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대집행법에 근거해 사람이 사는 집을 법원 판결도 없이 허물어온 53년
철거민이 살인자가 돼야 했던 2005년 4월16일 오산에선 무슨 일이 있었나
올해는 ‘행정대집행법’이 만들어진 지 53년째 되는 해다. 지난 50여 년 동안 정부와 건설 자본은 이 법을 근거로 사람이 사는 집을 법원의 판결도 받지 않고 강제로 허물어왔다. 띄어쓰기도 제대로 되지 않은 법으로 지난 반세기 동안 수백만의 철거민들을 거리로 내몬 현실은 ‘대한민국 61년사’에서 알려지지 않은 가장 기막힌 코미디 가운데 하나다.
사람들은 “50년 동안 되풀이된 야만을 멈추자”고 떨쳐 일어났다. 철거민들과 노점상들은 “도시 빈민들의 생존권을 보호하는 쪽으로 행정대집행법을 바꾸라”며 국회 앞에서 천막 농성 중이고, 국가인권위원회는 ‘강제 철거 금지’를 뼈대로 한 정책 권고를 준비 중이다. 그렇지만 현실에서, 1950년대 청계천 판잣집을 허물던 시절의 야만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시선은 ‘철거민들의 폭력’을 강조하는 텔레비전 카메라의 이면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한겨레21>은 그 ‘너머’에 있는 진실을 위해 2005년 4월16일 경기도 오산에서의 하루를 재구성했다. 편집자
▣ 길윤형 기자charisma@hani.co.kr
벌써 1년 전이다. 2005년 4월16일은 화창한 봄날이었고, 토요일이었다. 경기도 오산시 수청동 우성그린빌라 101동 앞은 이미 전쟁터로 변해 있었다. 오후 1시30분. 방패·소화기·해머 등으로 무장한 경비용역업체 직원들이 오산 수청동 주민과 전국철거민연합(전철연) 회원 30여 명이 농성하고 있는 건물 안으로 첫 번째 진입을 시도했다. 농성자들은 콘크리트 덩어리·벽돌 조각·골프공 등을 던지며 강하게 저항했다. 실패였다. 철거 용역들은 1시간 반 동안 10~20분 간격으로 두 차례 더 건물 난입을 시도했다. 주민들이 던져대는 콘크리트 덩어리 등에 맞아 서덕영(24)씨는 갈비뼈를 다쳤고 한훈희(21)·김정득(23)씨는 뇌진탕을 입었다. 꼭두새벽부터 현장에 출동해 있던 경찰·한국주택공사·오산시 공무원들은 팔짱을 낀 채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날 오후 3시20분에 네 번째 진입 시도가 있었다. 우성그린빌라 101동 현관 부근까지 접근했다가 후퇴하던 경비용역업체 백경스페셜 가드 직원 이진욱(사망 당시 23살)씨가 쓰러졌다. 그는 현장에서 숨졌고, 주민들은 살인자가 됐다.
택지개발사업 없었다면 잘살았을 사람들
주민 김홍중(45)씨는 “우리 중에 누구도 일이 그렇게 커질지 상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1990년 1월에 오산으로 이사와 2000년 1월까지 10년 동안 살았다. 그러다 “애들 교육이나 직장 출퇴근 문제도 있고 해서” 수원 정자동으로 이사했다. 집은 1300만원을 받고 전세를 줬다. 그는 사고가 있던 날까지 ㄷ전자 서비스센터에 다니던 직장인이었다. 그는 사건이 터지던 날 아침, 평소처럼 출근할 예정이었다.
그의 불행은 2001년에 시작됐다. 대한주택공사가 경기도 오산시 수청동 일대를 택지개발예정지구(97만4900평)로 지정하겠다는 공람공고를 냈다. 2001년 9월25일이었다. 김씨는 “그런가 보다 했다”고 말했다. 좀더 솔직히 말해 “10년 넘게 살았던 집주인인데, 손해볼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의 예상은 빗나갔다. 주공은 그의 18평짜리 빌라에 보상금 4800만원을 책정했다. 기대했던 이주자 택지는 없었다. 주공 관계자는 “공람공고 ‘1년 전’부터 주민등록 전입신고가 유지되고 있는 집주인들에게만 이주자 택지를 줄 수 있다”고 말했다. 그 밖에 아파트 입주권도 준다고 했지만, 분양가 2억원을 마련할 길이 없는 그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보상비를 받아 전세 보증금 1300만원을 빼고, 빚 600만원을 갚고 나면 3천만원이 남았다.
