최대 피해 지역인 발라코트는 완벽하게 파괴돼 있었다. 어디선가 주검 썩는 냄새가 날아왔고, 사방이 무너진 건물과 콘크리트 잔해 더미였다. 초등학교가 서 있던 자리는 절벽 아래 강바닥으로 가라앉아 완전히 사라졌다. 주인 잃은 공책과 가방, 신발, 교과서가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다. 참담한 마음으로 마을을 둘러보는 동안 폐허에서 놀던 아이들이 “헬로!”를 외친다. 물을 긷던 아이들, 무언가 사들고 가던 여인들이 내게 다가와 손을 내밀며 “하우 아 유?”(How are you)라고 묻는다. “어때요? 괜찮아요? 살 만해요?” 그건 내가 묻고 싶은 질문이었다. 나를 향해 안부를 묻는 그들의 미소와 마음이 낯설었다.

공포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던 여진

텐트 사이로 뛰어가는 꼬마를 찍고 있을 때였다. 텐트의 휘장이 걷히며 온 가족이 나와 나를 불렀다. “알라의 축복과 평화가 당신과 함께하기를” “당신을 위해 기도할게요”라고 말하던 주인 아줌마는 내게 차를 마시겠냐고, 점심을 먹겠냐고 자꾸 물었다. 그리고 거듭 말했다. 고맙다고. 무엇이 고마운 걸까. 슬쩍 들여다본 텐트에는 이불만 가득하고, 삭정이를 지핀 화덕에는 녹두죽이 끓고 있을 뿐, 살림살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얼마나 오래 못 씻었는지 아이들의 몰골이 말이 아니다. 그런데도 나를 보고 웃고, 뭔가를 대접하고 싶어하는 마음이라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거대한 참사 앞에서 인간의 감각은 마비되는 걸까. 발라코트의 폐허 앞에서 나는 오히려 무덤덤했다. 개별적 인간의 고통과 상처가 내게 와 닿지 않았다. 발라코트에서 카와이로 이동하던 중에 도로에 앉아 있던 사람들을 만났다. 잃어버린, 주검조차 찾지 못한 아들의 사진을 내밀며 우는 할머니. 그건 이미 말라버린, 통곡할 기운조차 다 빼앗긴 눈물이었다. 아홉 자식 중 여덟을 지진으로 잃은 할머니였다. 옆에 앉아 있던, 졸지에 고아가 되어버린 손자의 눈빛은 무서울 정도로 공허했다.

“이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냐?”고 메마른 눈물을 떨어뜨리는 그녀의 주름진 얼굴 위로 절망이 내려앉아 있었다. 카와이로 가는 절벽길 곳곳에는 그렇게 망연자실한 표정의 사람들이 위태롭게 앉아 있었다. 그제야 사람들의 고통이 내 가슴으로 전해졌다. 자식을 잃고, 부모를 잃고, 잿더미에 홀로 남은 사람들이 어떻게 고통을 견뎌가는지 알 수 없었다. 카와이로 향하는 버스에서 나는 그 막막한 슬픔의 무게에 눌려 오래 울어야 했다.

다음날부터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군인들이 마을을 다니며 목재 프레임을 만든 집을 조사해 등록증을 나눠주면, 그걸 가지고 온 이들에게 양철 슬레이트를 나눠주는 방식이었다. 슬레이트를 나눠줄 때 아이가 있는 집에는 비타민과 공책, 개인 위생용품을 함께 분배했다. 그 사이 의료팀은 고용한 의사와 약사로 메디컬 캠프 안에서 회진을 펼치고, 교육팀은 미리 준비해간 문구용품과 놀이용품으로 아이들과 노는 식이었다. 그렇게 구호활동을 벌이던 2주 동안 여러 번 여진이 일어났다. 그때마다 구호팀 사람들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구호단체의 활동이 가장 미약한 바틀 지역을 중심으로 800장의 담요와 1천 개의 위생 세트를 나눠주던 날이었다. 갑자기 발밑이 심하게 흔들렸다. 공포가 머리끝으로 치솟았다. 5초쯤 되었을까. 담요를 받기 위해 기다리던 사람들의 얼굴이 소리도 없이 노랗게 질려가는 걸 보고 있던 그 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처음 체험하는 여진이었다. 그런 여진들로 인해 카와이로 가는 길 곳곳이 산사태로 막혔다. 막힌 도로를 치우는 사이에 다시 돌들이 무너져내리기도 했다. 때로 우리는 기다림을 참지 못해 걸어서 카와이로 가기도 했다. 두 시간 거리를 네 시간씩 걸려 찾아가면 사람들은 이미 긴 줄을 만들어 우리의 도착을, 배분될 양철 슬레이트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수 이문세가 준 400달러의 힘