주공이 택지개발사업을 진행하지 않았다면, 주민들은 있던 곳에서 별 탈없이 잘 살았을 것이다. 사업 시행으로 주민들은 혼란을 겪었다. “공기업이 하는 사업인데, 원주민들의 주거 여건이 이전보다 더 나빠지는 것은 잘못된 것 아닌가.” 주민들의 ‘상식’과 주공의 ‘보상 기준’은 맞지 않았다. 김학명(41)씨는 자기 이름이 아닌 아버지 이름으로 1996년부터 살아오고 있었고, 송재현(41)·이영자(38)씨 부부는 전입 날짜가 딱 이틀 모자랐다. 원기호(31)·김상필(41)씨 등은 오산에서 오랫동안 살아오다가 직장과 부친의 병 등으로 잠시 다른 곳에 살다가 다시 오산으로 돌아왔다. 2003년 11월부터 비슷한 사정을 가진 8가구가 뭉쳤다. 그들은 주공에 선처를 호소했고, 주공은 이를 거부했다. 그렇게 2년 동안 주공과의 줄다리기가 이어졌다.
경찰, 머뭇거리던 용역의 등을 떠밀다
주민 대부분은 전철연 지도부가 골리앗(주민들이 철거 용역의 침탈을 막기 위해 세우는 망루)을 세우기로 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 2005년 4월15일 밤 전철연 지도부는 각 지역의 철거대책위원회(철대위) 쪽에 “수청동 투쟁 준비가 끝났다”며 “망루 설치를 도와주러 모이라”고 지시했다. 일산 풍동·삼각수하동·용산5가동·인천 주안동·하남 풍산동·상도5동·고양 행신2지구·판교·신설동·상도2동·김포 신곡리 등의 철거민들이 그날 밤 11시께 오산에 모였다. 그들은 골리앗을 만들어주고 자기 지역으로 흩어질 예정이었다. 밤샘 작업으로 망루가 형태를 잡아가고 있었다.
4월16일 새벽 2~3시께 빌라 주변을 경비하던 주공과 용역업체 직원들이 망루를 발견했다. 주공에선 ‘비상연락망’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그날 새벽 4시30분부터 6시까지 화성경찰서 소속 정보과·경비교통과 형사들과 200여 명의 전경들이 건물 주위를 둘러쌌다. 윤성복 당시 화성경찰서장이 새벽부터 현장에 나와 상황을 지휘했다. 용역업체 쪽에서는 휴대전화로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을 털어 모았다. 날이 밝아오면서 주공 오산신도시 사업단 직원 모두와 오산시 공무원들도 현장에 집결했다. 철거민들을 변호하는 김칠준 변호사는 “단지 망루를 설치한다고 해서 그렇게 신속하게 경찰·주공·소방서·용역회사 직원·시청 공무원들이 모일 수 있는지 지금도 의아하다”고 말했다. 그들은 망루가 세워지면 용역들을 동원해 주민들을 끌어내고 그 과정에서 불거진 마찰을 문제 삼아 철거민들을 감옥에 가둘 계획이었을 것이다.
철거 용역들의 진입은 오후 1시부터 시작됐다. 철거민들의 저항은 생각보다 강했다. 현장을 둘러싼 경찰이 머뭇거리는 철거 용역들의 등을 떠밀었다. 용역업체 직원 김수만·이덕기·김관흥씨는 1심 법정에서 “빨리 진입하지 않으면 철수하겠다”고 경찰이 위협했다고 증언했다. 갖가지 투쟁 ‘무기’들로 무장한 철거민 30여 명을 진압하려면 방어 장비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용역 60명보다 더 많은 인원이 필요했을 것이다. 6월8일 현장을 최종 진압할 때 경찰은 길이 70m 대형 컨테이너에 상자 2개를 매달아 현장에 투입했다. 최루탄 연기를 뚫고 특공대 40명과 전투경찰 480명이 현장을 덮쳤다.
용역들은 오후 3시20분 전열을 가다듬고 마지막 공격을 감행했다. 주공이 그들에게 목공소에서 특별 제작한 ‘방패용 합판’을 가져다줬다. 이진욱(23·사망)·이동훈(20)·윤봉준(27)·김태형(21)씨 등이 그 합판을 들고 건물로 향했다. 101동 현관까지 접근했다가 102동 쪽으로 도망치는 순간 주민들이 던진 콘트리트 덩어리에 합판이 부서졌다. 이씨가 머리에 충격을 받고 쓰러졌다. 이후 철거민들이 던진 화염병과 폐인트 등이 그의 몸에 옮겨붙었다. 사인은 여전히 미지수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머리에 큰 충격을 받아 죽었을 수도 심장 질환에 의해 죽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화성경찰서 정보과·경비교통과 형사들과 전경 2개 중대 병력은 그 모든 광경을 팔짱을 끼고 지켜봤다. 1심 재판을 담당한 수원지방법원 형사11부(재판장 김의환)는 “경찰도 당시 현장 상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그들은 “인명 또는 신체에 위해를 끼치거나 재산에 중대한 손해를 끼칠 우려가 있는 이를 막을 책임이 있다”는 경찰관 직무집행법 5조를 위반했다. 김 변호사는 “철거민들의 주장이 틀렸다고 해도 경찰은 철거 용역이 건물로 진입하는 것을 막았어야 했다”고 말했다.
건물에 들어가 주민들을 끌어낸 주공도 법을 어겼다. 그들은 행정대집행법을 위반했다. 1심 법원은 판결문에서 “행정대집행 절차에 따르지 아니한 채 경비용역업체 직원들을 무리하게 투입해 망루를 철거하는 과정에서 피해자가 사망하는 결과가 발생했다”고 말했다. 행정대집행을 하려면 주민들에게 계고장을 발부한 뒤, 행정기관에서 대집행 영장을 발부받아야 한다. 경비업법이 정한 역할이 “시설을 경비하는 것”에 머무르고 있는 용역업체도 철거민을 해산하고 망루를 철거하는 데 나섰다. 경비업법 위반이다. 법을 어긴 경찰·주공·용역업체는 처벌받지 않았다.
라면 2개로 30명이 끼니를 때우다
사고가 날 때 원기호(31)씨는 근처 미도빌라 202호에 살고 있었다. 주민들은 “그는 철대위 투쟁을 함께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에게 농성장에 있던 그의 어머니가 “밥 먹고 가라”고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결혼한 지 채 한 달이 안 된 새신랑이었다. 그의 부친은 44년 동안 고생하다 겨우 집 한 채를 장만했다. 몸이 불편해 “2층까지 걸어다닐 수 없어” 부친이 다른 곳으로 이사나간 뒤, 그가 그 집으로 이사해왔다. 주공은 “아들과 아버지는 다르다”며 이주자 택지 제공을 거부했다. 아들은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 현장을 찾았다. 마침 망루 공사가 진행 중이었고, 별 생각 없이 일손을 도왔다. 그의 부친이 다른 곳으로 주민등록을 이전하지 않았다면 그는 이주자 택지를 받아 벌써 다른 곳으로 이사갔을 것이다. 주민들은 “기호씨네는 법을 너무 잘 지켜서 문제였다”고 말했다.
망루에서의 54일은 지옥이었다. 경찰이 생필품과 물을 넣어주지 않아 사람들은 빗물을 받아 마셨다. 전철연 철거민들이 경찰 포위망을 뚫고 생필품을 한 번 전달했고,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로 다시 생필품이 한 번 전달됐을 뿐이다. 현장에 있었던 김두순(45)씨는 “솥단지에 라면 2개 넣고 물 부어서 끓여 30명이 나눠 먹었다”고 말했다. 밥은 조개젓과 간장에 찍어 하루에 한 번 먹었다.