우리가 파키스탄에 머무는 동안 맑고 따뜻한 날씨가 이어졌다. 양지에 삼삼오오 모여앉아 슬레이트 분배를 기다리는 남자들을 보고 있으면 어지러운 마음이 일곤 했다. 한 집안의 가장이었으나 이제는 혼자 남은 이, 아직 보살핌을 받아야 할 나이에 가장이 되어버린 소년, 고아가 된 조카들을 거두어야 하기에 더욱 가난해진 가장…. 가슴 아픈 사연 없는 이는 하나도 없는 이들의 어깨는 세상을 짊은 듯 무거워 보였다. 어제까지 살을 맞대고 잠들던 가족을 잃고 혼자 살아남아 먹고살아가야 하는 일의 어이없음. 이들의 삶을 버텨가게 하는 건 무엇일까? 인간은 어디까지 버텨낼 수 있을까?

어떤 재앙과 고통에도 끝내 살아남아 목구멍으로 밥숟가락을 밀어넣는 그 모진 생에의 욕구가 내게는 눈물겹고 무서웠다. 어른들이 양철 슬레이트의 배분을 기다리던 어느 날, 한쪽 구석에서는 아이들이 구호품으로 나눠진 옷을 고르고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품질이 좋지 않은, 입을 만큼 입은 옷 더미 사이에서 아이들이 놀이하듯 옷을 고르고 있었다. 환호성을 지르고, 옷을 집어 서로에게 던지기도 하며, 제 몸에 맞는 옷을 고르는 아이들. 그 새카맣게 코 묻은 얼굴을 보며 나는 누군가에게 막 따지고 싶었다. 이 아이들에게 무슨 죄가 있는지를.

그 거대한 난민촌에서 우리가 한 일은 미약했다. 3925장의 양철 슬레이트로 325가구의 주택 건설을 도운 일, 의사와 약사를 고용해 병원을 운영하고,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 천막학교를 만들고, 800장의 담요와 1천 개의 위생 세트를 나눠준 일이 전부였다. 그나마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겨우 해낸 일들이었다. 대신 우리는 구호활동이 일회성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데 뜻을 모으고, 학교의 운영비 일체를 지원하는 장기 지원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구체적인 지원을 협의하기 위해 2월에 다시 파키스탄에 들어오기로 했다.

서울을 떠나기 전, 평소 가까이 지내던 가수 이문세씨가 대원들끼리 밥 한 끼를 나누라고 400달러를 챙겨주었다. 이곳에서 집을 한 채 지을 수 있는 양철 슬라이트 30장을 사고도 남는 돈이었다. 우리는 밥값과 술값으로 그 돈을 쓰기보다는 집을 한 채 더 짓자고 의견을 모았다. “우리가 누리는 이만큼의 부는 동남아 노동자들을 착취해서 얻은 것이다. 그것의 지극히 적은 일부를, 겨우 이런 기회를 통해서 돌려주는 것이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라는 스님의 말씀처럼, 우리가 한 일이라고는 우리가 가진 것의 지극히 적은 일부를 나눠주고 왔을 뿐이었다.

떠나자마자 폭설이 쏟아지다

우리가 파키스탄을 떠난 직후 산간지역에는 폭설이 쏟아졌다. 우리가 나눠준 3900장의 양철 슬레이트가 누군가의 목숨을 지켜줬을까. 겨울은 이제 막 시작됐다. 발라코트, 만세라의 거대한 텐트촌, 그 안의 사람들은 모진 겨울을 스스로 찾은 희망만으로 버텨내고 있다. 파키스탄에서 내가 배운 것은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었다. 희망은 외부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살아남아야만 하는 상황에서 스스로 희망을 품는다. 파키스탄의 이재민들은 이미 스스로 희망의 씨앗을 품고 있었다. 그 작고 여린 씨앗을 싹 틔우고 잎을 내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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