현장에서는 코미디 같은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5월12일 경찰의 삼엄한 포위망 아래 있던 송재현(41)씨네 집에 도둑이 들었다. 그들의 전입일은 2000년 9월27일이었다. 그의 동생은 “복덕방에서 조금만 서둘렀어도 그 고생은 안 했을 것”이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도둑은 송씨네 집의 철제 대문·텔레비전·냉장고 등을 싹 쓸어갔다. 기자의 접근조차 철통같이 막던 경찰의 360도 포위망이 어떻게 뚫렸는지 주민들은 여전히 알지 못한다.
6월8일 경찰의 침탈로 상황은 끝났다. 경찰 특공대가 최루탄을 쏘며 크레인을 타고 6곳에서 쏟아져 내려왔다. 철거민 몇 명이 옥상에서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저항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진압은 3분 만에 끝났다. 경찰은 성공적인 진압을 위해 주민들의 빌라와 비슷하게 생긴 화성 동탄의 빌라에서 예행연습(FTX)까지 마쳤다. 그날 김상필씨는 경찰 진압봉에 머리를 맞고 정신을 잃었다. 그가 쓰고 있던 안전모가 경찰의 진압봉에 깨졌다. 그는 화성경찰서에 방치돼 있다가 오산한국병원으로 옮겨졌다. 병원에서는 그가 “몸을 못 쓸지도 모른다”고 말했지만, 5일 만에 다행히 마비가 풀렸다. 그는 한동안 부인도 알아보지 못했다.
주민들은 “우린 투기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김홍중씨는 “개발이 어떻게 되는지, 보상법이 어떻게 되는지도 몰랐다”고 말했다. 그가 개발이 어떻게 되는지, 보상법이 어떻게 되는지 알았다면 10년 동안 살던 집에서 주민등록을 옮겨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요구가 주공의 보상 기준에 맞지 않았을지는 모르지만, 억울했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주민들 향해 골프채로 드라이버 샷!
주민들은 “우리는 일이 그렇게 커질 줄 몰랐다”며 울었다. 우성그린빌라 101동 102호에 살던 지광오(52)·김두순(45)씨 부부는 “우리 집 옥상에 망루를 짓는다는 사실을 그날 처음 알았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오가는 데 딸아이(22)가 불편할까봐 “오늘만 찜질방에 가서 자고 와라”고 했다. 지씨는 4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철대위 총무 이영자(38)씨는 주말을 맞아 외삼촌댁에 놀러간 아이들을 월요일에 학교에 보내려고 책가방을 들고 현장을 찾았다. 이씨는 3년의 실형을 받았다. 이씨의 두 아들 영철(12·가명)·영수(10)는 부모 없이 그해 여름을 났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살인자의 아들”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았다. 그 여름 경찰은 주민들을 향해 Y자 모양의 새총으로 골프공·너트·자갈 등을 날리고 골프채를 가져다 드라이버 샷을 날렸다. 주변을 에워싼 전경들이 눈으로 공의 포물선을 좇으며 “나이스 샷”을 외치며 환호했다. 1심에서 농성자 30명 가운데 11명이 실형을 선고받아 구치소에 갇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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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_ 김칠준 변호사]
철거민들이 개발 이전과 비슷한 수준의 주거환경 요구하는 건 당연
김칠준 변호사는 철거민들의 ‘단골’ 변호사다. 그는 1990년대 초부터 폭력적인 강제 철거에a 맞서 싸운 철거민들의 변론을 담당해왔다. 한때는 30건이 넘는 철거민 관련 소송을 동시에 진행하기도 했다. 그는 “‘폭력’은 나쁜 것이지만, 철거민들의 ‘방어적’ 폭력을 가져온 원인에 대해 사회가 좀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오산 사건에서 경찰·주공·철거 용역업체 등이 수많은 위법 행위를 저질렀음에도 처벌받은 사람은 없었다. 그는 “반성 없는 공권력이 더 큰 문제”라고 말했다.
오산 사태를 정리한다면.
=주공의 형식적인 보상 정책에 맞서 주민들은 현실적인 대책을 요구했고, 주공은 이를 거부했다. 주민들의 주장이 법 기준에 맞지 않았을지는 모르지만, 생존을 위해 절실한 것이었다. 경찰·주공 등이 주민들의 요구를 묵살하며 위법하게 주민들을 강제 진압하는 과정에서 폭력 사태가 일어났고, 철거민과 같은 사회적 약자인 철거 용역 직원이 숨졌다. 폭력을 행사한 주민들의 잘못도 크지만, 경찰과 주공의 책임도 묵과할 수 없다.
어찌됐든 ‘골리앗’으로 상징되는 철거민들의 폭력 투쟁은 공감을 얻기 힘들다는 지적도 있다.
=“폭력이 나쁘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다. 기억해야 할 점은 철거민들의 폭력은 ‘방어적’ 폭력이라는 점이다. 우리 사회의 근대화와 더불어 진행된 숱한 개발 과정에서 주공을 비롯한 건설회사들은 공권력의 조력을 받으며 무자비한 강제 철거를 진행해왔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망루를 만드는 게 폭압적으로 진행되는 강제 철거를 막으면서 실질적인 주거대책을 받으려고 한 것이지 어떤 적극적 폭력을 위한 것은 아니다.
강제 철거에 대한 합리적 기준은 뭔가.
=국제적인 기준으로 볼 때 강제 철거는 명백한 인권 침해다. 개발이 이뤄질 때 주민들이 주거 여건이 이전보다 더 나빠져서는 안 된다. 그게 기본이다. 주민들은 적어도 이전과 같은 수준의 주거 환경을 요구할 권리가 있고, 그에 맞는 주거 대책이 이뤄져야 한다. 하루빨리 국제적 기준에 맞게 주택법 등 관련 법규를 손질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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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살고 있는 집을 부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행정대집행법이 규정하는 행정대집행 절차를 따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민사소송법·민사집행법을 통해 집에 살고 있는 사람을 쫓아내는 ‘명도 소송’을 벌이는 것이다. 행정대집행은 철거 대상자에게 “언제까지 집을 헐라”고 통지(계고)한 뒤, 이를 따르지 않으면 기초자치 단체장이 사업시행자의 청구에 의해 영장을 발부해 시행한다. 행정자치부는 “법이 너무 낡아 개정이 필요하다”며 개정안을 내놨지만, 빈민단체들로부터 “오히려 개악됐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창수 새사회연대 대표는 “행정대집행에 의한 강제 철거는 법원의 판단 없이 행정청의 판단에 따라 한 사람에게 견디기 힘든 고통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시행 요건을 엄격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법은 4조에서 “그 불이행을 방치하면 크게 공익을 해칠 것으로 인정하는 때”라는 두루뭉술한 표현에 머무르고 있다. 빈민단체는 “이 조항을 좀더 분명하고 엄격히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행자부 개정안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대집행의 계고(5조)와 실행(6조) 등 법적 절차가 정해지긴 했지만 현실에서는 잘 지켜지고 있지 않는 점도 문제다. 오산 사태에서도 대한주택공사는 법이 정한 대집행 절차를 따르지 않았지만 전혀 처벌받지 않았다.
행자부 개정안은 개악 논란마저 낳고 있다. 이전 법에도 없던 즉시 집행(8조) 조항을 넣어 법이 정한 행정대집행 절차를 따르지 않아도 되는 예외 조항을 삽입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은 이에 대해 “현실적 필요성은 있지만 남용될 여지가 많아 위헌의 소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빈민단체들은 △야간대집행 제한 △인권침해 금지 규정 신설 △행정청에 엄격한 의무 부과 등의 조항을 넣어줄 것을 요구했지만, 행자부는 이마저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민주노동당 김정진 법제실장은 “행정대집행법은 그 중요성에 견줘 법 내용에 대한 인권적 검토가 많이 이뤄지지 못했다”며 “행정청의 편의 위주로 만들어진 행자부안 대신 인권침해 요소를 제거하는 쪽으로 법을 바꿔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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